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2_1127_화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마감시간 30분 전까지 입장가능
수원시미술전시관 SUWON ART CENTER 경기 수원시 장안구 송정로 19(송죽동 417–24번지) Tel. +82.31.243.3647 www.suwonartcenter.org
동네미술, 동네작가 ● 동네미술 ; 동네야 놀자! 사전을 펼쳐서 '동네'의 개념을 소리 내어 읽는다. "동네(洞-) (명사) 자기가 사는 집의 근처". '자기가 사는 집의 근처'라는 말이 귀에 쏙 들어 오지 않는다. 물론 입에 착 달라붙지도 않는다. 동네는 '집의 근처'가 아니라 집들의 동아리로서 '마을'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마을은 동네보다 말의 어감이나 정서가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보통 우리는 '우리 마을'보다 '우리 동네'를 더 친근하게 사용한다. 우, 리, 동, 네 / 우리, 동네 / 우리 동네
작고하신 소설가 이문구 선생께서는 1977년부터 1981년까지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의 발안(당시는 화성군 향남면)에서 『우리 동네』연작 소설을 집필했다. 선생은 이 작품들에서 "1970년대의 산업화 과정에서 빚어진 농촌의 소외문제와 농민들의 갈등, 전통적 질서의 해체화 과정 등을 풍자적 시각으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소설의 제목들이 이채롭다. 『우리 동네 김씨』『우리 동네 이씨』『우리 동네 최씨』『우리 동네 황씨』『우리 동네 정씨』『우리 동네 장씨』『우리 동네 조씨』. 이문구 선생의 '우리 동네'야 말로 '동네'의 말뜻을 가장 적확하게 사용했다는 생각이다. 다음은 『우리 동네』 연작 중의 한 장면이다. 그녀는 눈비음으로 찬 전자 손목시계를 번쩍거리며 손사래까지 쳐서 정의 비위를 덧내놓았다. 정은 보다 못해 참던 말을 내뱉었다. "드런 년. 물 말어놓구 국처먹는 소리 허구 자빠졌네. 돈 가져갔으면 그저 가져가데? 물 나는 아궁이 불 때줬으면 구만이지 무슨 소리여, 아가리를 짓찧어 놀라." "도둑놈. 초약 풍약 다 처먹더니 오관 떼구 자빠졌네. 동짓달에 개떡 찧는 소리 구만허구 갚어, 못 떼먹는다, 일곱 매 묶구 하늘 관광 가기 전에는…" "워디 소리 안 나는 총 좀 읍나. 드러." "내 말이 그 말이여."
동네문학의 백미는 저렇듯 동네말씨의 삶의 미학을 문학으로 풀어낼 때다. 그렇다면 동네미술은 무엇일까? 두 말하면 잔소리. 동네미술 또한 동네말씨의 삶의 미학을 미술로 새겨내는 것일 테다. '말씨'는 이 풍진 세상의 현실을 이루는 삶의 후덕(厚德)이며, 그래서 풍부한 예술적 재료가 된다. 동네작가들이 동네로 들어가 동네의 속내를 풀어내는 미술이거나 동네를 그리는 미술이어도 좋고, 동네에 퍼질러서 아예 미술이 동네가 되는 것도 좋을 터. 동네미술은 동네와 미술이 구분되지 않는 그런 삶의 미술이니까. ● 동네에 스며든 미술이 동네미술로 꽃을 피울 때 동네미술의 개념은 완성될 수 있다. 미술에 동네가 스며들어 동네미술의 꽃을 피울 때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동네미술에서 '동네'와 '미술'은 서로 다르면서 이어지는 '따로 또 같이'의 합집합이다. 동네도 살고 미술도 살아야 동네미술이 산다. 동네가 살고 미술이 죽어서도 안 되고, 동네가 죽고 미술이 살아서도 안 된다. 동네작가는 또랑광대들처럼 '서로주체성'의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동네작가 ; 사람들아 놀자! ● 철학자 김상봉께서는 우리 동네의 삶의 주체성을 깊게 사유한 뒤 '서로주체성'을 건져 올렸다. '우리 동네'의 '우리'와 '동네'에는 이미 '서로'의 '주체성'이 넓고 깊게 녹아있다. '우리'는 너와 나의 '하나'가 아니라 너와 나의 '둘'로서의 우리다. 