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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1204_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비원 Gallery b'ONE 서울 종로구 화동 127-3번지 Tel. +82.2.732.1273 www.gallerybeone.kr
감각의 시간 - 감촉으로 재구성한 사물 ● 실재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이상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이상하다. (존 B.S 홀데인) ● 눈으로 보고 상상하는 세계는 20세기 초의 유명한 생물학자인 존 B.S 홀데인의 말처럼 본질의 세계와는 다를 수가 있다. 생물학자가 보는 실재는 현대 물리학이 보는 실재의 세계와도 같이 "살바도르 달리의 흐물흐물 늘어진 초현실주의 시계들처럼 아주 유동적인 실재"(메를린 퍼거슨, 뉴에이지 혁명, 정신세계사, 1994, p.216.)와도 같은 것이며, "유기적 에너지의 패턴"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 촉감을 통해 사물의 본질을 재구성하는 것은 신예진의 조각 작업에서 보듯이 낯설고 이질적인 형태를 띤다. 그의 조각 작업은 생물학자의 실험실에 있는 애벌레나 개구리의 표본들을 보는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조각 작업은 실험실의 표본들과 같은 형태를 띠는 것이 아니라 보기엔 약간은 징그럽고, 만지면 흘러내릴 것 같이 흐물흐물 늘어진 애벌레나 개구리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의 조각 작업은 어린 시절에 감촉을 통해 느꼈던 애벌레와 개구리의 형태를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 손으로 만져서 느꼈던 애벌레와 개구리는 과학 책이나 실험실에 있는 표본들을 눈으로 본 형태와는 달리 「낯선 감촉」이나 「생명의 운동들」의 조각의 형태에서 보듯이 만지면 끊임없이 부풀어 오르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석고상과 같이 고정되어 있는 사물이 아니라 인간과 같이 끊임없이 숨을 쉬며, 살아가는 생명으로써 신예진의 조각 작업은 그러한 생명의 움직임을 시각적인 형태로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 「낯선 감촉」은 그의 어린 시절에 개구리를 만지며 느꼈던 감촉을 통해 개구리의 형태를 시각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낯선 감촉」은 어린 시절 끊임없이 만질수록 부풀어 오르는 개구리를 호기심이 나서 끝없이 만져 결국에는 개구리의 몸을 감싸고 있던 외피가 벗겨져 진물이 흘러내리는 감촉의 기억을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감촉의 경험은 시각으로 보고 느끼는 것과는 달리 그에게는 낯선 체험인 것이다. 그러한 낯선 감촉의 경험은 그에게 「전율」의 조각 작업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애벌레를 통해 생명의 또 다른 움직임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감촉의 경험은 「전율」의 작업을 통해 재현하고 있는 애벌레의 모습에서 보듯이 웅크리고 있지만, 만지면 늘어나는 짜릿한 전율의 세계인 것이다. 그 전율은 시각으로 생명을 인식하는 세계가 아니라 감촉을 통해 느끼는 생명의 또 다른 모습인 것이다.
감촉을 통해 느끼는 실재의 세계는 신예진에게 눈으로 지각하여 재구성한 세계와는 다른 것이다. 그러한 실재의 세계는 정적인 세계가 아니라 동적인 세계이며, 고정된 세계가 아니라 서로 간의 접촉에 의해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하는 세계이다. 감촉을 통해 재구성한 실재의 세계는 그에게 있어서 눈으로 보고 지각하는 세계와는 달리 카오스와 같은 미지의 세계이며, 온몸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세계이다. ● 신예진이 어린 시절 감촉을 통해 느낀 실재의 세계는 들뢰즈가 인간의 감각을 통해 곤충-되기와 같은 추체험의 세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두 생명의 흐름이 접촉을 통해 만나는 세계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감촉을 통해 경험한 세계는 프리고진이 말하는 '산일구조' 즉 "물이 소용돌이 속을 지나면서 동시에 소용돌이를 만들어 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에너지가 이동하면서 동시에 산일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다. 모든 생물, 그리고 일부 비생물적 체계들, 예를 들어 일부 화학반응들은 산일 구조이다. 산일 구조는 유동적 전체라고 표현될 수 있다. 그것은 고도로 조직되어 있지만 항상 유동한다."(같은 책, p.208.)라고 말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감촉의 기억들」은 카오스와 같이 무질서하게 있으며, 사물의 덩어리와 같은 형태를 띠고 있다. 그것은 그에게 움직임이 없는 사물과 같이 느껴지던 것들이 감촉을 통해 경험하는 순간 생명과 같이 살아나는 기억의 이미지들을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더 세밀하게 기억을 더듬어 거슬러 오르면 그 덩어리들은 그의 어린 시절 땅거미가 질 무렵 움직이지 않는 사물들이 그의 감촉을 통해 하나씩 꿈틀거리며 튀어나올 것 같은 순간들을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실재는 「감촉의 기억들」의 개구리들이 뭉쳐져 있는 형태들과 같이 움직임이 없는 사물로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만지면 꿈틀거리며, 튀어나올 것 같은 미지의 덩어리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 신예진의 조각 작업은 시각으로 보고 재구성하는 사물의 세계가 아니라 감촉을 통해 재구성한 사물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조각 작업은 어린 시절에 감촉으로 느껴지던 사물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지만, 사물의 세계는 그의 조각 작업에서 보듯이 눈으로 보고 우리의 인식을 통해 재구성한 세계와는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조각 작업은 감촉을 통해 재구성한 실재의 세계에 대한 인식과 시각을 통해서 재구성하는 실재의 세계에 인식과의 차이를 이야기하고 있다. ■ 조관용
Vol.20121204g | 신예진展 / SHINYEJIN / 辛叡鎭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