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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0419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이도 GALLERY YIDO 서울 종로구 창덕궁길 191 이도 본점 3층 Tel. +82.2.741.0724 yido.kr
감화와 사색의 회화 ● 한 작가가 걸어온 이력을 조망하는 일은 꿈처럼 행복할 때도 있고 무의미처럼 지나쳐버릴 때도 있다. 한 작가의 전작품의 이력을 살펴보는 것은 지나간 시대와의 만남을 전제할 때 의미가 생성된다. 따라서 어느 작가가 개인이라는 주체의 물음과 사회 전반에 대한 대상의 의미 물음에 대해 처절하게 고민했는가 아닌가라는 사실이 훗날 내공으로 세상에 드러나게끔 마련이다. 자기 내면과 외부세계에 대한 의문을 강렬히 표명하면서 동시에 행복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리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크게 부여할 때 그는 형식주의자, 혹은 매체주의자가 된다. 형식주의의 트렌드는 새로운 시간의 물결이 몰려들 때 반드시 좌초된다. 반대로 외부세계, 즉 사회에 대한 물음을 화면에 직접적으로 이식시키는 행위는 대부분 맹목적 도취일 때가 많다.
작가 김용철이 걸어온 길을 지나온 시대와 함께 감상할 때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양극단에 대한 아쉬움은 불시에 녹아버린다. 그리는 행위 자체의 과정과 훈련에 대해서 철저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동시에 그는 시대와 현실에 대해서도 염려와 연민의 염(念)을 버리지 않았다. 1949년, 전쟁 발발 한 해 전에 강화에서 태어나 70년대 당시 첨단의 예술분위기였다는 아방가르드 예술집단 '그룹 엑스(Group-X)'에서 활동한 사실만을 떠올려봐도 짐작 가는 부분이 생긴다. 작가는 유년기에 선친께 부여 받은 사랑과 자연이 선사하는 지극한 행복감을 누렸을 것이다. 자연과 함께 소요(逍遙)한 유년기에서 문화에 대한 갈증으로 성장을 이행한 청년기에 작가는 이미 '포토 페인팅'이라는 자기 형식의 실험에 매몰한다. 사진과 실크스크린, 유화를 동시에 섞은 혼합매체의 실험이었는데, 본인이 이 시절의 시리즈를 '이것은 종이입니다(This is But a piece of Paper)'라고 명명했듯이 외부세계에 대한 재현을 통한 의미부여를 거부한 일종의 개인적 선언이었다. 그것은 형식성과 실험성에 보다 깊이 천착하겠다는 의지이면서도 특수한 당시 사회상에 대한 참견을 당분간 유보하겠다는 자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부언하자면 요즈음 유행하는 '하이브리드 페인팅'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미 작가는 수 십 년 전에 이 형식적 실험의 끝을 완성한 셈이다.
어느 시대나 동서고금을 통해서 삶의 가치는 있게 마련인데, 그것이 대부분 질서(order)가 먼저냐 자유(freedom)가 먼저냐는 선택의 갈등을 겪게 된다. 당시 우리 사회는 자유보다는 질서를 우선했다. 정돈된 질서는 강압이나 무리한 운영을 부수적으로 수반하게 된다. 어쩌면 그것은 예술의 본질인 자유와 상반되는 운명이기에 작가들은 여기에 반기를 들거나 체념하여 더욱 형식에 빠지거나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1980년의 희대의 역사적 사건이 발발했고 우리의 주인공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나친 통제와 강압, 그리고 정보의 강권적 제시 등이 당시 정권의 특성이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는 일방적 소통, 즉 원웨이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점에서 텔레비전의 성격을 꼭 닮았었다. 작가는 텔레비전이라는 일방적 소통형식의 대상에 도대체 이야기 좀 해보자는 식으로 실제 텔레비전에 오일 페인팅을 바르는가 하면, 텔레비전의 상을 사진으로 인화해서 의도적 여백을 만드는 등 사회비평적 예술의 전기를 마련한다. 당신들은 비어있다는 식으로. 당신들은 나의 예술을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이러한 시도는 작가의 두 가지 중요한 작품 시리즈의 원천이 되기에 일종의 모세포(mother cell)가 된다. 첫째, 작가는 텔레비전을 이용해서 사회를 비평했을 때 텔레비전에 어떠한 문자표기도 지워져 버린 '말풍선'을 그려 넣었던 적이 있다 당시 유행했던 텔레비전의 별명 '바보상자'에 대해서 극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던 표현법이었는데, 이 표현법을 종이나 캔버스 화면으로 확장시킨 작품이 바로「그대 무슨 말하고 있나?(What Are You Saying Now)」라는 회화 연작이다. 이때부터 아방가르드나 실험성이라는 서구 사조를 자기 것으로 내면화한다는 테제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진정한 계기가 마련된다. 특히 1984년 문예진흥원에서 선보인 삼면화(triptych)로 완성된 대작은 내용적 깊이와 형식적 완결성에서 독자적 경지를 구축한다. 불통의 억압된 사회분위기를 오히려 최고의 회화적 완성으로 승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작가는 스스로 회화의 승리가 진정으로 무엇인지 각성한 시기이기도 했다. 한편, 사회는 더욱더 계층간 지역간 세대간으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평, 혹은 비판, 아니면 저항이라든지 반기라는 감정과 태도는 도대체 긍정적 에너지가 아니고 오히려 분열을 가중시키는 감정의 촉매제라는 사실을 작가는 정확히 인지했던 것일까? 이듬해부터는 사랑과 치유라는 방법론을 들고나왔다 바로 '하트' 연작이 그것이다. 이 둘은 모두 사회비평적 이전 작품에서 발전된 형식임에 분명하다.
