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전 손재형展 / SOHNJAIHYUNG / 素筌 孫在馨 / calligraphy   2013_0418 ▶ 2013_0616 / 월요일 휴관

소전 손재형_승설암도(勝雪盦圖)_23×35cm_1945

초대일시 / 2013_0417_수요일_04:00pm

주최,기획 / 성북구립미술관_성북문화재단

관람료 / 성인_2,000원 / 중·고등학생_1,000원 / 초등생 이하 무료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입장은 관람 종료 30분까지 / 월요일 휴관

성북구립미술관 SEONGBUK MUSEUM OF ART 서울 성북구 성북동 246번지(성북로 134) Tel. +82.2.6925.5011 sma.sbculture.or.kr

20C 문예부흥의 선도자, 손재형-소전의 생애와 서예술세계1. 프롤로그-추사와 소전 소전 손재형은 추사이래 한국서예의 제1인자로 기억되고 있다. 추사가 19세기 근대서화계를 대표한 예술가였다면 소전은 20세기 현대서화계를 대표하는 예술가였다. 두 거장 모두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들처럼 다재다능의 전방위적인 예술가이면서 한, 중, 일 문화예술계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 국제적이고 독보적인 예술가이다. 그리고 그들의 빛나는 예술의 형성과 성공 뒤에는 제주도와 진도라는 남도 섬의 유배문화와 관련이 없지 않다. 비록 시대배경은 달랐지만 소전은 유년기에 추사는 장년기에 체득한 독특한 절해고도의 유배지문화와 생활환경이 그들의 예술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공통점이었으며, 결과적으로 당대 많은 예술가들과의 차별성을 갖게 한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고 본다. 제주도에서 탄생한 추사의 「세한도(歲寒圖)」가 진도출신 소전에 의하여 섬나라 일본으로부터 찾아 오게 되고, 국가의 보물(국보180호)로 지정되어 오늘날 우리가 직접 보고 감상할 수 있는 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두 예술가의 남다른 생애의 인연이 아닐 수 없다고 본다. 후학으로서 소전에게 있어 추사는 계승해야 할 위대한 스승이자 넘어야 할 거대한 산이었음을 전 예술생애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실제로 소전은 추사를 통해 예술가로서 창조적 전통의 계승뿐만 아니라, 이 나라 문예부흥운동에 앞장선 선도자로서 그 역할을 다한 탁월한 예술행정가로서 기록되기에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추사에 비해 소전에 대한 연구와 평가는 크게 미진한 상태이지만 앞으로 많은 성과물이 지속적으로 나오리라 믿고 또 기대한다.

