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3_0213_수요일_05:3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하나로갤러리 HANARO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 5길 25(인사동 194-4번지) B1 Tel. +82.2.720.4646 hanarogallery.com
두번째 연어 가족 초대전을 기획하면서 ... ● 세월의 흐름속에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자연의 순리요, 일상의 법칙이다. 따라서 70년이라는 긴 연륜은 한 인간에게 있어서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닌 것 같다. 작가는 시대에 따라 삶의 여정을 작품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순간 순간의 작업과정을 되돌아 보며, 더 나아가 순수예술의 정점을 향해 격물치지(格物致知)하는 마음으로 살아온 지난 날을 반추(反芻)해 보는 것은 매우 소중한 추억으로 남겨진다. 필자가 1944년 초 일제(日帝) 강점기에 태어나 2013년 까지의 삶의 긴 여정(旅程)속에서 작품세계의 변신추구(變身追求) 되어진 시대적 특징을 회고해 보면 자신의 작품 성향에 대해 스스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게 된다. 이번 필자의 고희(古稀)를 맞아『연어가족 초대전』을 기획하여 추진해 준 하나로 갤러리 정성태 관장님께 본 지면을 통해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한다.
필자는 슬하에 딸 하나, 아들 둘을 두고 있다. 딸 선정화(宣姃和, 1973년생)는 어린시절에 필자의 의견을 겸손하게 받아들여 숙명여자대학교 미대 회화과에서 한국화를 전공하여 작품활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나 4년전 미국 이민(移民) 이후 자녀 셋을 키우느라 요즈음은 작품활동을 잠시 쉬고 있다. 앞으로 우리 딸이 타고난 재능과 기질이 재충전되어 새로운 형상성의 작품세계가 극명(克明)하게 발현되어 지리라 확신한다. 또한 평소의 일상 생활 속에서 자란 성장과정을 성찰해 보면 작업과정에서 항상 참신한 아이디어(idea)가 뛰어나고 성격이 명랑 쾌활하여 항상 누나로서의 남동생들 앞에서 솔선수범했던 모습이 주마가등(走馬街燈)처럼 떠오른다. ● 사위 유시욱(劉時旭, 1967년생) 역시 서울 경신 고교때 부터 미술부 활동을 하면서 두각을 나타내 홍익대학교 미대 동양화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작품활동을 왕성하게 펼쳐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일곱번에 걸쳐 등용문을 통과하는 등 중견작가로서 국·내외전을 초대받아「외곽지대」라는 작업을 새로운 형상성의 조형언어와 조형어법으로 창출시킨 역량있는 작가로 평가된다. 뒤늦게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을 수료한 후, 작가활동을 왕성하게 하다가 미국으로 먼저 이민을 간 친척들의 권유로 초청을 받아 현재는 이민생활의 기반을 다져가면서 작가 활동의 연계성이 이어지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은 매우 기쁘고 필자에게 주어진 흐믓한 큰 선물로 받아들여진다. ● 큰 외손녀인 유휘아(劉徽娥, 1997년생)는 2008년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2009년 미국 L.A에 소재한 Lupin Hill 초등학교를 졸업, 2012년 A.E. wright중학교를 졸업하여 현재는 Agoura 고등학교 1학년에 있는 장학생으로 특히 언어구사 능력이 뛰어나며 교우관계가 매우 좋다고 기억된다. 또한 기발한 아이디어와 탐구정신이 강해 항상 리더의 자리에 서서 모범적으로 학교활동을 하고 있다. ● 둘째 외손녀인 유채린(劉綵麟, 1999년생)은 큰 손녀와 같은 Lupin Hill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현재는 lindero canyon 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다. 요즘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천부적 재능이 뛰어남을 인정받고 있으며, 착한 인성으로 따뜻한 가족적인 분위기를 유도하여 가족들에게 많은 웃음을 선사하고 있다. ● 막내 외손녀인 유라임(劉라임, 2010년생)은 미국 캘리포니아 L.A 출생으로 위의 딸과 사위, 그리고 두 언니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다. 