조지 오웰은 "행복은 오직 수용할 때 다가온다." 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것은 부정적 가치나 느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김용철 작가는 1984년 회화적 자신감을 확보한 이듬해로부터 무려 1991년까지 사랑과 수용, 자연에 대한 감사, 그리고 긍정하는 '예스(yes)'의 마음을 화면에 담아냈다. 그의 화면은 밝고 경쾌해졌다. 사랑이 넘쳐나고 자연의 속삭임이 말을 거는 것처럼 활기 넘쳤다. 그러나 작가가 그 밝은 긍정을 얻기 위해서 처절할 정도로 갈등하고 답답해했으며 외로워했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하트(Heart)」,「그대와 함께(With You)」라는 제목이 붙는 장구한 시기의 서사적 회화 연작은 굉장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그것은 평면성을 지향하는 추상과 외부세계를 재현하는 구체 회화(리얼리즘)의 미덕을 동시에 수용한 형식으로서 대상이 아니라 의미 자체를 구체적으로 재현해낸다. 사랑과 수용, 긍정과 화합이라는 국가와 세계에 대한 개인적 바램을 구체화시킨 것이다. 둘째, 작가는 나아가 1989년부터 이 연작에서 진일보한 가치를 발견하고 자각한다. 도대체 서구의 무분별한 도입만이 한국현대미술의 정체성과 가야 할 향방은 아닐 터인데, 모두들 그렇게 하고 있다. 일제 강압기의 인상주의 수용, 전후 혼란기의 서구 방법론의 수용, 그리고 다가올 미래에 또다시 벌어질 수용의 반복의 역사, 그것은 보지 않아도 명약관화한 사실이었다. 이래서는 도저히 고유한 정체성이 이 땅에 확립되지 않을 것이라는 자각이 선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와 과거의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가 무엇일까라는 고민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작가는 우리의 미의식을 찾기 시작했다. 이태준의 소설처럼 우리 일상의 것이면서도 고고하며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감정과 감각, 근원(近園) 김용준(金瑢俊)이 고구려 회화에서 찾았던 웅혼한 기상과 푸근한 사랑의 깊이를 작가도 찾기 시작했다.
여타 다른 작가들이 서구적 가치와 일본적 모노하의 가치에 경도되어 허우적거릴 때 작가는 스스로 서구의 세련된듯한, 선진적인 양하는, 그리고 첨단을 내세우는 시절풍조로부터 과감히 탈피해버린다. 나는 그 자신감이 유년기의 축복 받았던 선친으로부터의 사랑, 그리고 풍요의 강화도로부터 받은 인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추측한다. 시원적 기억은 늘 베일에 싸인 듯 하지만 아주 구체적으로 만나는 생생한 몽환임을 우리는 안다. 자식의 선친에 대한 완벽한 의지, 그 반대급부로 선친으로부터 자식으로 밀려드는 무한한 사랑의 쌍방향의 교류야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지상의 행복한 감정이다. 이 시기의 느낌을 회화로 되살린 것이 1993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면면히 이어져오는 한국적 회화의 정신이라 할 것이다. 2013년도 신작은 1966년부터 시작한 작가의 모든 체험과 기량이 더욱더 층층이 퇴적된 압권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깊은 감화와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본연적 사색이 완연하게 연결된 융합체라는 점에서 그렇다. ●『노자』73장의 마지막 문구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안겨준다. 그런데 그 말이 작가의 회화세계와 작가가 바라보는 이 세계와 너무도 닮아있다. "천망회회, 소이불실." 즉, 천지(天地)의 그물은 성긴 듯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거르지 않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불교의『화엄경』에도 "제망중중(帝網重重)"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제석천의 그물이 겹겹이 쳐져 있다"는 뜻이다. 세상은 옳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 상을 내리고 악행을 거듭하는 이에게 벌을 내린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오히려 천지의 모든 것은 인과관계의 법칙에 연결되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해석이 옳다. 작가는 신작에서 매화나무와 모란나무에 핀 하트를 표현한다. 층층나무로 놀러 오는 직박구리의 노래 소리는 진정으로 우리 인간에게도 연결되어있는 축복일 텐데, 그것을 우리만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시각적 사유가 무엇인지 깨우쳐야만 한다. 아주 긍정적인 세계의 맛, 그러나 그것은 하루 아침에 다가오지 않으며, 괴로움과 즐거움 이 어느 하나를 버리지 않고 수용할 수 있는 자에게 다가오는 맛이라는 사실을 작가의 화면은 이야기하는 것이다. ■ 이진명
Vol.20130419g | 김용철展 / KIMYONGCHUL / 金容哲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