너와 나를 '하나'로 강제할 때 전체주의의 독선이 터진다. 너와 나를 '둘'로 깨닫고 인식할 때 민주주의의 관용이 퍼진다. '동네'는 네 집과 내 집이 함께 더불어 사는 마을이다. '동네'는 그래서 '우리네 마을'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 너와 나를 '둘'로 깨닫는다는 것은 너를 너로서 깨다는 것이며 그런 너의 깨달음으로 나를 깨닫는다는 것을 뜻한다. 너는 너뿐이요, 나는 나일 뿐이다는 식의 이분법이 아니다. 너의 존재가 나의 존재를 가능케 한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 '우리'다. 우리는 우리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아내를 나의 아내라고 강조하지 않는다. 우리 동네를 나의 동네라고 부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는 서로서로 잇대어 존재하는 서로주체성의 존재자들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한다. 김상봉께서 서로주체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바 있다. ● 서로주체성은 실체화되지 않는 주체성이다. 왜냐하면 서로주체성에서는 만남의 활동자체가 바로 주체성의 현실태이기 때문이다. 서로주체성 속에서 주체는 실체가 아니며, 실체는 주체가 아니다. 고립된 개별자로서의 나는 그 자체로서는 결코 주체가 될 수 없다. 그 때 나는 그냥 존재자요 실체일 뿐이다. 내가 주체가 되는 것은 오직 내가 너와 함께 우리가 될 때이다. 여기서 '우리'는 개별자들이 결속하여 이룬 합성물 같은 것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라 다만 나와 너의 만남의 현실성을 표현하기 위한 이름이다.
동네의 미학을 가꾸고 일구는 동네작가들과 그런 동네미학의 열매들로 '일과 놀이'의 풍요를 즐겨야 하는 것이 동네미술의 목적이요 가치일 것이다. 수미협이 수 년 동안 기획해 온 『동네야 놀자』전은 그런 동네미술의 동네미학 추구에 있었다. 그들은 미술의 순수성 따위를 따지면서 미술 내부로 들어가 미술동굴의 폐쇄성을 즐기지 않았다. 그것은 순수미학을 가장한 억지 미학일 따름이다. 수원을 중심으로 화성과 안성일대에 흩어져 사는 일명 '수원작가들'의 한 해 살이 미술을 총결산하듯 보여주는 『동네야 놀자』전은 동네미술의 다양태였다. ● 『동네야 놀자』전은 결산전시다. 여기에 하나의 아쉬움이 있다. 한 해를 시작하기 전에 어떻게 놀 것인지를 먼저 잡담, 방담을 나누었으면 좋겠다. 새해 첫 모임에서 그 해의 전시를 위한 삶의 기획을 먼저 수다 떠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예즉농藝卽農, 농즉예農卽藝"라는 말이 있다. 예술이 농사요, 농사가 곧 예술이라는 뜻이다. 한 마디로 예술가 농사가 다르지 않다는 것인데, 가을 결실을 위해서 예술도 어떤 농사를 지을 것인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 살아지는 것으로서의 삶의 미학이 아니라 살아 낸 것으로서의 삶의 미학이라면 더 좋을 것이다. 동네미술은 동네작가의 정신이 터트리는 것이다. 삶의 방식이나 태도는 동네와 상관없으면서 그때그때 이유를 달아 동네미술가로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소설가 이문구 선생처럼 삶터의 '생짜 말씨'에서 길어 올린 리얼리티야 말로 살아있는 미학을 터트릴 수 있다는 신념을 실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김종길
Vol.20121127l | 2012동네야놀자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