듣기로는 성격이 엄마, 아빠를 닮아 강단이 있고 하고자 하는 목적의식이 뚜렷하여 놀잇감을 통한 성취감이 매우 강하다고 한다. ● 큰 아들 선호준(宣鎬準, 1974년생)은 필자의 체질과 재능이 연계되어진 면과 어릴적에 보고 느낀 미적체험(美的體驗), 그리고 주변환경에 의해 자연스럽게 순수 회화의 길을 걷게 된다. 필자로서는 한때 디자인(design)방면으로 진로를 권했으나 큰 아들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능력과 소신으로 순수미술의 주류인 서울대학교 미대 동양화과를 졸업한 후 4년 반 동안 조교(助敎)생활을 하면서 일관성있게 작품활동과 더불어 석사과정을 마친 후, 박사과정을 수료하여 현재로서는 모교인 서울대학교와 그리고 중앙대, 대진대등에 출강하며 오직 작품제작에 매두몰신(埋頭沒身)하고 있어 작가로서의 장래가 촉망된다. ● 며느리 장현지(張炫智, 1979년생)도 중,고교 재학시절에 뛰어난 재원(才媛)으로 인정받아 서울대 미대 동양화과와 동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하였으며, 같은 전공의 박사 과정을 수료한 후, 한 가정의 아내로서, 한자녀의 엄마로서, 또한 여류작가로서 작품 활동을 열정적으로 전개하고 있음은 연어가족의 일원으로서 매우 고무적이고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는 성신여자 대학교 동양화과에 출강하여 투철한 작가정신과 작가의식으로 후진교육을 위해 정진하고 있음을 인지하게 된다. ● 친손녀 선재인(宣才仁, 2010년생)은 연어가족의 일원으로서 낙서의 시기(scribble age)인 순진무구(純眞無垢)한 유아(幼兒)의 진솔한 무의식세계와 자아(自我)의 꿈이 싹트기 시작하는 해맑은 이상세계(理想世界)가 여과없이 자연스럽게 펼쳐져 있어 행복한 가정에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 넣고 있는 귀염둥이 이다. ● 막내인 둘째아들 선호제(宣鎬齊. 1979년생)는 자기위에 누나와 형이 모두 순수미술을 택해 연어가족으로서 일가(一家)를 이룬것에 만족해 하면서 자기 자신은 같은 예술이면서도 지향하는 목표인 성우(聲優)활동을 하면서, 뚜렷한 비젼(vision)과 야망의 이정표(里程標)를 제시하고 있다. 동국대학교 예대 연극 영화과를 졸업한 후 계속 연기(演技)활동을 추구하면서 고심끝에 찾아낸 형이상학적인 가치설정의 방향이 바로 자기 목소리의 톤(tone)임을 스스로 자각(自覺)하여 전문가들의 철저한 검증(檢證)을 통해 신진 성우로서 5년째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전에는 CJ E&M 투니버스 전속성우로 근무했으나 지금은 방송 3사 및 그외 언론 방송사에 프리랜서(freerancer), 에니메이션 및 외화 더빙(dubbing)에서 이시대가 요구하는 전형적인 CF의 세계를 섭렵하기 위해 뉴 프런티어(new frontir)정신으로 연출하고 있음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으로 받아들여 진다. ● 위와 같은 우리 연어가족의 최근 상황을 요약, 정리 하면서 앞으로의 작품세계 화두(話頭)인「자연율+작품소재」의 시리즈(series)를 지속적으로 천착(穿鑿)시키기 위해 고희를 맞은 필자의 새로운 각오와 다짐을 해 본다. 작품전개는 시대성의 발현(發顯)임을 각인(刻印)시킬 수 있는 소재를 취사선택(取捨選擇)하여 작품 제작 과정부터 작업이 마무리 되기 까지 본인의 창의적인 새로운 실험, 시도를 통해 현대적 미감(美感)의 요체미(要諦美)가 내재된 작업을 명징(明徵)하게 전개시켜 제시한다. 일관성(一貫性) 있고 밀도(密度) 있는 작품제작을 위해 남은 여생(餘生)동안 최대한 시간을 투자하여 고부가 가치를 지닌 새로운 형상성의 조형언어와 조형어법을 창출한다. 연어가족 일가(一家)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구성원의 적극적인 참여의식 고취 및 저마다 지닌 한국화의 독자적인 고유성, 내용성, 작품성, 예술성의 참신(斬新)한 모티브(motive)를 도출하여 나타내는 조형적 숭고미(崇高美)의 메시지(message)와 미래지향적인 한국화의 뚜렷한 방향설정을 위해 철저한 계획과 목표를 세워 매진(邁進)한다. ■ 선학균
宣學均의 빗방울 화두법(話頭法) ● 서양화는 캔버스(canvas)위의 대상(對象)의 세계를 충실히 재창조하였으나 동양화에서는 원칙적으로 자연을 실감있게 모방하는 일은 유치하고 어리석은 일로 여겨져 왔다. 동양화가들은 자연을 명상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미(美)의 형식을 찾아내는데 그 목표를 두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는 일은 관찰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찰(省察)할 수 있는 능력을 연마하거나 가르침을 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이다. 중국의 저명한 화가들이 자연을 그리는 방식을 보면 그들은 먼저 선인(先人)들의 그림을 열심히 감상하고 나서 실제로 여기저기 산수(山水)를 관찰하며 나름대로 자연을 보는 눈을 기른다.