소전 손재형_청풍고절(淸風高節)_47×33cm_1950

2. 소전의 예술생애와 그 시대구분 ● 손재형은 1903년 음력 4월 28일 진도군 진도읍 교동리에서 옥전 손병익(玉田 孫秉翼)의 손자이자 영환(寧煥)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아명은 판돌(判乭)이고 자는 명보(明甫)이며, 1923년 21세 되던 해에 이름을 재형(在馨)으로 개명했다. 호는 초기에 할아버지가 지어준 소전(小田)으로 쓰다가, 성년이 되어서부터는 주로 소전(素荃)으로 썼으며(이 밖에도 같은 음의 紹田 혹은 篠顚과 篠田 등으로 병용해 쓰기도 했다), 만년에는 전도인(荃道人), 전옹(荃翁), 옥정도인(玉井道人) 등을 사용하였다. 당호로는 조부의 호를 기념한 옥전장(玉田莊)을 비롯하여, 추사를 존경하고 숭앙한 나머지 존추사실(尊秋史室), 숭완재(崇阮齋), 숭완소전실(崇阮紹田室), 연단자추지실(燕檀紫秋之室) 등을 지어 썼으며, 방한정(放鷳亭), 문서루(聞犀樓), 봉래제일선관(蓬萊第一仙館), 청계산초부(淸溪山樵夫) 등을 썼다. 이 밖에도 추사가 그랬던 것처럼 수시로 취향에 따라 자호(自號)하거나 당호를 자유롭게 지어 썼다. ● 필자는 10년 전 소전의 삶과 예술에 대해 이해를 돕기 위해 편의상 4단계의 시대구분을 한 적이 있다(소전미술관 발행 도록 게재글, 2003). 제1단계는 18세에 서울의 양정의숙(양정고등학교 전신)을 입학하기 전까지의 진도시절의 서예 입문기, 제2단계는 양정의숙으로부터 외국어학원 독문과 수업, 갑골학과 금석학의 대가 나진옥(羅振玉)을 사사한 중국유학과 선전(鮮展, 조선미술전람회)을 거쳐 중진작가로 입신한 1945년 해방이전까지의 성장기, 제3단계는 해방공간에서 조선서화동연회를 조직하고 초대회장이 된 이후 '서예'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현대서예운동과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1956년 진도의 「이충무공벽파진적첩비」 휘호까지의 자가일성의 성숙기, 제4단계는 50년대 후반부터 왕성한 작가활동과 수장가, 예술행정가, 정치가 등으로 활약한 70년대 중반, 그리고 와병으로 절필한 이후 30회로 국전이 막을 내린 1981년 서세(逝世)까지의 만년기가 그것이다. 마지막 조선왕조시대에 태어나서 외침에 의한 암흑의 식민시대, 이념의 갈등과 6. 25라는 동족상잔의 분단시대, 4. 19와 5. 16혁명의 정치적 소용돌이를 거쳐오면서 그는 오로지 예술계 전반에 걸쳐 새로운 문예부흥에, 특히 한국미술과 서예발전에 크나큰 공헌과 업적을 남겼다. ● 첫 번째, 입문기(入門期)는 5세부터 조부 옥전 손병익 슬하에서 직접 한학과 글씨의 기본을 익힌 가학(家學)의 유년기와 12세부터 16세까지 진도보통학교시절 습자공부의 소년기에 해당한다. 특히 그의 유년기에는 옥전의 영향뿐만 아니라 그의 집 사랑채 뒤에 방을 얻어 서당을 꾸렸던 한양서 귀양 온 무정 정만조(茂亭 鄭萬朝, 1858-1935)로부터 시서를 배운 교학의 영향이 컸으리라는 점이다. 무정은 고종 2년에 문과에 급제, 예조참의 승지와 부제학을 지낸 바 있는 서예에 일가를 이룬 사람이었다. 무정은 뒷날 경성제국대학 강사와 성균관대학의 전신인 명륜학원의 총재를 지낸 바 있는 개화된 지식인이었으니 소전의 유년기 한문과 서예공부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그의 소년기 서사학습에 영향을 준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적거지(謫居地) 진도의 지리적 배경과 문화환경이다. 이 고장은 동국진체(東國眞體)의 발산지로, 창시자 옥동(玉洞)과 해남출신 공재(恭齋), 그리고 완도 신지도에 유배되어 생을 마친 원교(圓嶠)등에 의해 서맥을 이어온 곳이기 때문이다. 