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6:30pm
갤러리 브레송 GALLERY BRESSON 서울 중구 충무로2가 고려빌딩 B1 Tel. +82.2.2269.2613 cafe.daum.net/gallerybresson
유토피아(Utopia)의 환상은 삶의 언저리에서 늘 배회한다. ● "nowhere" 아무데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데 잡으려고 욕망하는 우리의 삶을 깨닫기까지는 욕망의 배신을 처절하게 체험했을 때만이 알 것이다. 하지만 어디 욕망이란 놈은 그 실체를 잘 드러내던가? 비록 내가 그 욕망에 배신당했다 해도, 나의 삶에 대한 애착은 결코 희망을 저버리지 않기 때문에 욕망은 곧 현실이 된다. ● 김승혜는 주요섭의 『구름을 잡으려고』를 읽고 소설 속에 숨겨진 향수와 그 의미를 추적해서 주인공(준식)이 꿈꾸었던 장소; 제물포항, 인천 차이나타운 일대를 사진으로 담았다. 그 곳에서 작가는 마치 문학 작품 속의 주인공이 되어 '아무 데도 없는'(nowhere) 욕망의 실체를 '구름을 잡으려고' 애쓰는 촬영행위로 치환시킨다. 김승혜는 두 가지를 가지고 '유희'한다. 하나는 말(text)들의 숨결이고, 또 하나는 이미지(image)의 상상력이다. 홀가카메라(HOLGA Camera)가 우연히 만들어내는 다중효과와 문학 작품에서 가져온 텍스트를 배치하는 방식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
사진촬영행위가 현실의 문맥에서 파편적 이미지를 가져 오는 것처럼, 소설 속에서 몇 문장을 떼어내면 그 텍스트는 이야기 맥락에서 달라진다. 줄거리에서 탈락된 텍스트는 독자적으로 또 다른 말들의 숨결을 토해내고, 분절된 '시(詩)'가된다. 필름카메라로 작업하는 작가는 필연적으로 이미지의 형성과정을 직접 볼 수가 없다. 더군다나 우연하게 중첩된 다중촬영의 이미지는 늘 예측불허다. 작가는 이 과정에서 '우연'이 주는 선물을 즐겼을 것이다. 촬영당시에 볼 수가 없었던 이미지가 현상과정을 거치고 나면 놀랍게도 또렷하게 작가 앞에 서서 이름을 붙여달라고 재잘거린다. ● 통제에서 빗겨나간 이미지는 작가의 상상력을 촉발하기에, 처음 선택된 문장과 쉽게 결합하지 못한다. 작가는 다시 한 번 적합한 텍스트와 이미지들을 선택하기 위해 문학작품 속과 현실의 장소를 배회한다. 여러 번 이 과정을 되풀이 했을 작가는 곤혹스럽지만, 텍스트의 즐거움과 이미지의 상상력에 빠졌을 것이다. 그것은 텍스트와 이미지 상상력이 주는 마술(magic)효과다.
김승혜는 준식(주인공)의 시선과 마음을 찾아 나섰다. 흑백사진은 준식의 마음을 표상하는 과거의 모습이라면, 칼라사진은 작가의 시선에 포착된 주인공의 미래의 모습이자 작가 마음 속에서 재구성된 현재의 이미지다. 사진은 소설이 그러하듯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세계일 뿐 현실 그 자체는 아니다. 그렇다 해서 사진이미지와 소설형식이 현실과 전혀 무관한 가짜는 아니다. 어쩌면 사진이미지의 허상과 소설적 거짓이 욕망의 코드에 빠져 허우적대는 우리들에게 세계를 더 잘 볼 수 있도록 구원해 줄 수 있다. 그것은 욕망의 실체가 허상임을 깨닫고, 나를 현실의 세계에 자꾸만 집착하도록 만드는 사태의 원인을 냉정하게 되돌아보도록 하는 것이다. ● 김승혜는 이를 잘 아는 작가다. '아무 데도 없는'(nowhere) 준식이의 꿈이 바로 우리들 자신이 꿈꾸는 세계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작가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기에 작가는 의도적으로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을 연상케 하는 나비의 형상을 이미지에 중첩시켜 상징화 했다.