따라서 그들이 그림을 그릴때는 그리고자하는 대상의 자연(自然)을 실제로 앞에다 놓고서가 아니라 실은 그가 보았던 많은 자연을 머리속에 명상하면서 그려 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말은 자연이나 인생이 언제나 같은 모양으로 그 앞에 꼼짝않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무상(無常)의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서양화는 자연을 정지된 물상(物象)으로 이해하려는 입장을 취하고 동양화에서는 자연을 부단히 움직이는 시간으로 이해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동서양을 이분법적(二分法的)으로 구분하는 일은 오늘날에는 거의 무의미해 졌지만 알게 모르게 오랜 세월동안 동양적인 것에 길들여져온 우리로서는 아직도 이런 시각은 유용한것이라고 말해도 될것 같다.
宣學均의 작품세계를 분석해보면 이런 주장이 얼마나 확실한 근거가 있는지를 알게 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가 그림을 그릴때 두뇌가 그의 손을 움직여 그림을 그린다기 보다는 그의 몸속에 잠재해 있는 동양정신이라는 디엔에이(DNA)인자가 손가락을 움직여 그림을 그리게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의 짧은 글 아포리즘(Aphorism)이지만 그는 스스로 이렇게 암시한다. '비가 오는 날이면 왜 그런지 마음이 흔들린다. 그리고 마냥 어떤 대상의 형태에서 요체(要諦)를 찾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차창(車窓)에 부딪치는 물방울은 하나의 개체로서 생명감을 잉태하고 있다. 그리고 그 뒤에 보여지는 풍광이나 자연현상들은 물방울과 접목되어 물질이 지닌 본성과 대자연속에서 찾고자하는 주제에 대한 심상(心象 :image)을 떠오르게 한다.' 이 아포리즘(Aphorism)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기본 열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우리는 이 열쇠를 통해서 그가 얼마나 동양적인 신비주의에 심취해 있는가를 확인하게 된다. 비 오는 날에 사물의 요체를 찾고 싶은 충동, 그리고 빗방울속에서 생명을 보며, 그 환상의 눈은 확대되어 대상의 저편으로 확대되어 미명(未明)속에 펼쳐진 인간세계에 다다르기도 한다. 그것은 명상가들이 발휘하는 투시력의 한 기능과 다를바 없으며 하나가 여럿이고 여럿이 곧 하나 (一卽多)라는 불교사상의 표현과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점에 유의하게 되면 우리는 宣學均이 그의 캔버스에서 무엇을 그리려고 하는지를 알게 된다. 그는 세상(자연)이 무수한 점(点)과 선(線)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삶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점(点)으로 존재하는 것들과 선(線)으로 존재하는 것들이 뒤엉킨 시끌뻑쩍한 구경꺼리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점(点)은 생명의 태어남이고 선(線)은 생명의 활동과 죽음을 뜻한다면 그의 그림에서 세상은 부단히 살고자하는 의지와 죽고자하는 의지가 서로 합창하듯이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宣學均은 이 점(点)과 선(線)의 합창을 '자연율(自然律)'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의 모든 작품에 '자연율(自然律)'혹은 '율(律)'이라는 명제가 붙는 것은 그가 이점에 분명한 확신을 갖고 있음을 알게 한다.
