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사 2 레드카펫

송용민展 / SONGYONGMIN / 宋容旻 / painting   2012_1219 ▶ 2012_1225

송용민_종이에 아크릴채색, 연필_206×183cm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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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1219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서울아트센터 공평갤러리 GONGPYEONG ARTCENTER GONGPYEONG GALLERY 서울 종로구 공평동 5-1번지 공평빌딩 1층 Tel. +82.2.3210.0071 www.seoulartcenter.or.kr

긍지와 기쁨의 여정 - 송용민의 초상화와 초상 그물의 실체문학(예술)의 힘은 노동과 자기와의 부단한 투쟁을 통하여 솟구치는 것이기도 한데 문학(예술)은 이를테면 민중의 생활과 직결된 것이지요. 그리고 대지에서 흙에서 발바닥을 뗀 문학(예술)은 힘이 없습니다. 아무리 힘센 거인이라도 땅에서 발이 떨어졌을 땐 힘없이 넘어지게 마련입니다. (시인 김남주)금빛은빛의 초상 그물 2010년 12월 송용민은 『"전쟁, 빈곤, 정치 탄압과 권력남용으로부터 해방" : 두환 님』전을 나무화랑에서 개최했다. 1979년 12․12군사쿠데타이후 30여년이 지났으나 전두환의 얼굴은 캔버스에서 활활 거렸다. 1980년 참혹한 광주 5․18학살의 주범이었던 전두환은 그 해 9월 1일 체육관 선거에서 100%의 찬성으로 대통령이 되었고, 취임선서에서는 "교육혁신과 문화창달로 국민정신 '개조'"를 다짐했다. 텔레비전은 그런 그를 하늘이 내린 대통령이라 추켜세웠다. 그가 해외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면 "오랜 가뭄 끝에 이 강토에 단비를 내리게 하고 떠나시더니 남국의 화사한 햇빛을 안고 귀국하셨"다고 찬양했고, "위대한 영도자 밑에서 위대한 국민이 된 긍지와 기쁨을 갖게 해주신 위대한 여정이었"다고 목 놓았다. 그리고 그 아첨의 영상들은 그에게 상납되었다. ● 2007년 6월, KBS 「미디어포커스」는 6월 민주항쟁 20주년을 맞아 전두환 정권의 우상화에 동원된 방송의 역사를 되짚은 바 있다. 1편에서는 "각하, 만수무강하십시오!"를 2편에서는 "하늘이 내리신 대통령"을 생생하게 타전했다. 거기에는 '보안사 송년파티', 'MBC의 보안사 위문공연', '1980년 보안사 위로파티', '대장 진급 기념축하연', '각하 51회 생신 비디오', '전두환 자녀 결혼식', '국운개척의 영도자'의 영상들이 들어있었다. 기록들 중에는 전두환이 "(정승화) 참모총장 측에서 반란을 획책하여 나를 지지하는 정의로운 지휘관들과 함께 반란을 진압했다."며 자신의 쿠데타를 '정의로운 반란 진압'으로 정당화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그랬다. 그 모든 것들의 기록은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이었다. 언론은 언론의 기능을 상실 당했고, 국민은 그런 언론의 상실 속에서 '장군님의 일상'에 일희일비했다.

송용민_종이에 아크릴채색, 연필_206×183cm_2012

송용민은 30여년이 지난 뒤에도 '위대한 영도자론'에 집착하는 우리의 자화상을 전두환의 얼굴에 투영시켰다.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시며 불멸의 영도자 전두환 장군"의 얼굴에 갇힌 우리 욕망의 실체를! MB정권의 탄생과 몰락은 그래서 어쩌면 전두환식 영도자론에 기대야 했던 우리 스스로의 몰락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리는 후회할 틈도 없이 6․10민주항쟁의 광화문 투쟁을 자주 MB정권에서 재현해야 했다. 공수부대로 민중을 학살한 5공이나 쌍용자동차와 용산에서 토끼몰이로 노동자를 죽인 MB나 다를 것은 하나 없었으니까. 위대한 영도자들께서는 위대한 학살과 살인으로 이 땅의 위대한 빛이 되시기를 바라셨으나 추락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 송용민이 그린 '두환 님'의 얼굴에는 양면성으로 희번덕거린다. 작가는 금빛은빛의 찬란한 색상을 캔버스 바탕에 깐 뒤 '두환 님'의 얼굴을 스케치로 새겨 그렸다. 선을 그어 형상을 직조해 나간 전두환의 얼굴은 찬연한 빛들 사이에서 환하게 타 오른다. 작가는 마치 얼굴의 형상을 세밀하게 붙잡으려는 듯 선의 강약을 조절하며 '두환 님'을 묘사했다. 선들은 그어지고 다시 이어져서 '두환 님'의 위대했던 순간들의 표정과 태도를 까칠하게 포착해 냈다. 전두환의 초상은 그렇게 포착된 어떤 그물의 형상이었다. 송용민은 금빛은빛의 '두환 님' 얼굴을 싸구려 금빛 플라스틱 액자에 담은 뒤 6면 전시리플릿에 실었다. 빛의 그물로 그려진 위대한 영도자는 액자 안에서 기세등등했으나 생각해보면, 초상 그물의 실체는 추악한 자본과 권력으로 썩어서 악취만 풍길 따름이다. 지금도 살아서 자본과 권력의 시종(侍從)으로 살아가는 '학살자' 전두환을 떠 올려보라!