김승혜는 사진 옆에 문학작품 속의 문장들을 붙여놓았다. 사진은 문학작품을 해설하거나 단순히 이야기 줄거리를 재현하고자 한 것이 결코 아니다. 여기서 문장의 기능은 사진을 설명하고 이미지의 모호함을 보충하러 오는 텍스트 또한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말을 첨가해서 이미지를 생산하는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에 가깝다. 작가에 의해서 선택하고 배치한 이미지와 텍스트의 접촉은 때문에 이미지와 상호보완적 텍스트의 기능성은 여기서 불필요하게 된다. 문학작품 속에서 문장은 전체 줄거리에서 의미가 확실하지만, 떨어져 나온 문장의 파편들은 사실상 소설의 맥락을 가지지 못한다. 의미의 방향을 상실한 텍스트는 이미지와 쉽게 달라붙으려 하지만, 정작 김승혜의 사진은 구체적 대상의 재현이 아니기 때문에 텍스트와 친밀해지는 것을 방해한다. 따라서 김승혜의 사진과 문장을 함께 보는 관객이 '의미'욕망의 결핍을 채우려면 텍스트가 지시하는대로 사진을 따라 읽어서는 안 된다.
작가는 지도 없는 세계로 상상여행을 떠나기를 요구한다. 지도는 이 사회가 나에게 가르쳐주고 욕망을 꿈꾸게 하는 코드와 다름 아니다. 지도는 세계를 개념적으로 시뮬레이션한 표시에 불과하다. 지도 밖의 세계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지도 없이 떠나는 길은 위험하지만 상상여행은 지도가 불필요하다. 예술세계는 이를 가능하게 한다. 예술은 일장춘몽(Utopia)의 현실에서 나를 잃어버리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유희하는 방법일지 모른다. ● 마찬가지로 사진 이미지도 절대로 우리의 욕망을 채워주지 못한다. 사진은 언제나 과거의 시간을 현재화 하면서 살아있는 현실이 되고자 하지만, 이미지는 항상 나의 욕망을 배반하고 미래에 가 있다. 그래서 사진은 단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끈이 결코 아니다. 기억은 현재에서 늘 재구성되고 욕망의 코드와 접속할 때 마다 오지 않는 미래를 담보로 잡는다. 그런 점에서 사진이미지의 욕망은 미래와 연결된 장치다.
사진장치의 현실적 힘은 사실 나의 욕망이 실현 될 때만 그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욕망은 근본적으로 채워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진의 힘은 목마른 이미지의 환상과 같은 것이다. 이때 그 갈증을 풀어주는 것이 일반적으로 텍스트의 보충이다. 텍스트는 '개념'으로 장착된 논리적 합리성을 무기삼아 이미지의 모호함을 상쇄하고 잠시나마, 이것이 현실이라 달래면서 분출하는 욕망의 에너지를 잠재운다. 문학텍스트의 즐거움은 나의 상상력을 먹이삼아 이미지 형성에 도움을 주겠지만, 절대로 현실로 착각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위험성은 사진이미지의 위험성 보다 덜 하다. 요는 소설텍스트와 사진이미지가 상호 연결되어 '어디에도 없는' 유토피아(Utopia)의 꿈을 현실로 끌어내리는데 있다.
사진 안에 텍스트성은 반드시 있다. 우리가 이것을 읽어내는 방식은 사회적 코드와의 접속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한 장의 사진 속에 결정된 의미란 존재 하지 않는다. 문제는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욕망의 코드를 나의 욕망과 일치시킬 때 그것은 환상효과가 극대화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사진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환상의 유토피아를 현실로 착각하는 일만은 하지 말아야 한다. ● 김승혜의 작업은 이 점을 정확히 직시하고 있다. 작가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배치효과를 통해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는 이렇듯 조합된 구성의 욕망임을 알아차리도록 그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유토피아는 내가 가고 싶은 곳이지만 정작 그 세계는 '아무데도 없다.'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세계 즉, 그곳이 나의 현실로 도착(倒錯)되었을 때 더 이상의 나의 유토피아는 아니기 때문이다. ■ 이영욱
Vol.20121122k | 김승혜展 / KIMSEUNGHYE / 金承惠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