또 점(点)은 그에게 있어서 색채(色彩)이고 선(線)은 묵(墨)이기도 한다. 따라서 점(点)은 화가의 눈이기도 하고 선(線)은 그 눈에 비쳐지는 타자(他者)이기도 한 것이다. 그의 그림에는 이 두개의 조형언어가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물방울로 보이는 점(点)의 세계는 그것이 차창에 뿌려진 빗방울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그것은 불안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잠시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생명의 원자(原子)인 것이다. 이 원자의 모습은 마치 불화(佛畵)의 만다라(mandala:기하학적 도형으로 神像 또는 神의 속성이 그려져 있음)에서 보여지는 작은 불상의 모습처럼 그려지는 이유도 그렇게 설명되어지는 것이다. 물론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구경꺼리 세상은 어촌, 포구, 장터, 달동네와 같이 그의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현장(現場)이 주류를 이루지만, 그 못지않게 민화(民畵)적인 소재등도 즐겨 다루어 진다. ● 소재의 두 가지 경향은 주로 점(点)과 선(線)이 어떻게 율(律)을 형성하는가에 달려있는데. 즐거운 구경꺼리는 점이 많아지는 세상이고 울쩍한 구경거리는 선이 많아지는 세상이기도 하다. 그에게 있어서 점(点)은 색의 세계이고 선(線)은 먹(어둠)의 세계이므로, 그의 그림에서 이 두가지 요소의 배합은 전적으로 자연을 보는 그의 독자적인 기준(基準)에서 이루어진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점(点)이 많아지는 그림도 있고, 반대로 선(線)이 많아지는 그림도 있다. 또 점(点)이 커지는 때도 있고, 작아지는 때도 있다. 대체로 희게 그려지는 방울점들은 크게 그려질수록 검은 머리를 가진 가부좌한 작은 불상처럼 보인다. 물론 이런 지적은 화가의 진의(眞意)와는 관계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무수한 물방울속에서 생명을 보았을지 모르지만, 결국 그 신비안은 불교나, 현대 원자물리학의 이론과도 다를바 없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 물론 宣學均은 물리학자도 아니고 종교학자도 아니며, 그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일 뿐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점(点)은 빗방울이고 그 빗방울은 그가 비오는 날 허젓한 마음으로 차창이나 창밖을 내다볼 때, 만나는 지극히 심정적(心情的)인 정황을 반영하는 상징일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양면성(兩面性)때문에 그의 작품세계는 현대에 살면서도 서양화적이지 않고, 어디까지나 명상적인 것에서 그 활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 나는 그가 먹(墨)과의 싸움이나, 색채와의 싸움을 통해 동양회화를 현대적으로 발전시키려는 조형주의(造形主義) 노선보다는 동양정신을 설화적(說話的)으로 재해석하며 나름의 화두(話頭)를 던지고 있는데 주목하고자 한다. 그것은 분명히 한국화(韓國畵)가 안고 있는 난국의 한 타개책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 박용숙
作品斷想 ● 대관령(大關嶺) 고개 아흔아홉 굽이 고개길을 넘으면서 고속버스 차창을 통해 보여지는 천태만상(千態萬象)의 모습은 항상 나에게 새로운 영감(靈感)을 불러 일으켜 준다. 이름모를 산과 바위, 나무와 숲 등으로 짜여진 긴밀한 구조속에 밀도있게 결집된 형태가 나를 작은 상상(想像)의 무한 공간으로 이끌어 준다. 걸음걸이 한 발자국 옮길때 마다, 고개의 각도를 달리할때마다 그 외형과 절대형상의 그림자가 유영(游泳)하듯이 돌출되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순간이 더욱 나를 매혹시킨다. ● 그러면서도 나의 화면에는 의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가 파노라마(panorama)처럼 연계되는 형상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보여지는 형태의 외형과 외형사이, 가까운 산과 먼산의 원근감(遠近感)에서 생겨지는 실루엣(silhouette)이 나누어진 두 세계를 자연스럽게 연계시켜 준다. ● 겉보기엔 작은 반점(斑點)들의 자국들이 무한한 생명력을 일으켜 주고, 또한 긴 역사속의 침묵으로 일관되어 온 필자의 마음이 하나의 선(線)속에 끊이지 않게 연결되기도 하고, 평행선으로 교차되기도 하여 모든 상념(想念)들을 가득차게 하는 화면(畵面)으로 유도(誘導)한다. ■ 선학균
Vol.20130213g | 연어가족 초대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