소전의 전후 두 스승인 무정 정만조와 성당 김돈희(惺堂 金敦熙, 1872-1936) 역시 원교 이광사의 동국진체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서가였으므로 동국진체와 유배문화를 통해 그 영향을 추리적으로 짐작할 수 있게 한다. ● 두 번째, 성장기(成長期)는 소전으로서는 진도에서 서울 양정의숙 진학과 동시에 시작된다. 양정의숙의 교장이자 조선서화가협회 회장을 지낸 바 있는 서예가 석정 안종원(石汀 安鍾元)의 소개로 소전은 성당 김돈희가 주재하고 있던 상서회(尙書會)에 입문하게 된다. 성당은 안진경으로 시작해서 황산곡을 거쳐 만년에는 성당체라는 독특한 예서풍의 자기 서체를 성취한 대가였다. 소전은 당시 유일한 등용문이었던 선전 제3회(1924)부터 제8회까지 5년을 연속 입선하였으며, 제9회와 제10회에서는 특선을 하였다. 그리고 1930년 제10회 조선서화협회전에 출품하여 수석상을 수상하면서 명실공히 하나의 서예가로 서단에 입신하게 된다. 이처럼 성당을 사사하게 된 이후로부터 소전은 장래가 촉망되는 서예가로 승승장구 성장하였다. 1932년부터는 선전에서 서가 분리되어 조선서도전으로 재출발하게 되면서, 소전은 제1회 때 특선으로 공모전을 졸업하고 31세에 이미 기성작가로 제2회 서도전의 심사위원이 된다. 아울러 조선서화협회전에도 이사로 영입되어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 그는 이 무렵 중국 심양에 있던 금석학과 갑골문 연구의 대가 나진옥을 찾아가 사사하면서, 2년 후 1938년에는 서화연구차 북경을 방문하여 나진옥의 소개로 여러 금석학자들과 만나고 제백석(齊白石)과 같은 당대 서화대가들과도 교류를 넓힌다. 한 세기 전 20대 추사가 연경을 찾아 석학들과 교류하였던 것처럼, 30대 초반의 소전도 그 시기 새로운 외국문물과 대륙의 신조류에 관심을 크게 기울였던 것 같다. 당시에 수집한 명가의 고서화와 서책, 백석 등 대가들로부터 직접 받은 전각작품 등이 이를 증명해 준다. ● 이 시기 소전의 해외관련 활약 가운데 무엇보다 중요한 업적은 2차 대전 말기 일본으로부터 추사의 대표작 「세한도)」를 찾아온 일대 사건이다. 1944년 전쟁이 한창일 때 단신으로 현해탄을 건너가, 당시 추사연구자였던 후지츠카(藤塚隣)박사가 경성제대(서울대의 전신) 교수로 있을 때 「세한도」를 구해가지고 간 것을 추적하여, 폭격을 무릅쓰고 한 달여 동안 설득 끝에 큰 값을 치르고 찾아온 것이다. 돌아올 때 폭격으로 관부연락선의 배 자체가 없어져 고생고생 귀국하였다는 자세한 얘기는 아직도 아는 사람이 적다. 지금은 너무나 유명한 미담으로 남았지만, 목숨 걸고 찾아올 만큼의 소전의 높은 안목과 그 용기에 오세창, 이시영, 정인보 등 당시 많은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세한도」의 발문은 더욱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평생 추사 김정희에 대한 존경하는 마음의 발로였으며 위험을 무릅쓴 그 실천력은 소전만이 가능한 존추사실주인(尊秋史室主人)다운 행동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서화골동에 대한 감식뿐만 아니라 정원설계의 전문가로도 유명했다. 미술기자 이규일의 증언에 의하면 "소전은 양정에 다닐 때부터 서화골동에 손댄 대 수장가였다. 서화골동 감식에도 안목이 높았다. 그가 광화문 비각 앞에 나타나면 물건을 팔겠다는 사람이 줄을 이어 늘어설 정도로 유명했다. 그리고 인촌 김성수댁 정원을 꾸밀 만큼 한국식 정원 조성에 전문성을 인정받은 사람이다"고 했다. 실제로 뒷날(1958년) 효자동에서 홍지동으로 이거 하면서 10여 년에 걸쳐 완공한 옥전장, 문서루, 석파정(石坡亭, 흥선대원군의 별장을 옮긴 것으로 서울시 무형문화제 제23호) 등 건축물과 정원은 당대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세 번째, 8. 15해방부터 1956년까지 10여 년간의 성숙기(成熟期)와 네 번째, 60-70년대의 만년기(晩年期)는 그의 본격적인 예술세계에 대한 논의와 중복되므로 다음 3장과 4장에서 계속해 논하려 한다.)

