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3_0418_목요일_06:00pm
후원 / 서울문화재단 주최 / KT&G 상상마당
관람시간 / 01:00pm~10:00pm
KT&G 상상마당 갤러리 I KT&G SANGSANGMADANG GALLERY I 서울 마포구 서교동 367-5번지 KT&G 상상마당 2층 Tel. +82.2.330.6223 www.sangsangmadang.com
간유리의 섬: 현실이 드러내는 아름다움 ● "그의 머리위로 위협적인 구절이 걸려 있었다. '네가 어떤 집에 사는지를 말하면 네가 누구인지 말해줄게', 이는 그가 예술 잡지에서 자주 읽은 문구이다. 이들 잡지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후에 그는 결국,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인격을 건축적으로 완성하고 싶어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Robert Musil, The Man without Qualities, New York: Capricorn Books, 1965, p. 16-17.) 1. 양면의 「섬」 ● 조혜진의 작품 「섬」은 첫눈에 그것이 무엇을 형상화한 것인지 말해준다. 그 조형물이 2000년대 들어 한국 대도시 풍경을 일종의 '유리 철옹성들의 스펙터클'로 변화시킨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와 똑 닮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외형에서 감지할 수 있는 첫인상이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은 물론, 대지면적에 비해 턱없이 높게 수직으로 쌓아올린 구조 및 입구도 출구도 없어 보이는 사각형 패턴의 닫힌 표면마저도 그러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유리와 철을 주재료로 사용해 구축했다는 점이 특히 둘 사이의 깊은 유사성을 가늠케 한다. 허나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의 구조 및 외관을 고스란히 모방한 조혜진의 작품은 현실의 그것만큼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이를테면 우리 주변의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가 대낮의 태양 아래서든 밤의 휘황한 인공조명 아래서든 눈이 부실 정도로 강한 빛을 반사하며 물질적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과는 달리, 조혜진의 조형물은 ―그 내부에 내장된 할로겐 또는 LED 조명등이 켜지지 않는 한― 묘하게 소박하고 어쩐지 정체를 안으로 숨기는 듯 해 보이는 것이다. 이 말은 결코 그 조형물이 예술적으로 잘 만들어지지 않았다거나, 기교가 정련되지 못했다거나, 미학적 취향 혹은 디자인이 애매모호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와는 달리 「섬」이 자본주의사회 소비자의 눈을 현혹하는 초고가 '건축-상품'과 그 외양은 매우 유사하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 작품에서 한 채에 몇 십억은 기본이고 몇 백억을 초과하는 그런 비현실적인 화폐 단위의 주택 상품이 내뿜는 현혹적이고 과시적인 분위기와는 상당히 다른 정서를 경험한다는 의미다. 왜 그럴까? 실제 아파트의 크기에 비하면 작품의 크기가 현격히 작고, 공예처럼 섬세하고 성실하게 손놀림한 예술가의 체취가 느껴져서 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작가가 선택한 재료와 표현 및 제작 기교가 의식적으로 소박하고 철 지난 것들에 맞춰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설명하자면 조혜진은 사람들이 녹슬고 흉해져서 내다버린 낡은 철제 대문들을 주워 다가 얇고 가는 철판으로 마름질 한 후 조형물의 외벽 골조를 만드는 데 쓴다. 