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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0220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공휴일 휴관
갤러리 인 GALLERY IHN 서울 종로구 팔판동 141번지 Tel. +82.2.732.4677~8 www.galleryihn.com
한운성의「디지로그」연작에 대하여 : 두 개의 빛 ● 한운성은 한국 회화의 현대적 흐름에 있어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다. 그의 작품세계는 7, 80년대 팝아트로부터 90년대 포스트모던 페인팅, 그리고 2000년대의 개념주의적 회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폭넓은 해석틀 속에서 조망되어 왔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패러다임들을 생산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비평가들이 지적하듯이, 한운성의 작업에 대한 평가는 아직 진행형이며 그 가장 커다란 이유는 그의 작품세계가 지닌 독특한 중립성과 시의성과 무관하게 자신만의 주제를 탐구해온 독자적 성격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운성의 작품들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연관시킬 수 있는 많은 비평적 해석의 프레임들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형식적 구조 내부에서 천착을 거듭함으로써 비평적 거대담론들에 의한 분류를 빗겨왔다. 이에 대해서는 작가로서의 초기 단계에서 겪은 정체성과 입장에 대한 그의 오랜 고뇌와 성찰을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 한운성의 작품에 대한 가장 간결한 비평적 표현은 '이중적 구조'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실체와 허상의 이중적 이미지', '동적인 이동성을 자아내는 이중구조의 사물'과 같은 평가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러한 이슈가 그의 작품을 둘러싼 핵심적인 쟁점으로 자리해 왔음을 알려준다. 그의 작품 속에서 이 두 가지 범주는 때로는 서로 충돌하고 때로는 상호보완 하는 독특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실체가 '재현'과 연관된 것이라면 허상은 '회화적 구조'를 함축한다. 전자가 한운성 특유의 강력한 사실주의, 나아가 자연주의적 태도를 뒷받침하는 것인 반면에 후자는 이러한 사실주의가 단순히 대상의 재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이 모순된 양가성(兩價性)으로 인해 그의 작품은 때로는 구체적 의미작용이나 소통을 추구하는 사회적 사실주의 작품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 또 때로는 회화의 내적 요소들 상호간의 자율적이고 자족적인 관계들을 구축하는 형식적이고 관념적 구조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이 두 가지 측면은 사실상 그의 작품세계 전반에 걸쳐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일으키면서 진화해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소개되는 한운성의「디지로그」연작 역시 예술적 문제의식에 있어 이전의 작품들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그러나 작품의 제목의 암시하는 것처럼 앞서 언급한 '이중적 구조'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이전과는 다른 좀 더 정교한 도구들이 요구된다. 이전의 작품들이 평면적인 공간 속에 '떠있는' 대상들을 정면에서 바라본 '즉물적' 시점을 고수해 왔다면, 이「디지로그」연작에서는 3차원의 가상적인 공간 속에서의 의도적인 연출과 편집을 유감없이 활용하고 있다. 바로 직전의 '과일 연작'만 하더라도, 작가에게 있어 캔버스의 공간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의 성격을 명확하게 규정짓는, 회화적이면서 동시에 개념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최근의 작품들에서 시선은 재현적 공간 속을 배회하거나 아니면 스스로 화면 안에 허용된 '연극적' 구조의 일부가 되고 있다. ● 이번「디지로그」연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요소들이다. 첫 번째는 사실적 재현을 통해 그려진 건축적 구조물들, 그리고 이러한 구조들이 배치되어 있는 방식과 공간의 성격이다. 두 번째는, 이 작품의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이 '유비적 서사구조'가 재현하고 있는 해석적 층위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점이다. ● 첫 번째 요소에 대해 살펴보자. 이 연작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유럽의 잘 알려진 관광지들을 주된 소재로 하고 있다. 이 연작을 제작하게 된 동기에 대해 말하면서, 작가는 외국을 여행하면서 자신이 그 장소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반 없는 상태에서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라는 사실을 깊이 자각해야만 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 사례로서, 작가는 몇 년 전에 방문했던 영국 브라이튼의 'Old Ship Hotel'에 대한 일화를 떠올린다.