소전 손재형_난화(蘭花)_23×68.5cm_1952
소전 손재형_공검지기(恭儉持己)_31×118cm_1954

3. 해방공간의 서예운동과 소전의 역할 ● 진정한 의미의 서(書)란 무엇이며, 서예(書藝)는 어떤 예술인가? '지금 여기'의 우리시대 서예는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어떤 예술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때이다. 아울러 한국서예 속에 한글서예의 위상과 발전방향 등에 대해서도 같은 문맥에서 재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장차 다가올 통일조국을 위한 민족서예에 대한 논의도 더 이상 미루어둘 문제가 아니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러한 중요한 문제들이 왜 소전 손재형과 더불어 재검토 되어야 하고 또 연구되지 않으면 안 되는지에 대해서 독자들을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점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자면, 우선 '서예(書藝)'라는 명칭과 관련된다. 그리고 '서예'란 명칭은 해방공간의 소전으로부터 주창되고 고유명사로 수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먼저 '서예란 무엇인가'에 답하기 위해서는 한국서예가 중국의 서법과 일본의 서도와는 어떻게 차별화 되는지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듯하다. 그것은 소전이 '서예'라는 명칭을 주창한 해방공간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새로운 서예운동을 전개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으며, 서예는 서예성 혹은 서예정신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소전의 제자 원곡(原谷 金基昇)은 「한국서예사」에서 '서예' 명칭의 탄생과 그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서예를 중국에서는 서법 또는 서사, 일본에서는 서도, 한국에서는 서예라 칭하게 되었다. 해방 후에 서예로 부르게 된 원인는 '육예(六藝, 禮樂射御書數)'에서 서(書)자와 예(藝)자를 취한데 있다. 소전이 '서도'대신에 '서예'로 한 것은 우선 일정 때의 불쾌한 기억을 씻어 보자는 뜻도 있지만 차원을 달리하여 서를 일종의 수양정심의 도(道)로 보는 일면에 치우친 감이 강하고 본질적인 예술성이 무시된 감도 없지 않다. 그러나 서예라고 하면 동양적 서화관에서 서가 곧 화요 화가 곧 서(書卽畵, 畵卽書)라는 전통적인 의미와 함께 현대의 예술성을 띠고 새로운 서예운동에 적극 참여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런 소전의 새로운 발상과 주장에 대하여 전 서예인이 찬동하여 통용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 여기에서 우리는 현대의 서예사적 단서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서예라는 용어의 어원적 출처에 대한 의미이다. 둘째, 일제 암흑기에 겪었던 식민서도에 대한 부정적 감정의 척결이다. 셋째, 서는 어디까지나 예술로서의 승화에 있지 수양정심이라는 도의 수단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자각이다. 넷째, '서예'라고 했을 때 동양고유의 전통적 시, 서, 화 일치 사상의 문인화와 더불어 필묵예술로서의 새로운 현대예술이 가능하다는 전망 등이다. 시대조류의 변화를 읽은 소전의 선각자적 예지와 '현대의 예술성'과 '새로운 서예운동'으로서의 비전에 대한 확신은 시대적 요청이 아닐 수 없다. 근대서예와 현대서예의 사적 시대구분을 한일합방의 1910년으로 보는 원곡의 견해(1977년 발간 소전 손재형서화집 133쪽 「소전 손재형의 서예술」)와는 달리, 필자는 "20세기 한국현대서예의 출발은 1945년 해방공간의 소전으로부터 시작된다." (월간미술 1999년 4월호 「21세기 한국미술의 새로운 패러다임」)고 했다. 이러한 견해도 서예사적 사건이자 새로운 개념의 '서예' 명칭 탄생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예평론가 석도륜(昔度輪)이 지적한 것처럼 소전의 독창적 예술관과 실천의지는 실로 '탁견'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소전손재형」 작품집의 '소전손재형서예연구서설'에서 "서(書)의 부문에 있어서 '서예'라고 제목을 처음 붙인 것이 소옹(素翁)이라고 들었는데, 이것은 탁견이다. 동시에 그의 서관(書觀)을 상징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는 표제인 것이다. '서법'이란 이론적인 의미가 짙다. 과거시대나 붓글씨의 생활화가 그대로인 나라에서나 있음직한 표현이다. '서도'라고 하는 것은 고몽기에 많이 듣던 어구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어쩐지 신도(神道)적 윤리관이 두드러진다. 그보다는 규범학적인 '불완전'성을 서의 진수로 삼아 보겠다고 하였다면 그것은 탁견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 평자가 말한 '규범학적인 불완전성'이란 것도 결국 예술에서의 자유정신이자 서법의 법으로부터의 일탈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힌다. 입법(入法)에서 출법(出法)이야말로 '서의 진수'에 이르는 첩경이자 현대미술이 추구하는 비정형적 조형이념 의 방향과도 일치한다고 할 것이다. ● 필자는 "서예란 서(書)의 예(藝) 그 자체일 뿐, 결코 피상적 법(法)도 도(道)도 아니라는 명확한 심각성(心覺性)에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예술에 있어 법과 도는 수단적 방법과 이상적 목적은 될 수 있어도 유여예(遊於藝)정신의 예술자체는 될 수 없다는 판단이다. 즉 「중용(中庸)」의 '과불급(過不及)'사상에 비춰볼 때, 일본서도의 도는 서예의 예에 있어선 과(지나침)요, 중국서법의 법 역시 서예의 예에는 불급(못미침)일 따름이다. 이것은 동양3국에 있어 서예술의 우수성이자 21세기를 향한 세계성 확보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21세기는 문화경쟁의 시대로 세계화를 위한 차별화는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조류이다. 서법은 중국에 있어 고유의 명칭이지만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하나의 수단, 즉 글씨를 '쓰는 방법'으로서의 보통명사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고유명사의 '서법'과 보통명사의 서법은 구분해서 쓸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우리나라에서는 서예가 아닌 '서법은 예술이 아니다'(필자는 1998년 같은 제목의 작품을 제작 발표한 바 있다)라는 명제가 성립될 수 있다. 일본의 일본의 '서도' 역시 반세기 전에 소전이 극복하려 했던 것처럼, 그것은 21세기 한국서예의 입장에서 보면 전근대적이고 낙후된 명칭일 따름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일제잔재의 식민 서도(書道)와 중국 편향의 사대 서법(書法)이 횡행하고 있는 우리 서단을 만약 소전이 본다면 무어라 말할 것인지, 심히 우려된다. 해방 후 분단 60년이 넘도록 북한에서도 '서예'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필자는 2012년 평양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만난 서예가들과 서예관련 책자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 서단은 이직도 시대의 조류를 역행하고 있는 한심한 부류가 없지 않다. 북한의 서예관은 미래 통일조국의 공통 목표인 한민족 서예발전을 위해서도 긴요한 바가 적지 않다. 한국서예의 정체성은 '씀의 예술'(필자는 서예를 '씀의 예술'로 정의한 바 있다. 쓰지 않고서는 서가 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씀이 서예의 제1의적 조건이다)로서의 '서예성(書藝性, 서예의 네 가지 특성)'과 새로운 개념의 필묵정신에서 찾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소전은 20세기 한국현대서예사의 출발은 물론 한국적 서예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21세기 필묵예술의 부흥과 세계화에 지대한 업적을 남긴 위대한 서예가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소전 손재형_해내존지기 천애약비린 (海內存知己 天崖若比隣)_64×192cm_1955