또 어느 폐가의 나무 창틀에 붙어있던 간유리(반투명하고 꽃무늬 패턴이나 아라베스크 문양이 돋을새김 된 그 유리)를 수집해 와서는 작은 사각형들로 절단해 조형물의 각 입면을 채워 넣는다. 철판 자르기 등 몇몇 기계적인 공정을 제외하고, 작가는 조형물 「섬」을 만드는 데 필요한 일련의 과정을 거의 전적으로 수작업에 의존한다. 그런 재료의 특성, 그런 작업 메커니즘 때문에 얼핏 보면 최첨단 건축공학기술로 축성한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의 미니어처처럼 보이는 조혜진의 조형물이 소박한 풍모를 띠는 것이다. 또 '첨단의 외관'과 '철 지난 질료'가 결합한 데서 일말의 시대착오적 분위기를 느끼는 것이다. 심지어 작가는 작품에 「섬」이라는 제목을 붙임으로써 그 단어에서 부지불식간에 연상되는 문학적인 의미(이를테면 고독, 고립의 시적 표현으로서)와 감상적인 뉘앙스(이를테면 대중가요에서 소설 혹은 영화에 이르기까지 상투화된 감정으로서)를 작품 안으로 끌어들이기까지 했다. 이런 요소들 덕분에 「섬」은 신자유주의 시장자본제 사회인 우리 현실에서 어느새 부와 사회적 지위와 환금성의 대표 상징이 된 유리 철골 주택의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재현하면서도 그 재현 대상의 본성이라 할 상품성, 과시욕, 화려함, 위압감, 환등상(phantasmagoria), 속물성과는 꽤 거리가 있는 작품이 됐다. 그런 면모 대신 어딘가 내향적이고 위태위태하며 예민한 감각으로 감상자의 마음을 끄는 것이다. 조혜진의 「섬」이 언뜻 우리사회의 시사적 문제를 비판적으로 논평하는 작품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읽어서는 충분하지 않은 이유가 거기 있다. 요컨대 이 작가의 조형물은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분명히 하는 개념적 작품이기보다는, 혹은 그런 성격의 작품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물 또는 사태의 특별한 배경과 질감, 정서와 경험을 적절히 포착해낸 미적 표현물이다. 그것은 감상자로 하여금 우리 사회 천민 자본적 행태에 대해 타당하지만 피상적인 비판을 반복하는 데서 한걸음 깊이 들어가, 감상자 각자가 '집'에 얽힌 사적 기억과 내밀한 경험을 되새기도록 부추긴다. 나는 그 중요한 힘이 조혜진이 즐겨 사용하는 질료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간유리'는 작품의 물리적 효과 면에서만이 아니라 작품의 의미 해석에 있어서도 흥미로운 역할을 하는 것 같다.
2. 반투명한 '간유리' ● 아마도 1970년대 또는 80년대에 한국에서 유년기를 보낸 사람, 혹은 그 시절 이후 세대라고 해도 변두리 동네 허름한 주택가에서 산 사람이라면 서로 비슷하게 추억하거나 친밀감을 느끼는 사물이 몇 있을 것이다. 그 중에는 유기적인 선과 기하학 형태가 어우러진 패턴의 작은 유리창이 포함될 수 있다. 화장실이나 부엌문 위쪽에 끼워져 있던 약간 푸르거나 약간 회색조를 띤 반투명한 유리창 말이다. '간유리'라고 부르는 그 유리창은 아파트가 보편화되기 이전, 한옥과 양옥이 어중간하게 뒤섞인 기묘한 양식의 주택들이 집장사들의 손에서 양산되던 당시 우리의 집들에 반드시 들어갔던 건축 재료다. 비록 건축 인테리어가 끝없이 사치스러워지는 요즘의 취향으로 보면 한없이 촌스럽지만, 한때 그 간유리는 마구 바른 시멘트벽과 파란색 플라스틱 슬래브가 포위하고 있던 서민의 집에 거의 유일한 장식품 역할을 했다. 혹은 사치스러움과 예쁨을 향한 소시민적 소망을 아주 미약하게나마 충족시켜주는 드문 소재였다. 나는 내 미적 취향의 어딘가, 빛이 반쯤 투과되면서 사물의 형태를 흐릿하게 뭉그러뜨리는 그 간유리의 반투명한 아름다움이 반영돼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나와 같은 세대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품고 있는 면모일지 모른다고 추측한다. 