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차이 Familiar Difference

이승재展 / LEESEUNGJAE / 李承宰 / photography   2013_0417 ▶ 2013_0423

이승재_7days-Wall1_잉크젯 프린트_100×137cm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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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0417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_12:00pm~06:00pm

더 케이 갤러리 THE K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6번지 Tel. +82.2.764.1389 www.the-k-gallery.com blog.naver.com/thekgallery

차이와 반복 ● 일상은 사소하고 지루하다. 매일 매일 마주치는 내 방의 벽과 천장, 바닥, 창, 침대 그리고 내가 지내는 공간과 그 안의 모든 사소한 사물들로 이루어진 나의 시각 생활은 참 평범하고 지루하다. 하지만 이런 일상은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면에 있어서는 강력하다. 너무 자주 마주치기 때문에 곧 잊어버릴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 장면들. 그렇지만 우리는 이 비루하고 지루한 일상에 둘러싸여서 삶을 영위하고 마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이 동일한 것들의 무한 반복 안에서 살아야만 한다. 어떤 강력한 혁명이 일어나더라도 말이다. 우리의 삶을 지루하게 하고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만드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계속되는 '반복'이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그 '반복'이 차이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한 것같다. 동일한 것들을 한 발짝 물러나 가만히 보고 있으면 동일하지 않아지기 때문이다. 그 반복적인 바라보기를 사진적인 과정으로 드러낸 것이 이 작업이다. 나는 이 작업을 통해서 내가 오랜 시간을 보내는 생활의 장소를 바라보았다. 모든 장면들은 나의 집과 작업실의 한 귀퉁이다. 그 안에서 카메라를 통해 바라보는 행위를 반복했고 그 행위의 반복을 통해 차이가 발생했으며 이 것들을 모아 새로운 풍경을 만들었다. ■ 이승재

이승재_Wall1-201210041500_잉크젯 프린트_60×50cm_2012

「잘 살고 있지? 어디쯤이야?」 불현듯 드리워진 멍에에 몇 번을 짓눌리고, 몰아치는 칼바람에 풀썩 주저앉을라치면 우리는 '내게 삶은 왜 이리 가혹한가, 어째서 나는 남들처럼 살지 못할까...' 밍밍하게 마음으로 읊조린다. '남들처럼 산다는 것...' 겸손하고 소박하게 들린다. 허나, 단언컨대, 그 누구도 '남'들처럼 살 수 없다. '남'이란 것이 얼핏 흔하디흔한, 보편적이며 구체적인 어떤 실체처럼 보이지만, 사실 여기에서 '남'이라 함은 변화무쌍하고 번식력 막강한 '욕망'의 또 다른 이름이기에 그렇다. ● 그렇다면, 남들처럼 살 수 없다면, 나답게 살면 될 테다. 참으로 그럴듯하고 만만해 보이지만, 그러나, 아차!스럽게도 우리는 '나'를 잘 모른다. 세상은 우리에게 '나'를 통찰할 기회를 제 때 제공하지 않았고, 기껏 찾아낸 '나'라는 것의 실상은 '남'을 통해 투영 된 '욕망덩어리'에 지나지 않을 때가 허다하다. 허세 쩐다. 가진 자의 편리가 만들어 낸 의식세계가 워낙이 공고하게 굳어있기에 그럴 테고, 진정한 민주(民主)의 결여가 불러 온 참사가 아무렇지 않게 세상에 만연해 있기에 그럴 테다. ● 애타게 '나'를 그리워하면서도 한편으론 끊임없이 '남'을 지향한다. 우리는 이렇듯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고 있다. 둘 모두를 품에 안기엔 둘 사이의 간극이 꽤나 아득하고, 둘 모두를 놓아주기엔 한 번 뿐인 삶이 그저 통탄스럽다. 이 둘 사이의 경계에서 안간 힘을 다해 매달려 때로는 이리저리 나부끼고 때로는 여기저기 부대끼며 그 막연한 절충안을 찾아가는 답 없는 여정... 결말은 뻔하지만 끝내 답을 알아 챌 수 없는 이 아리송한 여정이 어쩌면 삶이 아닐는지 모르겠다. 초입부터 이승재가 불러온 잡념들을 두서없이 지껄여 봤다.