4. 소전체의 확립과 한국예술의 부흥 ● 소전은 추사처럼 서예와 문인화에 일가를 이룬 20세기 한국서화계의 종장이다. 한국서예사에 한 획을 그은 그는 '추사 이후 제일인자' 소리를 들을 만큼 미술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소전은 한국예술과 현대서예의 초석을 놓았을 뿐만 아니라 각 서체를 두루 섭렵하여 독특한 개성의 자가(自家) 서풍을 성취했다. 특히 한글서예에 있어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이후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장본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소전체의 특징은 전예풍의 필획과 현대적 조형언어로 국/한문을 막론하고 하나의 법에서 나와 천변만화의 조화를 창출한 데 있다. 소전서예와 문인화는 넉넉한 필획과 절도 있는 운필에서 '외강위덕(外剛爲德)'의 후덕과 '내유위자(內柔爲慈)'의 기품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인품과 서품 그리고 화품이 일치하고야 넉넉히 일세를 풍미한 예술가일 수 있었으며, 만인의 사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국한혼용의 소전체는 공전절후(空前絶後)의 경지를 개척했으며, 현대서예의 새로운 가능성의 지평을 열어 보였다. 다음은 위에서 언급한 그의 예술생애에서 성숙기와 만년기에 해당하는 후반기 소전예술의 성취와 예술업적에 대해 다음 세가지 분야로 나누어 살펴보려 한다. (1) 5체에 두루 통한 자가일성의 소전서체 ●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소전은 어릴 때부터 학서(學書)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가학의 소년기와 양정의숙의 청년기를 거치면서 대가들을 스승으로 입문해 철저한 기초를 다진 다음 등용문을 거쳐 정식 서단에 진출하였다. 그는 전, 예, 초, 행, 해 등 5체 모두 능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그의 5체 10곡 병풍작품들에서 각 서체의 공통점과 필획의 특징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청년시절 나진옥의 가르침을 통한 갑골문 연구(추사시대는 갑골문을 보지 못했다)와 더불어 한동안 문자학에 대한 관심으로 「설문자해」와 전서체 공부에 몰두한 바 있으며, 그는 특히 젊었을 때부터 예서공부에 많은 공력을 들인 것 같다. 학서 과정에 있어 간접적으로나마 소전에게 추사체의 영향은 예서체가 가장 크다. 추사가 당예(唐隸)에서 한예(漢隸) 로 거슬러 올라가 각기 장점을 취합하여 독자적인 추사체를 이루었듯, 소전 역시 추사의 길을 따라 고예(古隸)의 연구는 물론 스승인 성당 예서체의 장점을 취하여 독자적인 소전서체를 완성시켜 나갔다. 청년 소전은 이미 작품제작에 있어 단순히 글씨를 유려하게 잘 쓴다는 전통적인 서사영역을 넘어 자기만의 조형어법을 찾아 개성 있는 창의력으로 예술성을 발휘하고 있다. 차츰 전예의 필법으로 자가풍의 행서와 초서를 이루어 1930년대에 이미 독특한 소전체를 이루었다. 역대 명품들을 섭렵한 나머지 이미 초서의 기본적인 특성을 유감없이 표현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게 한다. 뒷날 국전시대를 통해 제자들의 스승서체의 답습과 범서단전 소전체의 풍미로 인한 '소전형상'은 평자에 따라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겠으나 추사체가 그러했듯 소전풍의 예술(한글, 한문서예, 문인화 등) 역시 유행성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창조적 이상과 높은 안목의 정신경계에 이른 소전예술에 대한 추종이며, 역설적으로 한국 예술사상 빛나는 하나의 금자탑으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2) 한글서예의 신기원을 창출하다 ● 우리말과 글을 잃어버렸던 일제 암흑기의 억압을 거쳐 해방과 동시에 한글과 국한문 혼용의 표기가 현실생활과 직결되고 보편화 되면서 우리 문자를 아름답게 표현하려는 욕구가 커지게 되었다. 특히 해방1세대 서예가들에 의해 새로운 기운의 자각과 실천이 따르게 마련이었으며, 그 선두에 선 한글서예운동의 리더가 곧 소전이다. 한문서와 마찬가지로 소전 한글서체 창작은 '국문서예(당시용어)'의 개척으로 한국서예사에 기록될 획기적인 업적에 속한다. 한편에서는 궁중의 편지나 필사본 글씨로 쓰이던 궁체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으나 그때까지만 해도 명실공히 서예(씀의 예술)로서의 예술화에는 아직 미흡한 초보단계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한글고체의 다양한 판본연구의 시작도 소전의 한글사랑과 '국문전서'체에 자극 받은 바 크다(일중 김충현이 고체연구로 한글을 예서화한 작업의 시도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의 제자들 역시 각기 새로운 시도를 거듭한 나머지 자기만의 개성 있는 한글서체를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소전의 적극적인 지도와 영향으로 말미암은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들 소전그룹들의 한글서체들은 오늘날 컴퓨터 서체와 디지인 서체로 널리 통용되고 있으며, 한글서예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 소전한글의 대표작은 그의 고향 진도 벽파진(壁波津)에 세워져 있는 「이충무공벽파진전첩비」(1956년 작, 노산 이은상 짓고 소전 손재형 씀)이다. 