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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0323_토요일_03: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갤러리 비원 Gallery b'ONE 서울 종로구 화동 127-3번지 Tel. +82.2.732.1273 www.gallerybeone.kr
이번 이영희 전시는 두 개의 결과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2012년 동안 시흥 일대의 농경지역을 촬영한 사진과 자신의 작업을 기록한 책이며, 다른 하나는 갤러리 공간에서 보게될 드로잉, 오브제, 설치작업이다. 성찰과 재생의 시간 ● 이영희는 9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틈」이란 주제 아래「발굴」,「삶」등의 부제가 붙은 작업을 선보여 왔다. 벌어진 틈사이로 드러나는 생명, 혹은 침잠된 과거 시간들의 재발견과 같은 것들을 통해 그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삶과 삶 사이에서 존재하는 간극과 이를 인식하는 존재가 대면하게 되는 부조리인데, 작가는 이같은 형이상학적 주제를 섬유, 왕겨, 황토와 같이 단순하고 친근한 재료들을 이용해 형상화한다. 이 재료들은 오랜 준비 과정을 거쳐야 작업 재료로 쓰여 질 수 있는 것들로, 왕겨를 씻고, 건조하고 반죽으로 만드는 것 혹은 면사, 꼰사, 태모시들을 손질하고 염색하는 과정들은 그의 형이상학적인 작업 주제와는 좀 동떨어져 보이는 육체 노동을 필요로 한다.
안타깝게도 그가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이같은 노동의 과정은 오늘날 컨템포러리 미술에서 작가가 스스로 상정한 개념의 한 부분이 아니라면 예술가가 직접 이 과정을 수행했는지 아닌지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설령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진행하는 과정에 있어서 물성과 관념의 합일과 같은 고전적인 '진실성'을 위해 충실히 이를 수행했다 할지라도, 그렇다고해서 관람객들이나 비평가들에게 더 많은 의미부여를 요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는 자칫 수공예적인 숙련도로 예술을 구속할 수 있으며, 예술 작품의 영적이며 관념적인 부분을 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럼에도 자신의 작업이 많은 부분 노동과 연관되어 있다고 말하는 작가는 2012년 일 년 동안 시흥일대의 농경지를 매월 방문, 그 일대를 촬영하고, 농경지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흐름에 맞춰 자신의 작업을 진행해나가는 자기주도형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실행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오랫동안 그가 사유해 온 틈이라는 주제를 표현함에 있어서, 환유적으로 또한 형태적으로 매우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 왕겨가 씨에서 벼가 되고 탈곡되는 순환의 과정을 직접 봄으로써 자신이 선택한 매체에 대해 좀 더 체화된 사유를 하고자 했기 때문이며, 형태적으로 그가 많은 영감을 얻는 대지가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관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으로 12달이라는 시간 동안 시흥일대의 풍경사진에서 보여지는 자연의 순환은 그곳에 있었던, 시간과 공간 안에서 대상과의 일체감을 느꼈던 작가에 의해 드로잉, 오브제 설치 작업과 같은 미술의 언어를 통해 전달된다.
나는 작가와 그가 선택하는 재료 사이에는 은밀한 관계가 성립된다고 생각한다. 종종 그들은 서로 대화를 주고 받고,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위해 희생한다. 이영희가 왕겨를 선택한 것은 앞서 이야기 했듯 자연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탄생하고 소멸하지만 다시 부활하는, 다시 말해 인류가 수많은 신화에서 만들어 낸 위대한 어머니 여신의 속성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거름으로 연료로 끊임없이 다른 무언가를 탄생시키는 에너지로 환산되는 '버릴게 하나 없는' 왕겨의 헌신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부여하는 모성의 속성들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확실한 것은 이영희의「틈」에서 대지가 그 예민함과 관대함 그리고 규정되어질 수 없는 원초적 에너지를 내포한 형태로 무한히 확장되고 형상화 될 때, 작가와 그의 재료는 긴밀히 연결되어 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틈은 각 존재가 만나게 되는 장소이자, 각자의 역사성이 면면히 읽혀지는 곳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각자의 시간이 하나로 연결되는 그곳에서 삶과 예술이, 관념과 물질이 합일을 이루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영희에게 틈이란 개인으로서, 작가로서 불안과 함께 감지되는 부조리함과 '의미 없음을 어떻게 넘어 설 것인가?' 라는 질문에 자신의 실존의 타당성을 증명해 나가는 곳이다. 마치 20세기 중반 전쟁과 기존가치의 붕괴, 모더니즘의 속도 속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했던 실존주의 철학가들이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세상에 던져진' 인간이 자신이 처한 부조리한 상황에서 '자기 자신 밖으로 스스로를 내던지고, 자기 자신 밖으로 잃어버림으로써 실존한다' 고 선언했듯이, 이영희는 탁 트인 대지가 뭉글거리고, 솟구치며 자신의 재생과 삶의 에너지를 증명하는것을 통해 확신을 얻었을 것이다. 다양한 가능성을 향해 스스로 던짐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영속시키고 그의 예술의 진정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 박기현