해서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간유리'는 이제는 지나가버린 가까운 과거 한국사회 삶의 풍경을 담고 있는 기억의 거울이자, 소시민 계층의 생활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심리와 지각이 그것을 통해서 깨어날 수 있는 매체다. 조혜진의 「섬」이 21세기 초반 글로벌 자본주의 사회 한국의 초고가 주택 상품을 충실히 따라한 미니어처가 아니라, 그리고 그런 현실사회에 대한 상투적인 비판의 재현물을 넘어 복합적인 의미의 작품이 될 수 있는 주요 요인이 이 같은 배경에서 설명될 수 있다. 말하자면 그녀의 조형물은 간유리라는 특정한 소재를 통해 형성된 과거의 집합적 경험과 특정 계층의 기억을 지금 여기 최첨단 건축물에 얽힌 욕망의 기호 및 제스처와 충돌시킨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변증법적 지각에 이르도록 한다. 지나간 것과 현재적인 것, 낡음과 첨단, 잃어버린 옛 소망과 손에 잡히지 않는 현세적 욕망, 내밀한 취향과 노골적인 유행, 깊은 만족과 과시적 제스처가 종과 횡으로 엮이고 분기하는 변증법적 지각 말이다. 여기서 작가 조혜진이 유리창과 관련해 경험한 것, 그 경험에 대한 자기 해석에 주목하는 것이 좋겠다. 그 또한 하나의 구체성으로써 작품에 대한 감상자의 이해를 도울 뿐만 아니라 현실에 대한 작가의 내밀한 들여다보기를 우리에게 전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조혜진은 작업노트의 어느 대목에서 오랫동안 다세대주택에 살며 자신이 매일 봐왔던 간유리 창과 과외 아르바이트를 한 목동의 초고층 아파트에서 간간히 본 통유리 창을 대비시킨다. 그리고 그 두 창에 대한 경험을 근거로 "거주자의 경제력에 따라 사생활 보호에도 차이가 나고 조망권, 일조량 등 좋은 환경에 기준이 되는 요소들 역시 현저히 차이가 난다"는 점을 도출해낸다. 옳은 얘기다. 사실 다세대주택의 간유리 창은 다닥다닥 붙어살아야만 하는 사람들의 사생활을 반투명한 재질로 알량하게나마 보호하는 동시에, 가시성의 제한, 일조량의 제한, 외부에 취약한 상태로 노출됨이라는 구속력을 발휘하는 기제다. 반면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의 통유리 창은 무제한적인 시선의 자유와 넘치는 빛의 만끽과 외부로부터의 안전을 확보하는 손쉬운 장치이기 때문이다. 분명 다세대주택 거주자 조혜진은 이런 쓰라린 경험과 깨달음으로부터 조형물 「섬」을 구상해냈을 것이고, 거기에 맞게 맑고 투명하며 최첨단 재질의 강화유리가 아니라 흐릿하고 투박하며 약해빠진 간유리를 질료로 채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도 썼듯이 조혜진의 이런 작업 의도와 경험 해석은 정작 작품 「섬」이 가진 다양한 지각을 단순화한다. 오히려 우리는 작가의 다른 목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는데, 조혜진은 위에 인용한 말을 쓴 작업노트 어딘가에 다음과 같은 과거를 회상해두었다. "어릴 때는 이웃집 안이 보이는 것이 싫지 않았지만 중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이웃과 가까이 있어 이웃의 소음이 들리는 것, 창문을 열면 서로 마주하는 것이 불편했다." 창을 모티브로 이웃과의 관계, 자기 성장의 단계, 자기 취향의 변화를 서술하는 작가의 접근법이 흥미롭지 않은가? 그것은 단지 부와 빈의 갈등을 주거 형태로 폭로하거나, 자본의 크기가 결정하는 삶의 방식에 대해 비판하는 것보다 더 세밀하고 진솔한 이야기다. 추측컨대 바로 이렇게 '간유리'의 속성에서 연원한 자기 이야기를 기초로 조혜진은 부지불식간에 「섬」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 실물의 가시적 모방을 넘어 이야기의 결들이 살아있고,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은 경험의 밀도가 충만한 조형물로 말이다.