역시 소전의 제자인 동강 조수호는 다음과 같이 평가한 바 있다. "이 전첩비는 소전선생 필생의 회심작으로 독자적인 양식과 새로운 법도를 개척한 일대 걸작이다. 일견 필획들이 유창하게 이어져 기상이 시원스럽고, 충무공의 애국정신을 선양하려는 서예가의 고귀한 감정의 정서가 이리저리 번득이고 구비치는 생동감이 여실하다. 특히 포국과 장법을 중시하고 자형에 변화를 주어 전통체계의 패턴에서 완전히 벗어난 독창의 화경(化境)이다.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전예와 국한의 조화체(調和體)로써 새로운 미적 조형의 시범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국한, 전예 작품의 예술미를 유감없이 표현한 희세의 걸작이다. 이 작품은 후세 영원토록 국한 서체양식의 전범(典範)으로 높이 평가될 것이다."고 했다. 필자는 1973년 가을 선생의 생가를 거쳐 벽파진에 이르러 이 거비(巨碑)를 대하고 애국심의 충정에 놀라고 비문을 읽어 내려가면서 웅혼한 독창적 예술미에 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의 감동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과 뇌리에 생생하다. 그리고 20년 뒤 중국유학시절에 집안의 저 고구려 「광개토대왕비」(414년 세움)를 대하고 그 때 벽파진에서의 감동이 되살아났다. 1600년 전, 머나먼 시공간의 거리를 두고 한민족역사에 위대한 두 영웅에 대한 불후의 걸작(두 금석예술)이 남북으로 쌍벽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고 가슴 두근거리던 전율을 필자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 광개토대왕비와 충무공전첩비는 고전과 현대라는 시대적 예술양식을 넘어 가장 우리답고 독창적인 민족서예를 대표하는 금석보물 중에 보물로 세계예술사에 길이 빛날 것이 틀림없다. 대첩비의 예술성과 서예사적 가치의 중요성에 대한 평가는 아직 때를 더 기다려야 할 듯하다. 생시에 선생 스스로도 이 대첩비에 대해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창제하였으나 훈민정음의 변화와 정음예술의 기원은 이 소전예술에서 비롯되었다고 역사는 말할 것이다."라고 자부할 만큼 소전은 이 작품을 최고의 득의작이자 필생의 대표작으로 생각하였던 것임에 틀림없다. (3) 격조 높은 문인화와 전각예술 ● 소전은 국/한문서예뿐만 아니라 전각, 사군자, 산수화까지 자유자재의 경지에 이른 당대 걸출한 대가였다. 먼저 소전이 직접 전각을 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는 젊은 시절 스스로 공부한 것을 들고 북경의 제백석(齊白石)을 직접 찾아간 적이 있으며, 그의 자용인(自用印) 가운데는 제백석이 새겨준 것은 물론 스스로 새긴 것이 여러 방 들어 있다. 그의 문인화 작품은 서예작품 못지 않게 많은 양이 전하고 있어 연대별, 소재별 다양한 형식과 풍격을 말해준다. 소나무, 연(蓮), 모란, 포도, 수석과 사군자류의 문인화는 물론 산수문인화에 이르기까지 그의 화풍은 한껏 멋스럽고 다양하다. 특히 소전의 묵란은 존추사실 주인답지 않게 추사란(秋史蘭)을 멀리하고 천심죽재(千尋竹齋, 閔泳翊)의 운미란(芸楣蘭)을 높이 평가하고 그의 필의를 따르며 애호했음이 특이하다. 추사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아니라 선택적 존숭과 학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956년 작의 「강산여화도(江山如畵圖)」는 추사의 「세한도」의 느낌을 방불케 하며, 만년기에 해당하는 산수화로는 「단발령망금강」, 「목포일우」 등이 있으며, 그 가운데 1966년 작 「우후금강도(雨後金剛圖)」가 단연 압권이다. 그에 앞서 1962년에도 같은 제목의 작품을 남기고 있으나, 66년 작에서는 계골산으로서의 금강산 이미지를 비백선과 속도감 있는 준법으로 처리하는 동시에 근경 역시 임리(淋漓)한 필획으로 대담하게 표현하고 있어 그의 산수문인화의 대표작에 속한다. ● 소전은 당대 대표적 시인묵객들과 풍류를 즐긴 합작(合作)들을 많이 남겼는데, 경향간에 많은 문필가, 서화가들과의 교류는 물론 중국과 일본의 예술가들과 교류한 합작도 여러 점 발견된다. 소전은 당대 예술계의 최고 풍류묵객답게 벗들과 아회(雅會)를 즐겼다. 그 중 을유년 해방이 되던 해의 성북동 「승설암도(勝雪菴圖)」가 인상 깊다. 그것은 청명절 승설암에 모여 앉아 소설가 상허(尙虛)의 부탁으로 소전이 그리고 제를 쓴 즉석작품인데, 흙 담 아래 수석 분이 놓여 있는 정원을 내다보고 그린 작품이다. 소전의 풍류사상과 '금불환정신'(金不換精神, 소전은 남의 所請으로 執筆潤墨한 것뿐, 한번도 서예를 돈으로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 소설가 김동리의 증언이다. 한국일보 1981년 4월 16일자 「천자춘추」)은 그의 인생관과 예술정신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는 유년시절부터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 예술가로서 경제적 궁핍은 없었으며, 평생을 구차하게 산 적이 없기 때문이다.