익숙함을 보는 방법 'The Ways' of seeing the Familiar ● '자연'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무엇인가가 그 자체만으로 작품화되었을 때, 작가는 관객들이 그 '익숙함'을 넘어서 그 동안 우리가 간과했던 것들을 발견하길 원한다. 이를 위해 작가들은 작품이 설치될 장소의 특수성, 작품과 관객 사이의 물리적 공간의 변화, 혹은 작품을 구체화하는 방법의 차별성 등을 통해 익숙했던 것들을 새로운 시선과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 현대미술에서 이와 같은 시도는 꾸준히 진행되어 왔고, 1960년대 등장한 대지미술을 필두로 작가들은 자연이나 환경, 그리고 이것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강, 황무지 등을 그 자리에서 작품으로 승화시켜 우리의 시선을 전시장 밖으로 돌린 로버트 스미드슨 Robert Smithson 이나 나무, 돌, 흙 등을 직접 실내의 전시공간으로 끌어들인 리처드 롱 Richard Long, 날씨를 형성하는 태양과 공기를 미술관 내부에서 인공적으로 재현해 낸 올라퍼 엘리아슨 Olafur Eliasson 의 작품처럼, 이영희는 땅을 전시장 안으로 들여온다. 그리고 항상 우리의 발 아래서 존재하던 땅을 들어올린 후 새로운 관점에서 우리와 대면하게 한다. ● 이영희의 작품에서 땅은 원래의 위치를 벗어나 벽에 수직으로 걸리기도 하고 관람객이 계단에 올라 다양한 높이에서 감상할 수 있도록 설치되기도 한다. 작가가 최근까지 작업해 오고 있는「틈 Crack」시리즈에서 관객이 마주하게 되는 것도 이렇게 차별화 된 설치를 통해 구현된 땅이다. 작가가 과거의「틈 」시리즈에서 대지와 그 틈 사이를 뚫고 나온 풀잎들을 통해 우리가 간과하고 있던 생명력의 힘을 보여줬다면, 2013년의「틈 」시리즈에서는 전작에서 보다 더 역동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대지와 그 대지를 갈라 버릴 정도로 커져 버린 틈, 그리고 그 땅을 들어올리고 있는 뿌리들을 선보인다. ● 우리의 눈높이를 변화 시키거나 작품에서 멀어져야만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작품 속 대지의 실루엣은 최근작에 이를수록 더 큰 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 선의 굴곡은 땅을 관능적으로 보이게까지 한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은 작품에 가까이 다가서면서 바뀌기 시작한다. 관객들은 부드러워 보이던 작품 속의 대지가 사실은 거칠고 물기 없이 바짝 말라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나아가 우리가 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왕겨로 땅을 재현해낸 결과물이라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이 시점에서, 힘든 벼농사의 한 사이클이 끝나야만 얻어지는 왕겨와 그것으로 덮인 작품의 대지가 세월 속에서 거칠고 뻣뻣해진 노모의 피부를 연상시키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땅은 태고의 자연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인류와
「틈 」시리즈에서 보이는 농경의 흔적, 그리고 유물 발굴을 주제로 한 초기 작품들 속 역사의 흔적에 이르기 까지 이영희의 작품에서 자연은 언제나 문명의 흔적들을 품고 있다. 그리고 작가가 사실에 최대한 가깝게 자연을 재현하기 위해 선택한 재료 역시 문명의 산물이다.「틈 」시리즈에서 땅을 재현한 왕겨를 비롯해 밑에서 그 땅을 들어올리고 있는 뿌리를 재현하기 위해 선택된 재료는 염색된 천과 꼰사이다. 특히 면, 마, 태모시, 실 등의 직물은 염색과 바느질을 통해 작가의 초기작에서부터 꾸준히 사용되고 있는데, 사실 이렇게 직물을 만들거나 다루는 일은 전통적으로 여성만의 일이라고 여겨지던 작업이었다. 그리고 이를 이용한 많은 창작품들은 공예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르러 이러한 공예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70년대 페미니스트 미술운동의 리더 격이었던 주디 시카고 Judy Chicago는 역사 속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위대한 여성들을 초대하는 저녁 만찬상인 디너 파티The Dinner Party를 제작하면서 도자 페인팅과 자수를 이용했다. 이후, 여성적이라는 꼬리표가 달렸던 공예기법들은 그 역사적 선입관을 오히려 역으로 이용하여 가다 아메르 Ghada Amer 처럼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주제나 페미니즘에 대해서 표현 할 때 사용하기도 하고, 김수자 Kim Sooja의 바느질 같이 행위 자체가 작품이 되어 우리에게 화두를 던지기도 하면서 현대 미술에서 자리를 잡아왔다. ● 이영희의 작품 속에서 대지 밑을 받치고 있는 뿌리도 직조와 염색 등을 통한 노동과 공예의 산물이다.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어 내려온 방법으로 만들어진 꼰사와 천 조각들의 뿌리는 결국 인류의 역사를 통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쉴 틈 없이 바쁘게 일해오며 우리를 떠받들어온 많은 그녀들의 흔적을 나타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벌어진 틈을 통해 우리는 이제서야 그 존재를 인지한 것 같기도 하다. 그녀들은 그곳에서 계속 그렇게 있어왔는데 말이다. ● 항상 그렇게 있어 왔던 것들이 얼마나 귀중한지 깨닫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경우 보통의 사람들이 그 귀중함을 깨닫는 시기는 아쉽게도 그것이 사라지고 난 후이다.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우리의 주의를 환기 시킬 수 있는 것은 예술이다. 예술가들은 그들의 예민함으로 우리가 간과했던 것들을 볼 수 있도록 유도하며 그 익숙함의 장막을 걷어버린다. 그 경험으로 이제서야 깨달은 것이 있다면, 아니 지금이라도 깨달았다면 조바심 내지 말자. 지금 우리는 절대 늦지 않았다. ■ 안지형
Vol.20130318c | 이영희展 / LEEYOUNGHEE / 李榮姬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