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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0220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경운동 64-17번지 Tel. +82.2.733.1045~6 www.grimson.co.kr
내가 서 있는 곳 ● 이곳 작업의 시작은 먼저 계획된 무엇인가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반복된 나의 삶의 궤적 중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모여진 곳. 수년간 나는 같은 곳을 보고 있었지만 내가 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곳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그냥 지나쳤지만 관심이 집중되었던 이 장소를 아무 계획 없이 사진을 찍기 시작한 순간도 내가 왜 이곳을 바라보는지, 내가 이곳에 나의 시선과 관심, 또는 모아지는 감정의 우물과 같은 이곳에 대해 몰랐습니다. ● 이곳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지만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곳입니다. 옆에 고속도로, 위에 국도가 있어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시선들에 보여지지만 전혀 기억할 수 없는 장소, 즉 이곳은 어떻게 보면 기억할 만한 의미가 없는 주위에 반복되고 흔한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인간에겐 소외되었지만 자연과는 끊임없이 대화를 합니다. 이곳을 바라보면 그 안에 풀의 움직임이 느껴집니다. 빛과 어둠이 만들어낸 또 다른 다양한 색을 만나게 됩니다. 그 안에 피는 꽃도 반갑고 긴긴 겨울을 견딘 땅의 힘을 가지고 피는 봄의 초록도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습니다. 화려한 가을의 색깔은 없지만 나름 낼 수 있는 최선의 색으로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삶의 끝에 순종하듯 모든 에너지를 털고 죽음의 색으로 견딥니다. ● 그들의 1년은 반복됩니다. 나는 1년을 계획으로 사진을 찍었지만 그 이후도 사진을 찍습니다. 그들은 1년 후에도 거의 변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쩌면 1년을 기준으로 우울하게 삶을 반복하고 언제 변화가 될지 모르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자연이 주는 빛과 계절이 주는 색을 반복하여 지루해하지 않고 그 위치에서 주변의 흙과 이름 없는 풀, 잔 나무들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갑니다. 나는 여기에서 사회 속에 있는 군중의 시선으로의 나를 보았고 내가 바라보는 사회와 군중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흔적 없이 사라지지만 인간이란 큰 역사적 흐름 속에 면면히 이어져 오는 내 이웃들, 내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보았습니다. ● 나는 사진을 찍는 내내 우울했습니다. 그리고 그 우울감이 어디에서 왔는지 고민을 해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1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 곳을 바라보고 사진을 찍으며 말할 수 있는 나의 이 우울감은 다름 아닌 이곳이 인간의 삶 아래 '내가 서있는 곳'이라는 것을 인정하기까지의 과정이 아닌가라는 느낌입니다. 나의 한계성과 중심성의 세계를 고통스럽게 깨는 과정 중의 감정, 즉 나의 나르시시즘의 틀에서 바라보는 감정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그 껍데기를 힘겹게 걷어내어 내가 서 있는 곳과 그 주변을 보며 지루한 한계성과 반복은 작은 생명이 되고 공허한 무의미함이 조그만 의미가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2013년 1월) ■ 이현권
이현권-풍경의 애도 ● 이 풍경은 무심하고 무료하다. 기존에 우리가 품고 있는 풍경에 대한 관념과 사뭇 다르다. 대개 미술과 사진에서 다루는 풍경은 아름답고 숭고하며 장엄하다는 도식 속에서 다루어진다. 따라서 그 풍경사진들은 자꾸 강박적으로 무엇인가를 강요한다. 감정과 정서와 과잉된 낭만 혹은 학습된 미의 반복적 확인을 재촉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아름다운 풍경을 되풀이 하여 재현하고 반복한다. 이른바 상투적이 된다. 그것은 실상 특정 풍경에 대하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는다. 굳이 그 풍경이어야 할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는다. ● 이현권이 찍은 풍경은 풍경이라고 부르기가 민망하다. 도로변에 위치한 흔한 야산이며 엇비슷하고 별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지 않은 그런 땅이기도 하다. 작가는 자신의 동선 속에서 발견한 그 장면을 찍기 시작했다. 그곳을 오간 세월이 수 년 인데 어느 날 그 풍경이 자신에게 온 것이다. 다시 보인 것이다. 직장 근처에 있는 그 장소를 홀리듯이 틈나는 대로 찾아가 바라보았다. 질주하는 차창 밖으로 흘낏 바라본 풍경을 천천히 걸어가서 다시 가 본 것이다. 도로변에 위치해있기에 아마도 엄청난 사람들이 지나며 보는 풍경이겠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의미 있는 존재로 바라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작가는 문득 그 산의 모습에서 자신을 바라보았다. 더불어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는 익명의 존재들, 평범한 군중들, 지극히 무의미해 보이는 풍경, 하찮은 사물들도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냥 그 자리에서 최선의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이다. 저 산 역시 매시간, 계절마다 최선을 다해 변화를 거듭하며 자리하고 있다. 자신의 숙명과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며 자기 역할을 힘껏 해내고 있다.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저 산은 감동스럽다" 라고 작가는 생각한다.