3. 실제의 드러남 ●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머릿속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유형, 그러니까 우리가 상상으로 눈앞에 떠올리는 어떤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그와는 반대로 우리가 상상해볼 수 없는 어떤 새로운 유형, 그러니까 실제(réalité)가 직접 우리에게 드러내는 어떤 것이다."(Marcel Proust, Contre Sainte-Beuve, 『생트-뵈브』, p. 87을 Roland Barthes, Journel de deuil, 김진영 역, 『애도일기』, 서울: 이순, 2012, p. 193에서 재인용.) 엄밀히 말해 이제까지 우리가 논한 조혜진의 조형물 「섬」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 아니라,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제작한 다른 조각들과 함께 전시장의 여러 조건과 상황에 맞춰 조성하는 설치작품의 일부다. 작가는 그 설치작품을 총칭해 「섬」이라 명명했다. 그리고 실제 전시가 이뤄질 KT&G 상상마당 갤러리에서는 작품의 전체적인 배치를 대도시 내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 단지와 비슷하게 구성할 것이다. 이를테면 세 개의 조각 「섬」이 마치 아파트 세 개 동처럼 군락을 이루고, 그 앞에는 아치 형태의 문이 여느 아파트 단지 정문처럼 세워질 것이다. 여기에 더해 작가는 앞선 주상복합아파트 형태의 조형물과 비슷하지만 좀 더 외관을 단순화시킨 "기념비"(말하자면 자본주의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를 기념하는 碑)를 만들어 전시장 밖 통로에 설치하려 한다. 마지막으로 작가는 이 조형물들이 들어서는 바닥(특수 제작한 수조의 바닥 또는 주워온 나무 창틀을 이어 붙여 만든 틀의 바닥)에 검은색 물을 채워 수면 위로 그 유사 건축물 조각의 이미지가 반영됨은 물론 작품을 보는 감상자의 모습 또한 비춰지게 할 계획이다. 조혜진은 이렇게 비춰지는 수면의 반영 상(像)을 실험을 통해 관찰한 결과, 바닥의 검은 물은 그냥 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뻥 뚫린 공간처럼 착시효과를 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 물에 비친 조형물은 "비현실적인 다른 곳"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작가는 감상자가 검은 물에 비친 조형물 이미지를 보며, 또한 감상자 자신이 물에 환영처럼 비춰지는 모습을 보며 "모두가 바라는 더 나은 삶이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 같다"는 깨달음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란다. 여기서 작가가 말하는 "더 나은 삶"이란 물질적 기준에서 더 나은 삶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해서 그녀는 서울 강남의 '타워팰리스'처럼 고도 자본주의 욕망의 상징인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가, 그렇게 물질적으로 부유하고 화려한 삶에 대한 희망이, "신기루"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감상자가 자신의 작품에서 발견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아파트 이름에 '타워'니 '궁'이니 '팔레스'니 하는 허구적이고 허황된 수사를 덧씌우고, 그 아파트 앞에 21세기 한국의 상황에서는 뜬금없기 이를 데 없는 고대 그리스나 로마시대 신전 또는 성문을 모방한 대형 출입문을 설치해서 집으로 돈과 명예와 지위를 차별적으로 과시하고자 하는(그리고 그런 행태를 선망하는) 우리 현실을 뒤집어 본다면 작가의 그런 기대는 그리 과한 요구가 아니다. 하지만 모든 작품은 작가의 바람 혹은 의도에 따라 감상되지 않는다. 그에 더해 가령 우리가 '좋은 작품'을 말할 때, 그 작품의 '좋은' 속성은 작가의 의도가 명확하고 직접적으로 실현돼서가 아니라 풍부한 의미와 경험을 새롭고 지속적으로 발생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어서다. 이는 조혜진의 「섬」에도 해당되는 점이다. 