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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1211_화요일_05:00pm
후원 / 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일_02:00pm~07:00pm
사이아트 갤러리 Cyart Gallery 서울 종로구 안국동 63-1번지 Tel. +82.2.3141.8842 cyartgallery.com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 세상은 보는 것인가 보여지는 것인가? 본다는 것은 사물이나 공간을 보는 관찰자가 주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표면이 노정하는 이미지의 겉보기에 해당한다. 그에 반하여 보여진다는 것은 대상이나 제공하는 모습을 내가 분류하고 판단한다는 것에 속한다. 거기에서 대상은 내면의 갖고 있는 본래 모습을 드러내거나 감추는 상태적 이미지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와 감추어진 상태의 진위여부에 상관없이 보는 사람의 경험과 관점에 동반된 추측에 의거한다. 그러므로 현실의 대상에 관계하는 그림은 작가가 본 모습을 자신의 특정한 의도로 바꾸어 감상자에게 보여주는 것이 된다. 여기에서 그림 속의 이미지는 피사체이면서 작가에 의해 주체화된 이중적 면모를 갖는다. 때문에 감상자가 본 것은 가상일 수도 있고 실제의 한 모습일 수도 있다. 이에 대해 피로시카 도시(Piroschca Dossi)는 "예술은 허구와 현실 사이에서 요동한다. 그것은 작업인 동시에 도취이고, 명상이며 각성이다. 그리고 유희와 실존의 진지함을 결합시킨다"라고 말하였다.
진훈은 자신의 그림에 대해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말한, 어떤 대상이나 상태가 개인의 경험과 연결되어 되먹여 자극되고 해석되는 "푼크툼(punctum)"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그의 그림이 사적 시각에 입각하여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객관성보다는 주관성에 몸을 담그고 있으므로 그의 그림은 어떻게 보여지는가가 더 중요하게 된다. 해석의 다양성은 그것 때문에 열려지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읽어내야 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 모호해지기도 한다. 피로시카가 말한 바처럼 지진계와 같이 징후만을 보게 되기도 한다. 때문에 진훈의 그림을 의미 있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끝임 없는 해석과 탐색을 필요로 한다. 그 과정에서 이미지에 얹혀진, 세상에 대한 상념어린 목소리가 독백처럼 살며시 들려오기도 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그의 화면은 감상자를 향한 거친 주장이 아닌 안으로 향하는 명상이며 각성의 양상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화면을 조직하는 구성에서도 드러난다. 대부분의 그림들에서 그는 사선구도를 채택하고 있다. 비스듬한 상태로 대상을 바라보게 하는 화면의 구성은 정적인 대면보다는 동적인 움직임을 파생시킨다. 불안정함을 통해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사선구조는 그의 경우에 심리적 인지의 움직임으로 특성화되어 표면을 지나쳐 내면으로 갈 수 있는 계단을 제공한다. 진훈의 그림에서 사선의 시각은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분석하여 개조하려는 태도보다는 시선의 방기를 내포하면서 초연한 관점을 동반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외연과 내연을 아우르면서 바라보게 한다. 그것을 통해 불안하고 막연한 표정의 내부에 드리워 있는, 소외되고 부조화를 이루는 존재에 대한 그의 사적 공간으로 감상자는 들어가게 된다. 교차하는 사선들이 수직과 공존하는 다면화된 풍경과 같은 그 공간에서 호퍼의 그림에서와 같은 엄정함과 서늘한 냉소가 만연한다. 표현을 통해 그가 사유하는 도시의 편린들은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으로 분열된 채 화면에 떠 있다. 그것들은 자기표현의 발로이기도 하면서 다수의 사람들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어떤 모습을 드러내는 제시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개개의 단초들은 사물의 시각성을 보유하면서도 담론의 성격을 띠며 보여지지 않은 상태로 나아간다.
"껍데기는 가라!" 이미지의 껍데기만이 진실이라는 듯이 그리는 요즈음의 표현경향 속에서 정밀한 수공예의 외관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내면의 모습을 우려내기 위해서 수고스럽게 덧칠하는 것을 통해 자신이 보고 생각한 것을 표현하고 있는 그의 작업태도는 비효율로 비춰질 수 있다. 물감이 스며들고 반발하는 것을 무마하고 조정하기 위해서 어떤 작품은 몇 달이고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면서 물감이 칠해지고 감추어진다. 그렇다고 반복적인 나열이나 정밀한 표현이 아니다. 그저 쉽게 그렸을 듯하게 보일 수도 있는 그의 작업은 수고로움이 예상치를 초과한다. 노력한 공력이 겉에 확 드러나는 경우야 지난한 시간과의 투쟁을 확인받고 인정될 수 있지만 그의 작업은 많은 시간이 투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칠음으로 인해 수공적 장인의 지난함을 지나가는 말이라도 건네받기 힘들다. 하지만 세상의 정당한 모든 노력은 버릴 것이 없다는 누구의 말처럼 그가 켜켜이 바른 물감들은 그의 노력을 외면하지 않는다. 한올 한올에 쌓인 물감들과 붓질들은 제각각의 진동수로 떨리면서 화면의 양상을 복층화시켜 감상의 긴 시간대에 걸쳐 있게 하는 힘을 그의 그림이 갖게 한다.
