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2_1222_토요일_05:00pm
참여작가 / 김태은_지현아_표영실_한지석
공개 비평 워크숍 / 2012_1222_토요일_02:00pm~04:00pm_지중 세미나실 김태은 / 이택광(문화평론가, 경희대 교수) 지현아 / 이관훈(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다방 큐레이터) 표영실 / 고충환(미술평론가) 한지석 / 정현(미술평론가)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주말,공휴일_10:30am~07:3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화이트블럭 Gallery White Block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마을길 72 Tel. +82.31.992.4400 www.whiteblock.org
공생공락의 변 ● 서로 다른 빛깔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도무지 섞이지 않은 색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예민하고 따듯한 치열함, 수줍고 치밀한 성급함, 즐겁고 배려가 넘치는 염세, 내색 않고 명랑한 쓸쓸함. 그들 하나하나의 빛깔은 서로 다른 극단을 차지하고 있어 다르게만 보였다. 그러나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들이 한데 모여 지내며 고유의 빛깔을 섞어내기까지는. 그리고 그 빛깔이 영롱하게 빛나기까지는. ● 어울림이라는 것이 비단 같은 밀도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 적정한 거리만 유지하면 되는 것을 알게 된 게 가장 큰 소득일까? 서로 다른 밀도, 서로 다른 정황, 서로 다른 감성, 서로 다른 주파수. 그런 상이함이 어울림을 더욱 단단히 그리고 아름답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목도할 수 있어 기쁘다고 할까? 아니 가장 소중했던 것은 그들의 지척에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들 사이에 일어난 모든 일을 다 알 수는 없었지만, 문득 곁에서 깨닫는 친밀함과 소소한 웃음들이 좋았다. 덕분에 함께 즐거울 수 있었다. ● 처음에는 인사를 나누고, 이후엔 음식을 나누고, 웃음을 나누고, 아픔을 나누고, 추억을 나누고, 기억을 만들고. 더 많은 것을 나누기 위해 그들은 무엇을 했을까? 그 나눔의 언저리에서 다만 건네고 싶은 것은 끝없는 위로와 격려뿐이다. 어려운 말, 가시 돋은 세상의 모든 소리로부터 헤어나오는 단 하나의 방법. 가능하다면 그런 격려를 주고 받으며 살고 싶다. 그대들과 함께. ■ 조현정
김태은의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소음이다. 일종의 기계의 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기본적으로 기술과 기계의 의미는 대상의 복제를 얼마나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는지 그 여부에 달렸다. 그러나 김태은의 작품에서 기술과 기계는 본연의 기능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생각하면 고장난 기계가 바로 김태은의 작품이다. 욕망하는 기계, 그러나 그 욕망은 언제나 새로운 대상과 결합하면서 전혀 다른 장치들을 만들어낸다. 그의 기계들은 배치를 바꾼 장치들이다. ● 자기반영적 모방기계로서 김태은의 장치들은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갖는다. 이 장치들이 만들어내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소음이다. 기계장치의 규칙성을 빠져나가는 과잉의 증상이 바로 소음이다.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분절되어 있는 소리들. 이 소리들은 규칙적이지만 의미를 전달하지 못한다. 어두컴컴한 공간 안에서 그 소음은 자신을 만들어내는 기계에서 미끄러진다. 투명한 전달의 매체가 만들어내는 소음은 그의 장치들이 무엇인가 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 이택광
지현아의 작업은 불완전한 상황에서 비롯되어 완전한 언어와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것에 의미를 둔다. 현재의 시공간이 다른 공간으로 환원되는 전략을 구상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그에게는 공간이 갖는 형태가 중요하다. 따라서 그는 외부의 모든 것을 잊게 되는 그러한 이상적인 공간으로 자기가 운신할 수 있는 운용의 폭과 환경을 선택하게 된다. 결과적으로는 그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아픈 기억 속의 시간과 공간을 잊을 수 있는 이상향으로 다가가려한다. 그리고 작품 뒤에 숨어 계속 상상되는 아름다운 혼합체를 꿈꾼다. 현실을 도피할 수밖에 없는 운명 속에 갇힌 떠돌이별처럼 그는 현실에서 끝없이 위장한다. 그 웃음으로. ■ 이관훈
표영실의 그림을 보면서 받은 첫인상은 그림 속에 여백이 많고 암시가 풍부하다는 것이었다. 문학에 비유하자면, 적어도 외적으로 보기에 일관되거나 긴밀한 서사로 짜인 소설보다는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린, 그 구멍으로 작가가 제시하거나 미처 제안되지 않은 의미들이 들락거리는, 그리고 그렇게 그 의미들이 최초의 텍스트에 정박되지 않고 부유하면서 텍스트의 원형을 부풀리고 확장시키고 수축시키고 쪼그라들게 만드는 시 같다. 어쩌면 시는 만약 원형 같은 것이 있다면 ● 그 원형(아님 원형에 대한 선입견?)을 해체하고 파괴하고 수선하고 확장하고 변형시키는 기술일지도 모른다. 원형을 단단하게 하기보다는 헐렁하게 만드는 기술일지도 모를 일이다. ■ 고충환
한지석의 그림은 그 무엇도 지시하지 않는다. 동시대 회화 작가가 이미지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이 아니다. 많은 작가들이 현실의 장에서 벗어나 (온전한) 회화의 장으로 들어가 자신만의 세계를 찾으려 하지만 그들의 의지와는 달리 의미만을 재생산하는 경우는 자주 목격된다.(중략)그의 작업을 억지로 해석하려는 것은 부질없는 노력이다. 우리는 예술작품을 통해 전체를, 계보나 시대적 경향에 관한 단서를 통해 이른바 보편적 세계를 인식하려 한다. ● 이와 같은 현대미술에 적용된 이론적 체계가 심화될수록 사실 예술작품은 점점 소외되고 결국 남는 것은 거대한 시대적 이념밖에 없기에 우리는 자신과 함께 하고 있는 작품(이미지와 물질/비물질)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정보와 의미만을 각인할 뿐이다. ■ 정현
Vol.20121215a | 共生共樂 Conviviality-갤러리 화이트블럭 스튜디오 1기 입주작가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