본다는 것은 생각하는 일이다. 응시는 머리를 복잡하게 해준다. 우리가 무엇을 본다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해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시선은 늘 격발된 총과 같다. 작가는 바라본 풍경을 반복해서 찍었다. 1년이 넘는 시간동안 거의 매일, 동일한 장소를 촬영했다. 광선이나 각도, 톤의 조절 등은 무의미하다. 그저 보이는 대로 무심하게 담았다. 사각형의 인화지에 가득 들어찬 풍경은 중심도 주변도 없다. 전면적으로 균질하고 평평하며 전일적인 시선 아래 평등하고 납작하다. 깊이가 사라진 화면, 프레임에 가득 찬 풍경은 오로지 땅과 나무와 풀을 보여준다. 봄에서 겨울까지, 아침에서 오후의 시간까지, 그리고 햇살과 안개, 비와 눈이 그 위를 채우고 비워내기를 거듭한다. 갈색에서 녹색과 분홍과 노랑, 혹은 흰색으로 물들이기도 하고 메마르고 삭막한가 하면 풍성하고 눅눅하기도 하다. 그것은 단일한 얼굴을 지니지 않고 도저히 표현될 수 없는, 재현될 수 없는 다채로운 상황을 안겨줄 뿐이다. 그러니 도저히 저 산이 어떤 모습이라고 제한된 말로 규정할 수 없다. 그것은 그저 사라질 뿐이다. 사진은 사라지는 모습을 안타깝게 저장해둘 뿐이다. 이현권은 그렇게 사라지는 자연의 모습을 매일 찍어 두었다. 그 시간이 일 년을 훌쩍 넘겼다. 사계절이 지났고 다양한 기후의 지나감이 있었다. 고정되어 있거나 죽어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고 미친 듯이 지나가버리는 것이 시간이다. 누구도 결코 그 시간을 멈추거나 고정시킬 수 없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힘과 속도를 보여주는 것은 저 시간이 아닐까? 작가가 보여주는 시간은 걷잡을 수없이 빠르게 지나는 시간이 아니라 '쌓이는 시간'에 가깝다. 여러 시간대가 쌓이고 누적되어 두께를 지닌 것을 보여주는데 여기서 과거의 실체는 이미 존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분명 흔적으로 남아 이전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그 풍경은 망각되어가는 중이다. 잊혀져 가는 도정에 살아남아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얼굴이다. 작가는 과거를 회상하는 현재를 보여주고 동시에 그 현재가 어느새 과거가 되어버리는 시간, 그러니까 언제나 현재이며 그 현재는 또 언제나 과거로 쌓이는 '시간'이라는 것의 아이러니를 문제 삼고 있다.
그렇게 찍힌 수 백장의 사진을 한 자리에 놓고 보니 동일한 풍경이지만 조금씩 다른 모습, 차이를 보여준다. 시간의 흐름과 계절의 변모가 풍경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은 시간 속에서 변화를 거듭한다. 자연은 부동의 것으로 죽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생생불식'하는 존재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지속적인 변화를 거듭하고 생성과 소멸, 나타남과 사라짐을 반복한다.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은 죽은 이를 애도하고 자신도 이내 사라질 것임을 쓸쓸하게 지켜본다. 시간 속에 이내 사라져버리는 저 풍경을 본다는 것, 촬영한다는 것은 어쩌면 애도의 시간을 갖는 일이다. 인간 존재 자체가 근본적으로 떨쳐낼 수 없는 비극적 조건 속에 놓여있다. 그 안에서 예술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애도 '하는 것이다. 애도란 타자의 상실을 지속적으로 슬퍼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애도가 가능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과거를 기억하되, 더 이상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애도는 상실을 인정하는 일이다. 프로이트는 '상실된 대상에 대한 집착'을 우울이라고 설명한다. 우울은 사랑하던 대상의 상실이 마치 자기 자신의 상실인 양 착각하게 되는 심리현상이다. 프로이트에게 애도 작업은 상실의 사랑으로부터 새로운 사랑으로 건너가는 정상적이고 건강한 리비도의 경제학이다. 반면 멜랑콜리는 프로이트에게서는 병리적이다. 멜랑콜리는 상실의 상처를 인정하고 껴안기를 거부하면서 오히려 그 상처를 떠나지 못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 상처에의 집착은 상실의 대상에 대한 애통이 아니라 상처를 당한 자기 자신에 대한 거부, 상처를 받아서는 안 되는 자기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에 대한 비난이며 고발이다. 다시 말해 멜랑콜리는 상처 받은 자기, 상처 받아서는 안 되는 자기, 상처 받을 수 없는 자기에게 집착하면서 다른 사랑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자기 안에 고여 있는 리비도 현상이다. 프로이트는 이 정체 상태의 리비도를 비경제적인, 그래서 병리적인 나르시시즘으로 규정한다. 이처럼 애도와 멜랑콜리는 서로 양립적 이기는 해도 하나의 원칙에서 만난다. 그건 바로 상실된 대상의 '대체'다. 애도는 다른 사랑의 대상으로, 멜랑콜리는 자기 자신으로 상실된 사랑의 대상을 대체한다. 이처럼 애도와 멜랑콜리는 다 같이 교환의 경제학을 따르는 슬픔의 작업인 것이다. ● 나는 이현권의 이 풍경사진을 보면서 더없이 흥미로웠지만 동시에 쓸쓸하고 우울한 정서를 느꼈다. 애도와 멜랑콜리가 뒤섞여 있는 듯 했다. 무엇보다도 작가는 덧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 잠시 몸을 내밀고 사라지는 자연의 소멸을 '반복해서' 애도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산과 나무, 풀의 사라짐 뿐만이 아니라 저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자의 상실, 소멸이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종국에는 다 사라져버린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현재 자신의 유한한 생애와 덧없는 풍경과 사물을 주의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이의 시선이 묻어나는 사진이다. ■ 박영택
Vol.20130220g | 이현권展 / LEEHYUNKWON / 李賢權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