소전 손재형_사능지족심상락(事能知足心常樂)_170×130cm_1970

5. 20세기 전방위예술가 소전 손재형 ● 다음은 만년기의 예술활동에 대해 몇 가지 첨부하고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소전은 서예가, 전각가, 문인화가인 동시에 교육가, 예술행정가, 정치인, 수장가, 감정가, 정원설계가 등 20세기 한국예술계에서 둘도 없는 전방위(全方位)적 예술가이다. 그는 독일어, 중국어, 일어에 능통한 언변가이기도 했다. 서두에 언급하였듯, 그는 1947년 고향에 사재로 중학교(지금 진도고등학교)를 세워 후진양성을 하였으며, 해방 전(1943) 잠시 경복고등학교 독일어 교사를 거쳐 1947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강사로 임용되기도 한 교육자였다. 홍익대학과 수도사범대학에 출강한 인연으로 1967년에는 두 대학 모두 명예교수로 추대하였다. 이후 원곡 김기승을 필두로 수 많은 문도들을 양성하였다. ● 그는 1945년 조선서화동연회 초대회장을 필두로 해방공간에서 문예운동의 주역으로 등장한 후, 국전 30년 역사와 운명을 같이하였으며(심사위원은 물론 수 차례 운영위원장과 심사위원장을 지냈다), 국가 주요 예술기관과 민간단체의 수장을 역임한 탁월한 예술행정가이기도 했다. 1954년 초대 예술원 회원이 되고 5. 16이후 예총(한국예술인단체총연합회) 창립에 앞장선 소전은 1965년 제4대 예총회장에 취임하여 5대회장을 연임하였다. 국보고적천연기념물보존위원(1949) 등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문화예술관련 직책은 많다. 정치가로서의 소전의 면목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면 소전은 두 번의 정치행보를 보여주었는데, 즉 1959년 자유당시절 무소속으로 민의원에 당선(국회 문교분과위원장 역임)된 것과 1971년 69세에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문공분과위원)된 것을 말한다. 8대 국회의원 때는 문화예술발전을 위한 활약과 공헌이 적지 않았다. 국회진출을 반대하는 제자들에게 소전은 답하기를 "오두미절요(五斗米折腰)의 고사와 암행어사에서 빚어진 추사 선생의 정의구현의 수난사적 역정과는 시대가 다르지 않은가….나의 뜻은 호연지기(浩然之氣)의 일환일세"라고 했다. 선생의 생각은 궁핍한 시대에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문화예술의 부흥을 위해 마지막 헌신할 각오였던 것 같다.