송용민_종이에 아크릴채색, 연필_206×183cm_2012

전태일이 거기 있다! ● 2년이 흘렀다. 그는 불현 듯 작업실에 쌓인 6면 '두환 님' 전시리플릿을 떠올렸다. 쌓여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전두환의 얼굴이 밉상스러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전시기록 아카이브로 쓸 몇 장의 리플릿을 제외하면 불쏘시개 이상의 가치를 갖지 못하는 것들이었을지도 또한 모를 일이다. 그는 그것들을 옆으로 3장 아래로 8장씩 이어 붙였다. 그러자 가로 183cm 세로 207.2cm 크기의 종이가 만들어졌다. 그 큰 종이를 작업실 한 쪽 벽에 걸어 두고 붓으로 하얗게 얼굴 드로잉을 시작했다. 그것은 그가 이제까지는 경험하지 못한 크기의 얼굴이었다. ● 72개의 '두환 님' 얼굴위로 쓱쓱 그려지는 흰 색 선의 얼굴 하나. 그는 얼굴 윤곽이 잡히면 그 위에 노란색으로 바탕을 올렸다. 흰 선과 노란색의 바탕은 마치 대지 위의 길들처럼 서로를 붙잡거나 놓으면서 이어지고 갈라졌다. 가까이에서 노란색은 사람의 피부였고 대지의 피부였다. 그런 다음 그는 다시 하얀 색으로 얼굴형상의 눈 부위를 그렸다. 튜브를 짜서 캔버스에 직접 물감을 쳐 바르는 형식으로 마티에르를 일으켰다. 이 일련의 형상화 과정에서 그는 그가 그려야 하는 인물의 고유한 성질과 정신을 극진하게 사유했다.

송용민_종이에 아크릴채색, 연필_206×183cm_2012

송용민의 이번 작품은 제작 과정 그것만으로도 미학적 개념을 완성시킨다. 우리는 쉽게 2년 전의 전시리플릿을 재활용했다는 식의 '재활용' 코드에 주목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미학적 목적은 그런 식의 재활용에 있는 것이 아니다. 미세한 그물코로 그려진 전두환의 얼굴을 모판삼아 죽은 자의 얼굴을 부활케 한다는 것이 하나의 과정적 단서인데, 금빛은빛으로 화려하기 짝이 없는 리플릿은 전두환이 아니라 그 시대 그 현실의 '역사적 상황'을 역설적으로 상징하는 상징물이고, 그 위에 그려진 주검의 초상들은 바로 그 역사로부터의 아픈 우리들의 초상이라는 점이다. ● 그는 흰 선과 노란 바탕 그리고 흰 물감을 뒤로 한 채 다시 검정색을 엷게 바르면서 얼굴 형상을 지워나간다. '두환 님'의 금빛은빛도 사라지고 흰 선들도 기울고 노란 바탕도 거의 남지 않는다. 거대한 검은 우주가 서서히 대지를 휘감듯 그렇게 화면의 전체를 뒤덮으면서 깊게 내려앉는다. 검고 멀고 그윽한 '현(玄)'의 색채로 얼굴을 가득 메우고 나서야 그는 다시 얼굴의 형상을 떠올린다. 그 회화적 상황을 우리는 역사적 빛을 품고 있는 먹먹한 우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검은 대지, 검은 우주의 지표면에서 얼굴의 형상은 미세하게 윤곽을 드러낸다. 그는 그 윤곽의 실체를 부여잡기 위해 연필 드로잉을 시작한다. 얼굴의 아웃라인을 스케치하고 눈과 코와 입과 귀, 목덜미를 찾아 나선다. 골격의 지세(地勢)를 따라 명암을 채워 우리가 알았던 한 사람의 '닮음'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 즈음에서 손을 놓는다. 거칠게 살아난 윤곽들에서 이미 '그'는 역사의 빛에 살아 난 별처럼 반짝거리니까. ● 전태일이 거기 있다. / 광주 망월동 묘역의 열사들이 거기 있다. / 인혁당 지식인이 거기 있다. / 무명의 분신 노동자가 거기 있다. / 어머니가 거기 있다. / 살아서 노동의 '현재'를 사는 한 여성노동자가 거기 있다.

