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숙展 / PARKEUNSOOK / 朴銀淑 / painting   2013_0210 ▶ 2013_0404

박은숙_Origin Pray Ⅲ_90×90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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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우모하갤러리 UMOHA GALLERY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서천동 281-2번지 명선교회 Tel. +82.31.202.0061 www.myungsun.or.kr

박은숙 , 별빛의 장막 아래에서 ●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으면 침묵하라는 말이 있다. 박은숙의 그림이 그러하다. 깊이를 잴 수도 넓이를 측정할 수도 없는 하늘을 보면 말 문이 막힌다. 가만히 보고 있자면 그 속으로 저절로 빨려 들어 갈 것만 같다. 그러나 그러한 유혹은 끝을 알 수 없기에 두렵고 떨리는 것이기도 하다. 어마어마하다는 것은 웅대함에서 오는 경이로움 만치 두려움을 수반하기도 하다. 그림 속으로 좀 들어가 보자. 화면에는 별 들이 마치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이 창공을 수놓는다. 그곳에 무수한 별들은 영롱한 광채로 서로를 향해 눈인사를 나눈다. 그의 그림은 볼수록 황홀한 광경에 마음을 빼앗길 뿐만 아니라 유한한 지상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정지되어 있는 것 같지만 어디론가 흘러가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 같지만 두 눈으로 다 담아낼 수 없는 웅대함이 보는 사람을 숙연하게 만든다. 칼빈이 말했던, '창조의 계시는 신학의 알파벳'이라는 말처럼 하느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느끼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그런 창공이다. 그렇게 박은숙은 광대하고 무수한 별들을 그 끝을 알 수 없는 그 세계, 차라리 그가 담아낸 것은 '별' 이라기보다 '무한' 과 '영원'이 아닌가 싶다. 진화론자들은 이 같은 아름다움을 '우연한 빅뱅'의 결과로 설명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완벽한 솜씨 및 마스터플랜으로 지어진 창조물이다.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우주는 더욱 광대하고 오묘하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너머의 것까지 하나님의 빛나는 창조물임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저 그분 앞에 겸손해 질 수 밖에 없다. 시편 기자의 말처럼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 하니이다."(시104:24) 작가는 작품을 하기 전에 이런 시편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의 그림은 별빛 아래의 잠잠함처럼 정적에 휩싸여 있다. 후딱 지나치면서 보는 그림이 아니라 찬찬히 곱씹으면서 보는 그림이랄 수 있다. 분주함 속에 엉클어진 생각들, 팍팍한 삶을 피해 '고요의 장막'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힘을 지녔다. 여기서 잠깐 '사유'에 대해 언급해 보면, 학교(School)라는 말은 원래 '자유로운 시간'을 의미하는 스콜라(Schola)라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학교는 바쁜 일과를 멈추고 삶의 신비를 관상할 만한 어느 정도의 공간을 확보해준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학교와는 많이 동떨어져 있지만 말이다.