소전 손재형_제자(題字) 자료

6. 에필로그 / 소전의 애국정신과 문화유산사랑 ● 1950년 여름, 동족상잔의 침략전쟁으로 서울은 하루 아침에 혼란의 아수라장이 되었다. 당시 효자동에 주거하고 있었던 소전은 자신의 국보급 서화를 다수 소장하고 있는 대 수집가로서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인근 경복궁에 소장되어 있는 국립박물관(관장 김재원)의 유물이 더욱 걱정이 되어 피난도 못가고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소전은 만약을 대비하여 여러 가지 방안을 미리 강구하고 있었다. 소전댁에는 풍산홍씨 부인이 시집올 때 딸려 보낸 집사 이수영이 함께 살고 있었다. 이씨가 소전이 되고 소전이 이씨가 되어 문패도 바꿔 달고, 소전은 밀집모자에 배잠뱅이를 걸치고 얼굴까지 검게 하여 시내를 출입했다고 한다(소전의 장남 손용 교수의 증언). 아니나 다를까 북한 인민군 유물탈취조가 경복궁에 들이닥쳤다는 전갈이 소전에게 전달되었다. 단숨에 달려간 소전은 유물포장인부로 변장하고 날마다 인민군의 눈치를 봐가며 몰래 인부들에게 식사대접까지 하면서 되도록 포장시간을 늦추어 시간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곧 미군이 지원(9월 5일 인천상륙작전)해 올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인민군들도 초초한 나머지 서둘러 지령 받은 중요 핵심 국보유물만 챙겨서 소달구지를 변조하여 10여 개에 나누어 싣고 출발했다. 미아리 쪽으로 북행하다가 시민의 시선을 피해 아리랑고개로 방향을 바꾸어 비탈길을 오르던 중 아군 비행기의 기관소총 사격에 인민군들이 풍비박산 도망간 틈에 일꾼을 대동하고 숨어 뒤따라가던 소전이 즉각 유물을 수습하여 회수해 온 것이다. 얼마나 극적인 숨막히는 순간이었을까 상상이 쉽지 않다. 그 의도가 발각되었을 때 소전 한 사람이 아닌 수십 명의 목숨이 달린, 유명인사의 강제 납북처럼 유물의 납치가 아니라 그 난리통에 어쩌면 그 국보들을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상태로 영원히 파기 훼손되었을 지도 모를 절체절명의 국가적 위기를 소전에 의해 넘긴 것이다. 국가의 문화재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소전 같은 안목과 용기 있는 열정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해낼 수 없는 일대 거사(문화재수호대작전)를 성공시킨 것이다. 마침내 국립박물관 유물들은 다시 포장되어 그 해 12월 부산으로 안전하게 이전하게 되었다. 뒷날 소전의 이 공적이 늦게나마 정식으로 정부에 보고되어 민간인 최고 영예인 대한민국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하게 되었다. 소전의 예술가로서의 창조적 업적 이외에 나라사랑과 남다른 문화유산 애호에 절로 고개 숙여지는 것은 이처럼 불후의 역사적 공적들 때문이리라. (2013 癸巳年 3月 28日 中林褐石齋에서) ■ 羅石 孫炳哲

Vol.20130418e | 소전 손재형展 / SOHNJAIHYUNG / 素筌 孫在馨 / calligraphy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