송용민_종이에 아크릴채색, 연필_206×183cm_2012

이름 있고 이름 없는 ● 그는 광주 망월동의 묘역을 찾아 상석 위의 초상사진과 무덤을 촬영했다. 무덤과 무덤 사이를 걸으면서 그는 30여 년 전에 죽은 영혼들을 생각했다. 어느 날은 한겨레에 실린 세 명의 분신 노동자 사진을 스크랩했다. 이곳저곳에서 그는 1970년대와 80년대의 주검들을 수집한 뒤 작업실 벽에 가지런히 붙여 두었다. 왜 그랬을까? 2011년 4월 27일(수)의 한겨례 기사는 "죽음의 무게는 같건만… 점점 잊혀지는 이름들"이란 제목 하에 "20년전 대투쟁때 스러진 이정순․정상순․윤용하씨 추모하는 이들 점차 줄어"의 기사를 타전하고 있다. 기사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 기억되지 않는 이름은 무참하다. 20년 전 산화한 무명의 이름들은 20년 뒤에도 이름을 얻지 못했다. 1991년 '5월 대투쟁' 때 스러진 11명 가운데 3명은 개별 추모사업회도 없이 쓸쓸한 20주기를 맞고 있다. "바쁘니께 이젠 사람들도 오덜 안 혀. 많이 올 줄 알고 음식 싸갖고 가도 안 오니께." 26일 고령의 아버지는 "앞으론 추모식 따위 안 하겠다"고 했다. 정해남(81)씨의 아들 정상순은 20년 전 5월 25살의 노동자였다. 전남대병원 영안실 위에서 "노태우 물러가라"고 외치며 몸을 던졌다. 지난 세월 아들의 기일은 지역 시민사회단체 사람들이 지켜줬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아들을 기억하는 이들도 줄어갔다. 아버지는 이날 허허롭게 말했다. "누구도 원망 안 혀. 열심히 일해도 배고픈 시상, 열사가 다 뭔 소용이여." 정상순, 윤용하(전남대에서 투신), 이정순(연세대 정문 앞 철교 위에서 분신 뒤 투신). 모두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서 찾을 수 있는 이름이다.

송용민_종이에 아크릴채색, 연필_206×183cm_2012

그랬다. 기억되지 않는 주검은 무참했다. 송용민은 그렇게 무참한 주검의 영혼들을 그리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그 그림들은 흰 종이가 아니라 '두환 님'의 얼굴 위에서 다시 태어나야 했다. 김지하는 그 주검들을 향해 "젊은 벗들! 나는 너스레를 좋아하지 않는다. 잘라 말하겠다. 지금 곧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그리고 그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 당신들은 잘못 들어서고 있다. 그것도 크게!"라며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고 외쳤으나 그 소리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슬픔이 되어 공허하게 메아리칠 뿐 듣는 이 어디에도 없다. 송용민의 회화는 뒤늦게 '죽음의 굿판'에서 피워 올리는 넋의 해원굿일지 모른다. 김지하 글의 말미에 적힌 "영육이 합일된 당신들 자신의 신명, 곧 생명을 공경하며 그 생명의 자연스러운 요구에 따라 끈질기고 슬기로운 창조적인 저항행동"의 다른 해원굿! ● 송용민은 이름 있고 이름 없는 것을 따지 않았다. 유신과 군부독재 권력에 희생당한 주검들의 영혼을 검은 우주의 모판에서 별을 틔우듯 초상을 새겨 넣는 것이 중요했다. 그들의 얼굴을 컴컴한 어둠 속에서 호명하여 실체의 실오라기 하나를 응결함으로써 그들은 다시 싱싱하게 살아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태일이 살아났고 정상순이 살아났으며 윤용하와 이정순이 살아났다. 어머니의 기진한 몸의 기억을 살아났다. 기억의 반대편에서 걸어 나와 현실의 우리에게로 넘어올 때 그들은 여전히 아픈 슬픔의 존재들이겠으나 그런 슬픔의 기억이 다시 우리를 산자답게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들은 '긍지와 기쁨의 여정'이다. 영도자를 따르는 긍지와 기쁨이 아니라 썩은 영도자의 대지위에 핀 송용민의 긍지와 기쁨. ●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 해를 향해 사방팔방으로 팔을 뻗고 있는 저 나무를 보라 / 주름살투성이 얼굴과 / 상처 자국으로 벌집이 된 몸의 이곳저곳을 보라 (김남주의 「고목」중에서)김종길

Vol.20121219e | 송용민展 / SONGYONGMIN / 宋容旻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