올곧은 표현을 위한 고민의 과정들을 통해 침잠하면서 겹겹이 쌓인 색들로 이루어진 진훈의 작품은 확인할 수 있는 대상의 모습이 그려져 있어서 추상화된 관념의 세계가 갖고 있는 모호함을 피해가지만 구체적인 현실감에서는 일정부분 유리되어 있다. 그가 사용하는 색채들은 그러한 모습을 강화시킨다. 저채도의 청색과 핑크 색을 포함하는 빨강은 대상들과 공간에 비현실감을 부여한다. 고착되지 않고 부유하는 그 색들은 서로에 대해서도 비타협적인 상태에 놓여짐으로써 화면을 현실과 불화하게 만든다. 그 결과 그의 그림은 무엇인가 불만을 품은 듯 하면서 감상자의 심리공간의 이곳저곳으로 밀려다닌다. 그것은 학습되지 않은 개인의 체험의 사소함을 건드린다. 때문에 감상자는 보여지는 것의 상태를 감지하더라도 단정 지을 수 없는 막연한 장소에 위치하게 된다. 내면에 잠재된 심리를 감춘 채 외연화된 표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인지 아니면 감상자가 본 모습에 부합하는 상태인지 확인할 수 없음으로써 그의 그림 앞에 선다는 것은 상당한 불편함을 야기한다. 그러한 의미의 유동성 속에는 또 다른 모습이 내재해 있다. 그의 그림 어딘가에는 한 구석이 빈 공간이 임의화의 상태로 틈입해 있다. 이미지를 추적하다보면 어느 순간 그의 화면의 시각적 표현들이 휘산되고 격한 공허가 빈 울림으로 스산하게 퍼지는 것을 목도하기도 한다. 그 곳을 채울 대상과 공간은 화면 외부에 불특정하게 도사리고 있다. 그것들은 추정, 대답, 질문으로 이루어진 일련의 상호작용의 힘에 의해 호출된다. 실체적인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도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계속하면 우리의 이해의 손아귀에서 모래처럼 빠져나가 듯,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경직된 관점이 사라진 공백의 개입에 의해 어떤 아집이 대상과 사물을 보는 시각을 점유하고 욕망으로 우리를 와해시키고 있는지 다시금 깨닫게 된다. 화면을 넘어선 소통의 여지가 거기에서 새롭게 파생되어 나오기도 한다. 따라서 그의 그림에 잠재해 있는 그 공허조차도 그의 그림의 중요한 일부를 형성한다. 아울러 그것을 통해 그가 보는 것과 화면에서 보여지는 것을 벌려 놓으면서도 관통하는 하나의 통로가 확보되고 있다.
사소한 풍경을 통해 소소하지만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우리를 둘러싼 일상에 내재한 의미들의 이질적 조우를 노정하면서 그의 그림은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사이에서 왕래하며 요동하고 있다. 무엇인가의 의미를 손에 잡으려하면 바스락거리며 잘게 부수어져 흩날려지게 함으로써 그림을 바라볼 때 소득을 얻으려는 우리의 욕망을 무산시켜 머쓱하게 한다. 또한 부조리한 듯하게 조성된 화면을 통해 이성과 합리라는 외피를 두르고 탐욕스럽게 물질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우리의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이것을 더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공격적이고 적극적으로 표현방법을 통해 자기생각을 들이밀 듯도 한데 그는 저만치 떨어져 초연한 양상으로 조성된, 비껴나가는 이미지들과 색을 통해 우리의 고정화되고 관습화된 생각이 뒤집혀지도록 하려는 약한 힘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작업을 통해 그는 그가 본 도시의 건물과 대상들로 이루어진 저수지를 물수제비를 뜨듯이 때론 촘촘히 때론 듬성듬성 표현하면서 그것이 어떻게 보이는 지를 우리에게 묻고 있다. ■ 이영훈
Vol.20121211a | 진훈展 / JINHUN / 陳勳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