당시 초청자가 마련해 준 호텔이 낡고 오래된 것이어서 다소 불쾌하고도 의아하게 생각했던 그는 한국에 돌아와서야 그 곳이 그 도시에서 가장 유서 깊고도 많은 이들이 찾고 싶어 하는 명소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실제로 자기가 방문한 장소를 사진으로 남겼으며, 고국으로 돌아와 그것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서있었던 장소의 시점을 기억을 통해 되살렸다. 사진 속의 풍경은 그가 대상을 바라보면서 서있었다는 사실의 유일한 단서인 셈이다. 사진 속에서 건물들과 풍경은 일안 카메라의 원근법적 메커니즘에 따라 특정한 깊이와 공간감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풍경은 사진의 프레임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해, 풍경 속의 건물들은 마치 불리언(boolean) 함수를 이용한 입체 커터를 사용한 것처럼 사진의 프레임에 의해 잘려나간 윤곽을 보여주고 있다. 이 평면적인 기록을 통해 작가는 그가 실제로 대면했던 장소의 외양에 대한 입체적이고 감각적인 기억을 떠올려야만 했다. 그러므로 이 사진 내부의 정보들을 캔버스에 유화로 다시 옮겼을 때, 실제로 그려질 수 있는 것은 사진의 평면 위에 기록되어 있는 풍경의 표면이었던 것이다. ● 예를 들어, 2012년 작「Sagrada Familia」나「Plaza de Espana, Sevilla, Spain」등과 같은 작품들에서 건물들의 잘라내고 그린 부분은 방문 당시 촬영한 사진에 기록된 부분들로서, 상부의 불규칙한 절단면은 작가에 의해 그려지는 과정에서 원근법적으로 조정된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디지로그」연작은 특히 건물의 파사드(façade, 건물의 정면부)를 주로 재현하고 있다.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건물들은 유럽의 중세나 근대의 유적과 성들, 그리고 관광지의 호텔과 식당과 같은 전형적인 장소들이다. 여기서 '전형적'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것은, 주로 관광엽서나 관광지에서 찍는 사진들의 반복적인 소재가 되는 피사체들의 범주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건물들의 파사드를 표현함에 있어 작가는 그것을 마치 얇은 판재들로 제작하여 세워놓은 것처럼 그려놓았다. 그것도 앞서 말했듯이, 관광객의 시점에서 촬영한 '스냅 사진'에 기록된 부분들만을 그려 놓았다. 게다가 이 판재들을 세워놓기 위해 뒷부분에는 각재로 되어있는 지지대들을 묘사해 놓고 있다. 이 때문에 건물들은 흡사 거대한 영화 촬영장의 세트처럼 완벽한 외형을 재현하고 있는 가배(假背)나 정치적 프로파갠더를 위한 위장 마을(potemkin village)처럼 보인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지중해의 화려한 풍광이나 북유럽의 선명한 햇살 속에서 더없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이 건물들은 준비된 편평한 공간 위에 가상의 풍경을 연출하기 위해 누군가가 얇게 오려서 세워놓은 것들이다. 무엇보다도 사진 프레임에 의해 임의적으로 잘린 것처럼 보이는 건물의 윗부분들 때문에 풍경의 가상성은 더욱 강조되어 보인다. ● 이 풍경들 속의 건물들(혹은 건물의 '시뮬라크르'들)은 극단적으로 대조적인 배경 위에 세워져 있다. 화면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파사드들, 혹은 가짜 벽면들이 지지대에 의해 버텨 세워져 있는 장면 뒤로는 텅 빈 공간이 펼쳐져 있다. 이 공간은 두 개의 영역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티 없이 맑고 평면적인 하늘이고, 다른 하나는 파사드들이 서있는 넓고 편평한 바닥이다. 그리고 이 두 영역이 맞닿은 지평선이 화면의 하단 3분의 1에서 4분의 1 지점을 가로지르고 있다. 지평선이 아래쪽에 위치함으로써 화면의 건물은 전체적으로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되고, 건물들은 훨씬 더 극적인 웅장함과 스펙타클한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주제가 되는 건물 외의 아무런 대상도 남겨놓지 않고 삭제해 버린 듯한 넓고 비어있는 배경은 이 그림이 일종의 가상적 공간 혹은 이 기념비적 파사드들을 위한 광장을 묘사하고 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대상의 사실성과 배경의 추상성 사이에서 생겨나는 역설적인 느낌으로 인해 관객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혹시 미니어쳐가 놓인 공간이 아닌지 의심해 볼 수도 있다. 