박은숙_근원-Praise_130.3×162cm_2011

그렇다면 예술은 어떨까. 그림은 원래 정관적인 눈으로 보라고 그려진 것인데 '학교' 처럼 그 의미가 퇴색해버린 것은 아닐까. 어쩌면 삶의 신비를 느낄 여유가 없기에 예술도 삶을 닮아가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삶의 깊이를 통찰하지 못하는 예술이란 얼마나 허무한 것이다. 나침반 없이 항해를 하는 것을 생각 할 수 없듯이 인간 내면의 좌표가 없는 예술은 생각할 수 조차 없다. 좋은 예술이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들을 앞당겨 표현해 준다. 그리하여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것들을 정관하도록 도와주면서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 왜 실재의 우주를 경험할 때와는 달이 유독 그림을 볼 때 사물의 정관이 강조되는 걸까. 의도적으로 대상세계를 집약해서 일까. 그것은 그의 그림이 '은유'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는 데서 구할 수 있으리라 본다. 그의 그림의 화면 하단으로 다시 눈을 돌려보자. 하단에는 삼각형 형태가 무리 지어 잇다. 그것들의 꼭지점은 모두 하늘을 향하고 있으며 마치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는 것을 연상시킨다. 그것들은 산자락 멀리로 끝 간데 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무리 지어 어울린다는 것은 조화와 상호의존으로 묶여 있다는 것을 뜻하며, 한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는 것은 서로 동일한 마음과 염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그의 그림에서 세모꼴은 각도가 다 다르지만 똑같이 하늘을 응시하고 있다. 이것이 뜻하는 내용은 무엇일까. 여기에 그의 그림을 해석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있다. 즉 세모꼴과 꼭지점, 그리고 그 위의 창공을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나타내주고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의 창조론적 지평 위에서 지상과 우주를 인식한다는 뜻이 된다. 사실 현대 미술에서 이런 시각은 아주 예외적이다. 현대미술에서 종전과 같은 풍경 개념은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으며, 좀 더 심층적으로 보면 신적 피조물로서 이해해온 자연에 대한 인식이 그만큼 약화되었다. 그러나 박은숙의 그림에선 여전히 자연세계는 아름답고 신비하게 그려진다. 창공은 희망과 영원의 상징으로 제시되고 있고, 하나님이 태초에 창조하신 작품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세모꼴과 꼭지점은 제작기 다른 모습을 지녔지만 '하늘'이라는 한 지점을 그리워하는 표시가 아닌가 싶다. 따가 되면 어김없이 희망이 찾아오듯 인생에도 고요한 달빛에 잠긴 밤, 즉 소망스런 순간이 찾아오는 그런 상황을 연출한 것으로 읽힌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화면 하단의 세모는 꽃술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꽃술은 자연과 입맞추는 입술이자 생명을 잉태하는 기관을 가리킨다. 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이 바로 꽃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그림에서 '꽃술'은 '영원한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을, 그리고 그들의 '갈망'과 '그리움'을 나타낸다. 정리하면 하늘과 입맞추기를 기다리는 것을 꽃술에 비유한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그런 측면은 세모의 형태에 잘 나타나 있다. 세모를 들여다보면, 고개를 쭉 빼고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형국이다. 형형색색의 표정에 그들의 들뜬 기색이 담겨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즉 도형을 의인화하여 그림의 요소로 최적화하고 있다는 말이다. 하늘은 찬란한 별빛으로 그들의 갈망과 그리움이 화답한다. 별빛은 흡사 밤하늘을 밝히는 폭주처럼 창공을 형형색색으로 수놓는다. 반작이는 별빛은 한 순간에 꺼지고 마는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의 문서에 찍힌 조장과 같이 변함이 없다. 마음속의 별은 '사랑'과 '희망'의 이름이기도 한다. 요컨대 그의 작품은 한편으로는 우주의 신비스런 자락을 드러냄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의 내면, 즉 삼각형을 통해서는 영원한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들을, 하늘을 통해서는 이들의 기도를 별빛으로 화답하는 광경을 그려내고 있다.

박은숙_근원-빛으로(환희)_45.5×53cm_2012

박은숙의 그림은 관찰에 의한 묘사나 실경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실제의 자연에다 자신의 바람을 담은 '심상 풍경화'라고 볼 수 있다. 한 것이 아니므로 자세한 묘사 대신 꿈결 속의 영상같이 처리되어 있다. 순도 높은 색깔로 채색된 바탕에 아련한 이미지를 실어냈다. 특히 화면은 수채화처럼 투명하고 은근함이 물결치며 흘러간다. 오랜 시간을 수채화로 단련되어 수채화 특유의 물감 덧칠, 번지기, 농담기법을 능숙하게 구사하고 잇다. 전체적으로 차분한 톤이 유기되는 것도 재료의 숙련된 처리와 연관되어 있는 듯하다. 근작에서는 드문드문 집 모양을 넣어 웅대한 하늘을 지붕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의 화면에는 물방울 형태의 점들이 촘촘히 들어서 있다. 그것은 어둠 속을 밝히는 빛이고 희망이다. 홀로 아름다움을 뽐내기보다 다른 것을 조명하기에 별빛이 더욱 아름답다. 그 빛을 맞이하는 사람들 역시 행복하기 그지없다. 멀리 잇는 별빛이 내 안의 별이 되는 순간 커다란 존재의 지각변화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의 그림은 단순한 충경의 기록이라기 보다는 한편의 시요, 묵상에 가깝다. 풍경은 육안으로 보는 데에 반해 묵상은 마음으로 대상을 본다. 광활한 피조세계의 '경탄' 못지않게 다가올 세계에 대한 '기대'와 '갈망'이 두드러진 것은 마음의 움직임이 그만큼 활발하다는 표시이다. 땅을 깊이 파야 물을 얻을 수 있듯이 이처럼 기독교의 영성에서 그의 회화가 올라오고 있음을 보면서 우리는 작가의 내면적 심도를 어렵지 않게 짐작하게 된다. ■ 서성록

* 월간 창조문예 2012.6

Vol.20130210a | 박은숙展 / PARKEUNSOOK / 朴銀淑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