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3_0327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09:30am~07:00pm / 월요일 휴관
학고재 Hakgojae 서울 종로구 삼청로 50(소격동 70번지) Tel. +82.720.1524~6 hakgojae.com
탐라국 사람 강요배의 회화적 모국어 ● 강요배는 한국 사람이 아니다. 그는, 탐라국 사람이다. 존재를 '사람' 중심에 두면 강요배는 지금 여기의 남한사람이요 제주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한 존재, 존재자로서의 예술가 강요배를 다시 말해야 한다면, 그는 분명히 탐라국 사람이다. 그는 제주로 완전히 귀향하며 "섬에서 자란 나는 다시 섬으로 돌아왔다"고 고백했다. 어느 날 그의 마음에 제주의 풍경 속 오래된 탐라의 신비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제 그 세계가 그의 세계요 제주의 삶이 곧 그의 삶이 되었다. 탐라인 강요배는 그렇게 다시 태어났다.
리얼리즘의 꽃 ; 전경과 후경이 만나는 곳 ● 하나의 풍경을 두고 우주적 사유와 역사적 사유를 동시에 펼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결과적으로 강요배는 전경(前景)과 후경(後景)을 한 화면에서 만나게 함으로써 그 미학적 통일성의 변증법을 해결했다. 전경이 눈앞의 풍경이라면 후경은 그 풍경에 깃들어 있는 보이지 않는 배경이다. 전경이 현실계라면 후경은 상징계이며, '드러남'과 '숨음'의 이중적 세계이다. 그는 캔버스에 전후경을 동시에 구현시키는 미학적 전략을 구사했다. 그것은 리얼리즘 미술의 새로운 도전이기도 했다. 그동안 우리는 후경을 간과했다. 그것은 입체주의, 구조주의, 후기 구조주의, 해체주의, 유목주의 등과 같은 수없이 많은 사조들과 개념들에 의해 정의되었다. 그 모든 것은 세계의 전경에 관한 것이다. 리얼리즘은 전경의 사유를 통해 후경으로 나아간다. 특히 동아시아의 실재는 후경에 의해 전경이 이루어진 경우가 많으니, 후경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리얼리즘의 리얼에 근접할 수 있을 것이다. 강요배는 이러한 후경의 사유를 통해 우주적 사유와 역사적 사유를 통일시켰다. 그러므로 그의 제주풍경은 우주적 세계이며 동시에 제주 역사를 투영하는 삶의 풍경에 다름 아니다.
사실성의 환상 ; 지금 여기의 실재 ● 리얼리즘을 사실주의로 번역했을 때의 오류는 '사실(寫實)'의 '사(寫)'를 '베끼는 것(재현)'에서 찾을 때이다. '베낌'이라는 재현행위가 리얼리즘의 개념 축으로 작동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재현으로서의 '사실'은 오히려 '사실성의 환상'이라 바꿔 불러야 할 것이다. 리얼리즘은 '사실(현실의 재현)'에 있지 않고 '사실성의 환상(최대한의 '현실 그 자체')'에 있으니까. 리얼리즘에서 예술작품은 현실의 재현이라는 과정을 갖지 않을 수 없으나 실제로는 재현하고자 하는 그 현실은 이미 과거에 속하거나 혹은 사건으로 기록된 역사일 수밖에 없다. 재현하고자 하는 현실은 '사실성의 환상'인 것이다. 그 환상이 명료할수록, 선명해질수록 리얼리즘은 커지는 것이다. 지금 여기의 리얼리즘은 이면이라는 '후경'을 상실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우리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전경이라면 후경은 현실 너머에 있는, 현실의 배꼽과 같은 그 무엇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며 만져지지 않는다. 신체의 감각을 내려놓은 자리에 영혼의 감각을 불 틔워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니까. 20세기 내내 아시아에 속한 한국과 서구라는 두 세계는 서구의 일방적 '승리'로 끝이 난 상태였으나 이제 두 세계 모두 당대 문명에 대한 오류와 폐해를 성찰하고 있으며 그 성찰의 대안을 '아시아성의 원형'으로부터 찾고 있으니, 크게 밀려나 있었던 옛 조선의 그것을 당겨 옴으로써 균형을 이뤄야 한다. 리얼리즘이 실재를 직접 가리는 것이라면, 선(禪)의 의미가 또한 그렇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선이야말로 가장 급진적인 리얼리즘의 실체라 할 수 있다. 항상 '지금 여기의 실재'를 터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강요배의 작품들이 문득문득 이러한 선의 화두를 보여주는 것과 같은 선적인 느낌은 그래서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서구의 리얼리즘이 눈앞에 보이는 풍경(前景)에 집중했다면 우리는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풍경(後景)을 집중했다. 초상화를 그릴 때 전신사조(傳神寫照; 인물의 형상 재현에 그치지 않고 정신까지 담아내는 일)를 강조했던 것은 그런 이유다. 이때 정신이나 마음은 외양의 배후라기보다는 형과 서로 연계되어 있는 것, 즉 후경인 것이다. 화가가 어떤 특정 인물을 그려낼 때 그의 외양인 '형'을 올바로 포착해내었다면, 자연스럽게 이 '형'과 구조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정신이나 마음 같은 내적 요소 역시 화면 위로 끌어올려져 '영'으로 비추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전경과 후경을 나누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래야 다시 리얼리즘을 말할 수 있을 테니까. ■ 김종길
Vol.20130328e | 강요배展 / KANGYOBAE / 姜堯培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