사실적 재현의 측면에서 보자면, 현실 공간에서 배경이 이토록 단순하고도 균일하기 위해서는, 사막과 같은 자연적 평면의 한가운데가 아니고서는, 공간 자체가 인공적인 것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관광명소들 주위에는 이처럼 텅 빈 공간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 허구적이고 인위적 평면은 컷-아웃(cut-out) 미니어쳐를 위한 바닥재를 연상시킨다. 즉 이 세트는 역설적으로 원근법적 변형(anamorphosis)을 위해 배치된 미증유의 카메라의 시점, 혹은 입체적 공간의 사진적 재현을 위한 미니어쳐의 무대가 되는 것이다. ● 반대로 그려진 대상이 실물 크기의 공간이라면, 배경의 공간은 일종의 추상적 면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대상이 실물 크기일 것이라는 추측을 뒷받침하는 것은 풍경들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스케일이다. (물론 이 인물들 역시 '컷-아웃'일 수 있다.) 이 그림들에는 건물들뿐 아니라 관광객이나 행인들과 같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 인물들은 풍경의 내부를 거닐기도 하고 건물들의 파사드, 쇼우윈도우, 가게 등을 바라보거나 혹은 기웃거리고 있다. 이 인물들의 비례는 건물들의 실제 크기와 비교하여 이상하지 않을 만큼 잘 맞아 있다. 다시 말해, 건물들이 실제 크기대로 만들어져 있으며 그 안에 그려진 인물들은 주변 풍경의 크기로부터 실제와의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인물들은 이 풍경들에 실제인 것처럼 몰입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일종의 연극적 상황, 즉 무대의 세트처럼 가상적으로 마련된 풍경 속에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그것을 바라보고 그 안을 거니는 비-현실적 상황이 연출된다. 그렇다면 텅 빈 배경의 장소 어디인가? ● 미니어쳐를 위한 배경이 아니라면, 금방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컴퓨터 게임 등에서 볼 수 있는 가상현실의 공간일 것이다. 예컨대, '세컨드 라이프', '심시티'를 위시해서 가상세계를 바탕으로 하는 온라인 가상현실게임의 특징은 참가자의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게임들 속에서 위치에 대한 보편적이고 유일한 단서는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목록뿐이다. 사실상 불특정한 서버의 저장공간 어딘가에 물리적 위치가 있겠지만, 주어진 가상공간 안에서 참가자들이 수평적 여행을 통해 자신의 세계로부터 다른 참가자의 세계에 다가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반면에 여기서는 동일한 세계가 중첩됨이 없이 동시에 수많은 참가자들에게 무한히 다른 현실로서 제공될 수 있다. 멀티버스(multibus)이자 어느 방향으로나 무한히 확장가능한 이 가변적 공간은 사실상 순수한 추상성, 즉 현실의 숫자와 연산에 의해 구축된 비-물질적 환영 혹은 공간의 '유비'(analogy)인 셈이다. ● 이 연작의 제목인「디지로그」는 이러한 유비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유비는 비교되는 두 대상 중 어느 하나가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거나 친숙한, 혹은 사실로서 확실한 것일 때 이루어진다. '아날로그' 역시 '유비'와 마찬가지로 '의사(ana, up to)+논리(logos, ratio)'라는 어원으로부터 유래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개념들은 모두 '실제'에 대해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을 서술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오늘날 '아날로그'는 전기, 전산분야에서 점증적인 강도, 세기 등과 같은 물리적 전이를 연속적 양(量)으로 나타내는데 더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이를 수치적으로 나타내는 '디지털'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잘 알려져 있다는 점이다. '디지로그'는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합성한 '조어'(neologism)다. 아날로그가 세계의 자연적이고 연속적인 전이와 변화를 나타낸다면, 디지털은 그것을 개념화하고 수치화한 가상적 모형을 표시한다. 