이승재_7days-Floor3_잉크젯 프린트_100×135cm_2013

Sunrise Sunset ● 해와 달이 서로 하늘을 공유한다. 낮의 따사로움은 생산을 부추기고, 밤의 고요함은 휴식을 안내한다. 밝음은 물질을 비춰 앎을 이끌고, 어둠은 정신을 보듬어 얼을 깨운다. 태초로부터 음양(陰陽)은 조화로우며 이 둘의 어울림은 이 땅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이는 거대한 자연의 섭리이며 세상만물은 이에 순응한다. ● 하지만, 얄팍한 인간의 이기심만은 이 거대한 흐름에 딴죽을 걸었다. 인간은 자신들의 이익을 가늠해 음양에 선악(善惡)이라는 이름을 덧 씌웠고 세상 모든 것들을 양 갈래로 줄 세워 편을 갈랐다. 앎을 통해 얻어진 의식은 합리라는 미명하에 세상을 재단했고, 얼을 통해 길러진 무의식은 미신과 오류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 세상의 구석으로 내몰렸다. 시나브로 획일화된 집단의 논리는 돌처럼 굳어갔고 무한한 개인의 잠재력은 촛불처럼 사그라졌다. ● 음양을 대척점에 두고 얄팍한 지식으로 세상 모든 것을 이쪽저쪽으로 분류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모든 게 조화로웠던 그 때, 음양이 번갈아 자리를 양보하며 서로를 응원하고, 의식과 무의식이 포옹하며 한 데 뒤엉키던 그 때를 망각했다.

이승재_Floor3-201303051600_잉크젯 프린트_60×50cm_2013

7days ● 지구가 남과 북을 축으로 비스듬히 한 바퀴를 돌면 하루다. 달은 지구를 가운데에 두고 원을 그리며 지구 주위를 돈다. 달이 지구의 주위를 온전히 한 번 돌 때, 지구는 대략 서른 번의 자전을 한다. 한 달이다. 마치 달이 지구에게 그러하듯 지구는 커다란 원을 그리며 해의 주위를 돈다. 지구가 해의 주위를 돌아 처음 떠난 자리에 되돌아오기까지, 지구는 삼백예순다섯 남짓의 자전을 거듭하고, 달은 열두 번 가량 지구의 주위를 돈다. 한 해다. 이렇듯 '연월일(年月日)'이란 굵직한 시간개념은 땅과 하늘의 움직임, 거대한 자연의 흐름에 의해 결정된다. 하지만, 여기에 불쑥 끼어든, '주(週)'라 불리는 7일의 시간개념은 아니다. 이 녀석은 오롯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 졌다. ● '주'는 자연의 변화와는 무관하게 일곱 날을 반복한다. '주'는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비롯해 양치기를 하며 풀을 찾아 이곳저곳을 떠돌던, 농경사회의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자연의 변화에 덜 민감했던, 옛날 옛적 유대인들의 종교적 신념에 의해 정착된 시간개념이다. 그들 스스로가 원죄(原罪)를 저지른 아담과 이브의 후손이라 여겼던 유대인들은 그 원죄의 벌로서 물질적 노동을 감내했고, 창조주 여호와의 노동 패턴을 본 떠 여섯 날의 노동과 하루의 안식(安息)을 반복했다. ● 유대교에서 갈려 나온 기독교가 로마제국을 거쳐 유럽의 아이디어를 지배하고, 산업혁명 이후 유럽의 열강들이 식민지 쟁탈에 열을 올리게 되면서 '주'라는 인위적 시간개념은 중동의 마른 땅을 벗어나 세계 곳곳에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 오늘날, '주'는 거대 자본과 손을 맞잡고 우주만물의 거대한 흐름, 개개인 각자의 생체리듬과는 무관하게 세상 사람들에게 대여섯 날의 노동과 하루 이틀의 휴식을 강요한다. 짜증난다.