이 작품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 ―그러니까 집에 대한 천민자본주의식 욕망과 취향, 자본의 허구성, 빈곤의 양극화와 절망 따위를 꼬집어 비판하는 말― 을 반복하는 점에 작품의 가치나 매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섬」은 그렇게 단순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비판의 말에 매이지 않고 불특정하지만 복합적인 의미들을 촉발할 때 좋은 작품이다. 그 점에서 우리는 「섬」의 미학적 의미가 간유리의 속성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단적으로 말해 '반투명한 것'이다. 한편으로 실재를 비추고 다른 한편으로 환영처럼 보이는 것. 한편으로 저편을 드러내고 다른 한편으로 이편을 감추는 것. 우리가 애써서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아도 우리의 용모 및 됨됨이가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 드러난 것들을 기반으로 저 사람은 이렇고, 이 사람은 저렇고 하는 식의 평가가 이뤄진다. 또한 그래서 이러저러한 점 때문에 가까이/멀리 하고 싶다는 타인과의 관계 맺기가 가능해지고, 이러저러한 점이 좋다/멋지다/아름답다/밉다/후지다/추하다는 타인의 해석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사물도 마찬가지다. 사물도 굳이 그 자체를 과시하지 않아도 스스로 드러나는 것들이 있고, 그 드러난 무엇들이 바탕 또는 원인이 되어 사람들은 그 사물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관계를 맺고, 갖가지 해석을 가한다. 다른 한편, 제 아무리 사람이나 사물이 스스로를 드러낸다고 해도 그 드러남을 타자가 지각하지 못한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평가도, 관계도, 해석도 없다는 말이다. 저쪽에서 뭔가가 가시성의 빛과 지각의 스펙트럼 안에서 드러나고 그것을 이쪽이 수용할 때 평가도 이뤄지고, 관계도 생기도, 해석도 튀어나온다. 그 점에서 관찰력이 좋고 감각이 뛰어난 예술가는 유리하다. 모든 예술가가 아니라 유독 대상에 대한 관심이 크고, 관찰에 지치지 않으며, 섬세하고 예민한 지각능력으로 세상을 보는 예술가가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 이들은 사람들이 평범하고 진부하다고 떠들어대는 현실로부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알 수 없었고, 볼 수 없었던 미를 포착해낸다. 위에 인용한 문장을 쓴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가 아름다움을 우리 머릿속의 상상적인 것 또는 추상적인 것 대신 실제가 드러내는 것이라고 정의한 맥락도 이로부터 해석해낼 수 있다. 즉 아름다움이란 닫힌 관념이 아니라 실제로부터 발현되고 그 발현된 것들이 구체적인 형과 색과 질감을 얻어 또 다른 실제가 되는 열린 관계의 현실인 것이다. 나는 조혜진이 그런 아름다움을 만들 수 있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이 작가가 젊고 아직까지 제시한 작품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조혜진이라는 작가 전체가 아니라 그녀의 최근 작업 「섬」이 그런 면모를 보여준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조혜진의 「섬」을 보며 어떤 대상들, 어떤 단어들, 어떤 현실의 풍경을 파편적이며 무작위로 연상해낼 수 있다. 그 연상의 내용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우리 감상자 각자는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의 세속적 현실에 저당잡힌 인격이 아니라, 집을 사회적 자본이자 사회적 인격체로 당연시하는 우리 현실에서 비판적 거리를 두고 자신의 인격을 쌓아 올려가는 진행형의 인간이 될 수 있다. 서두에 인용해둔 로버트 무질(Robert Musil)의 소설 『특성 없는 인간』에서 '그(울리히)'처럼 말이다. ■ 강수미
Vol.20130418h | 조혜진展 / CHOHYEJIN / 趙彗眞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