두 가지 다 세계의 재현에 간여하지만, 전자가 직관적, 감각적, 인식론적 방식을 취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산술적, 기하학적, 추상적 번안으로 나아간다. 작가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합성한 단어를 사용하여 이 연작을 명명한 것은 이 두 가지 세계, 방법, 형식, 양태들이 충돌하거나 혼재되어 있는 대상 혹은 세계를 가리키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배경은 이미 오래전부터 한운성의 작품들에서 추상적 면이자 최종적 레이어로서 중요한 요소로 다루어져 왔다. 배경은 회화적 '중립성' 혹은 '영점'(degré zéro)을 나타내는 장소일 뿐 아니라, 회화적 생산을 작동시키는 기표(signifiant)로서 그의 회화에서 가장 일관된 방식으로 표현되어 왔다. 한운성의 회화에서 텅 빈 공간 혹은 추상적 색면으로 제시되어 있는 배경은 디지털 가상현실의 비-장소성(non-lieu), 즉 호환가능한 좌표들로 이루어진 공간의 불특정성과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 앞에서 언급한 두 번째 요소, 즉 회화적 서사구조는 이「디지로그」연작에서 '유비' 혹은 '아날로그'라는 관념이 무엇과 무엇의 비교를 가리키는 것인가라는 질문과 연관되어 있다. 다시 말해, 1) 사실과 그것의 재현 사이의 비교인가, 아니면 2) 사실의 허구성과 그 허구성의 재현 사이의 비교인가? 그것도 아니면, 3) 사실적 재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차적 수용의 시선과 이 그림 속에 표현된 관계를 바라보는 해석적 시선 사이의 비교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4) 이 그림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허구적 현실을 바라보는 관광객들의 시선과 이 그림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시선 사이의 액자구조에서 드러난 관계들의 비교인 것인가? 등등. ● 첫 번째의 경우, 사실과 그것의 재현 사이에 가로 놓인 유비라고 한다면, 여기에 그려진 풍경은 우리가 분명한 현실로서 의심해마지않는 것으로부터 파생된 것이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 그림들의 풍경을 현실로 인식하는 이들은 그림 안에 그려진 인물들뿐이다. 화가를 위시하여 이 그림을 보고 있는 관객은 이 풍경의 확고한 사실적 묘사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실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 그것은 단지 '근사'(近似)하게 그려진 모형이나 외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그려놓은 것은 건물과 그 앞의 인물들을 포함하여 사실의 재현이 아닌 일종의 '가상' 혹은 무대인 셈이다. 그것도 이중적인 무대, 다시 말해 그림 안의 인물들이 바라보고 있는 '파사드'들로 이루어진 무대와 그것을 다시 화면 위에 재현해 놓은 재현적 장치로서의 무대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 두 번째의 경우, 사실의 허구성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앞서 사례로 든 대상에 대한 불가지론(不可知論)과 관련된 작가의 소회를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제대로 된 지식이 없이 겉핡기 식으로 조우하는 수많은 대상들에 대해 그가 느낀 자괴감을 토로하면서, 작가는 삶과 세계가 더욱 더 이런 관계들로 채워져 가는 것은 아닌가에 대한 걱정과 유감을 표현했다. 실제로 그가 그린 관광지의 건물들은 수많은 인파들이 찾아오는 장소들이지만, 이들이 경험하게 되는 것은 잠깐 동안 건물의 외면을 바라보는 일 뿐이다. 실제로 그 장소에 대해 깊이 경험하거나 알 수 있는 방법은 극히 한정되어 있다. 이 얄팍한 조우를 작가는 말 그대로 얄팍한 벽면으로 재현해 놓았다. 여기서 유비가 근거하고 있는 현실은 '경험의 허구'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허구성의 재현은 아마도「디지로그」연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Hot Dog Stand」(2011)나「Qvadra Panis」(2012)는 관광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패스트푸드점이나 명품샵의 쇼우윈도우와 그 앞에 몰려드는 인파를 그린 것이다. 이 가게들 역시 판재로만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앞에 몰려드는 사람들이 보게 되는 것은 그저 평면적인 이미지뿐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채고 있는 것은 이 그림을 보고 있는 관객들뿐이다. 