이승재_7days-Wall2_잉크젯 프린트_80×135cm_2013

In and Out ● 그 어디에도 인간만큼 안과 밖의 경계에 민감하고 익숙하게 길들여진 창조물은 없다. 인간은 바닥을 올려 습기를 눌렀고, 담을 쌓아 바람을 막았으며 천정을 올려 하늘을 가렸다. 이렇듯 인간은 인공의 산물을 통해 자연과의 구분선을 그었고 안과 밖의 경계를 만들었다. ● 안과 밖. 들어오면 안이고 나가면 밖이다. 물질이 안에 있으면 담기거나 갇히는 것이 되고, 밖에 있으면 버려지거나 자유로운 것이 된다. 정신은 안으로 숨어들수록 고통스럽지만 자유롭고, 밖으로 드러날수록 개운하지만 구속받는다. 안에 있음은 고립을 종용하지만 안전을 보장한다. 밖에 있음은 소통을 허락하지만 위험을 동반한다. ● 안과 밖은 명확한 경계를 이룬다. 그러나 그 날카로운 경계선 위에는 대뇌 전두엽까지 멍 때리게 만드는 아이러니들이 산재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아이러니들을 짊어진 채 경계에 바짝 눌어붙어 밖을 경외하며 안에 숨어든다.

이승재_Wall2-201301021040_잉크젯 프린트_50×60cm_2013

Bracketing ● 카메라 좀 깔짝거려 본 사람들 대다수는 브라케팅(bracketing)의 개념을 알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잠깐, 이승재의 작품과 전시가 '그들만의 잔치'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이승재의 작품을 마주한 사진 문외한들의 구글링 노역을 덜어주고자, 친절한(?) 필자가 구차한 설명을 덧붙인다. 브라케팅? 별 거 없다. 쫄지 말자. 사진은 빛으로 그리는 그림이다. 그리고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리려면 적당히~ 빛의 양을 조절해야 한다. 브라케팅은 빛의 양이 많고 적음에 따른 결과물들의 묶음이자 바로 그 '적당히~'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정도면 나름 명료하고도 명쾌한, 네이버 지식in 내공 15점짜리 설명이다. ● 참고로, 가장 그럴듯한 그림을 빚어내는 빛의 양을 두고 '노출이 적정하다' 표현하고, 빛이 필요 이상으로 많을 경우 '노출 과다', 반대의 경우를 '노출 부족'이라 말한다. 이때! '과다'와 '부족'을 결정하는 '적정'이라는 기준은 카메라에 내장 된, 혹은 별도의 노출계가 피사체의 빛 반사율 18%를 측정해 정한다. 허나 이 기계적 수치가 완벽한 적정을 담보하진 않는다. 왜냐하면 진정한 적정은 촬영자의 마음속에 있는 거~죠! 때문에 브라케팅을 한다. 노출계가 제시하는 적정을 기준으로 빛의 양을 달리해 동일한 장면을 여러 장 촬영하고, 그 중에서 촬영자의 마음속에 꿈틀대는 '나름'의 적정을 골라내자는 거다. ● 그런데 요거~, 말이 쉽지 절대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특히나 작가정신 투철한 열혈 사진가에게는 그 선별작업이 고역에 가깝다. 얼핏 고만고만해 보이는, 별 거 아닌 차이에서의 갈등은 겪어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소녀시대에서 제일 예쁜 멤버를 찜하는 일만큼이나 고통스럽다. ● 이승재는 새벽과 황혼을 빌어 음과 양, 의식과 무의식의 교차점에 주목한다. 또한 일곱 날, 인간 스스로의 강요에 의해 규정지어진 '주(週)'라는 인위적 순환을 밀착한다. 그리고 천정, 벽, 바닥, 창을 통해 안과 밖의 경계에 놓여 매달리고, 나부끼며 부대끼는 흔하디흔한 그 무엇들을 갇힌 자의 시선으로 주시한다. 여기에 이승재는 브라케팅이라는 사진언어를 적용한다. ● 경계 위에 놓인 탈색 된 피사체들이 밝고 어두움을 달리해 새벽과 황혼, 일곱 날을 아우르며 정처 없이 헤맨다. 이승재가 나지막이 속삭이는 이야기를 짐작해 본다. 누군가의 편리에 의해 규정되고 확장되어진 음양의 이별과 일상의 쳇바퀴, 그 굴레를 견디며 무구(無垢)한 자아와 강제(强制)된 욕망 사이에서 그 말도 애매모호한 '적정(適正)'을 찾아 떠나는 무명씨들의 여정..., 결국엔 너와 나의 삶... ● 집에 가는 길에 잊고 지내던 그대에게 전화 한 통 걸어 물어야겠다. '잘 살고 있지? 어디쯤이야?' ■ 김태정

Vol.20130417f | 이승재展 / LEESEUNGJAE / 李承宰 / photography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