허구적 현실에 기반한 허구적 서사는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비판적 우의(寓意)의 메시지를 반어적으로 드러내는 유비인 셈이다. ● 세 번째로, 이 그림에서 관객이 우선적으로 보게 되는 것이 앞에서 언급한 경험의 허구성에 대한 작가의 비판이라고 할지라도, 그러한 관점을 전달하는 화면의 구조에 대해서는 좀 더 주의 깊은 분석이 따라야 한다.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이 그림은 두 개의 영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하나는 관광명소를 가벽세트처럼 그린 화면의 중앙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나머지 배경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이 편평한 배경의 공간은 한운성이 지금까지 그려온 많은 작품들 속에서 일종의 양식적 기표로 다루어져 왔다. 뿐만 아니라 화면의 중앙과 배경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위에서 다룬 것처럼 이미 다양한 분석들이 제시된 바 있다. 중앙 부분의 건물을 그리기 위해 사용한 참고사진이나 도판들의 프레임 역시 여기서는 일종의 의도된 구획처럼 다루어져 있다. 대상은 화면의 중심에 마치 무대에 서있는 주인공이나 주제처럼 엄격하게 정치(定置)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삶과 세계에 대한 경험의 결핍과 허구성은 대상의 사실적인 묘사와 그것이 놓여있는 허구적 공간이 만들어내는 역설적 관계로 인해 일종의 이중부정 혹은 다중부정 상태를 만들어낸다. 다시 말해, 사실(사진적 기록)-허구(허구적 경험)-사실(사실적 재현)-허구(의도적 연출)-사실(회화적 구조, 레이어들)-허구(관객의 다양한 해석 가능성)-사실(구조 전체에 대한 메타-비평적 관점, 혹은 지금과 같은 글)과 같은 반복적인 모순의 상태들이 중첩되는 것이다. 허구적 경험을 서술하는 공간의 허구성이 모호한 긴장관계와 생산적 메커니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관객들은 이러한 회화적 공간의 액자구조, 수직적 반복(mise-en-abîme)이 삶과 세계의 어떤 부분과 비교되는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된다. ● 최종적으로, 분명히 의도되어 있는 화면의 허구적 설정과 그것으로 인한 해석의 생산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디지로그」연작은 삶과 세계를 채우는 경험의 허구성에 대한 경고를 다루고 있는가? 아니면 그것이 생산해내는 또 다른 세계관 -그것이 회화적인 것이건, 지적인 것이건 혹은 형이상학적인 것이건 간에-을 살펴보아야 하는가? 이 연작에는 몇몇 예외적인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2012년작「Catedral Sevilla」와「Blue Mosque」와 같은 작품들이 그것이다.
이 작품들에서 화면의 중앙에 놓이는 주제는 얇은 가벽이 아니라 어두운 평면 사이를 뚫고 보이는 뒤쪽의 밝은 공간 혹은 빛이다. 일종의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들을 살펴보면 다른 그림들에서 건물의 파사드에 해당하는 화면의 중앙에 빈 공간이 생겨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빈 공간의 묘사조차 또 다른 회화적 평면 혹은 눈속임(trompe-l'oeil)일 수 있다. 밝게 빛나는 원경은 사실은 전경의 판재에 그려진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은 빛은 가벽 파사드를 그린 다른 그림들의 배경에서 볼 수 있는 추상적 색채(하늘, 대지 등)와 연관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Toledo, Spain」의 경우, 화면의 상단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 도시의 밝은 풍경은 다소 추상적이고 단순한 붓터치들로 묘사됨으로써 모호한 아웃-포커싱 상태를 나타내고 있는데, 이러한 모호함은 아랫부분의 어둡고 세밀하게 묘사된 관광객들의 영역과 대비를 이루면서 더욱 비-현실적인 가상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 그림들의 예외적 구조는 다른 그림들의 '허구적 공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불러일으킨다. 또 다른 예외적 사례로,「Hadrians Gate, Antalya, Turkey」라는 제목이 붙은 두 점의 그림을 들 수 있다.
이 작품들은 주제이자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로마 황제의 기념비를 비-사실적인 방식으로 그려놓았다. 한 작품에서는 기념촬영을 하는 동양의 관광객들 뒤로 가볍게 드로잉 선묘를 얹은 어두운 문의 실루엣이 보이고, 다른 작품에서는 아예 전경의 어두운 공간 위에 낙서를 하듯이 문을 묘사해놓았다. 이러한 그래피즘(graphism)은 흡사 이천 년 전 당시에 벽에 그려졌던 낙서를 재현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다시 말해, 밝은 햇살 속에서 빛나는 관광지의 일상적 풍경과는 대조적인 오래된 과거의 유령이 불현듯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심리적 효과가 야기되는 것이다. 실제로, 동양 관광객들 가운데 가장 멀리 있는 인물의 모습에서는 다리 부분을 통해 유령처럼 뒷부분의 풍경이 투명하게 비치고 있다. 여기서 온전하게 사실성을 갖추고 있는 인물은 이 모든 장면을 뒤로 한 채 관객 쪽을 바라보고 있는 전면의 여성뿐이다. 이 작품들은 작가의 시점이 단순히 사실적 재현과 회화적 허구 사이의 경계에 머무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회화는 여기서 현재와 과거, 그리고 무한한 사유의 시간대를 연결하는 경로 혹은 전이지대인 것이다. ● 2012년 작「Room #, Lindstrom Hotel, Laerdal, Norway」는 이 전이지대로서의 회화에 대한 독특한 단상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이다. 어느 날 아침 이국의 호텔 방에서 눈을 뜬 뒤 창문을 열었을 때 작가는 너무나 아름다운 마을의 풍광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가 사진으로 기록한 마을의 풍경은 그림에서도 창문을 통해 선명하게 재현되어 있다. 단지 이 풍경은 그림에서조차 '그림처럼' 아름다운 빛을 발하게끔 재현되어 있다. 그리고 창문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호텔방의 내부-은 의도적으로 낮은 톤의 흑백으로 처리되어 있다. 이 그림 속의 풍경은 일종의 자기지시적 상태 혹은 실제와 재현 사이의 전이지대에 머물러 있다. 작가가 보았던 기억 속의 이상향은 단지 그림에 의해 지시(indexing)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회화의 내적 구조로 인해 이 풍경은 일종의 회화에 대한 물음표처럼 그림의 한 가운데에 '걸려'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창문의 완벽한 프레임을 깨트리고 있는 앞부분의 스탠드 램프다. 그것은 침대 머리맡에서 실내를 향해 옅은 빛을 드리우고 있다. 마치 깨어나야 할 꿈을 가리려는 듯, 회화적 재현의 허구에 대한 작가의 상념처럼, 실제로 다가갈 수 없는 타자의 풍경에 대한 체념처럼 이 작고 하얀 구멍은 그림의 어두운 공간을 향해 추상적인 빛을 뿌리고 있다. ● 회화의 영역은 현실의 '유비'이면서 동시에 이름 붙일 수 없는 또 다른 영역의 '유비'이기도 하다. 일종의 중간영역인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이 한운성의 회화를 '이중적 이미지' 혹은 '이중구조'라고 평가하게 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 전이지대 혹은 중간영역으로서의 회화적 구조는 단순한 균제(symmetry)가 아닌 훨씬 더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판단의 조건들을 생산해낸다. 한운성의「디지로그」연작은 사실과 허구, 사진적 기록과 회화적 재현, 글쓰기의 중립성과 해석의 개방성, 시뮬라크르와 중첩된 구조 사이의 변증적 상호작용 등에 대한 탁월한 예시를 제공한다. 이 작품들은 나아가 세계의 무한성과 다중성에 대한 가상현실과 물리적 우주의 상호지시성(co-referentiality)까지도 일별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 안에서 자연의 빛과 예술가의 정신이 빚어내는 빛의 혼재가 만들어내는 정교한 문양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 유진상
Vol.20130220h | 한운성展 / HANUNSUNG / 韓雲晟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