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2_1121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4층 Tel. +82.2.736.1020 www.insaartcenter.com
김순섭, 큐브의 도상학 ● 지극히 감성적이고 서정적인 것을 지극히 차갑고 엄정한 기하학적 패턴 속에 담아내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서, 김순섭은 작가노트에 적고 있다. 작업의 어려움을 수학공식에다 비유하기도 했다. 이 말은 작업의 어려움에 대한 고백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작업을 함축적으로 정의내린 것이기도 하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을 듯싶은 정교하게 짜인 패턴을 보면 작가의 고백이 그저 해본 소리가 아님을 알겠다. ● 작가는 기왕에 염색된 기성 천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직접 염색하는 과정을 거쳐서 원하는 색을 얻는다. 이렇게 염색된 색 띠가 준비되고 나면 각기 다른 색 띠를 세 방향으로 엮어 나가는데, 기계적인 수작업의 지난한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색면과 색면이 어우러져 입방체로 되살아난다. 밋밋한 색면들이 어우러져 무슨 저부조와도 같이 평면 위로 돌출돼 보이는, 혹은 평면 위에 입방체의 큐브들을 촘촘하게 심어 놓은 것 같은 정연한 기하학적 패턴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평면이면서 입체처럼 보이는,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아우르는, 일종의 착시효과가 만들어준 일루전과 비전이 열리는 것이다. 작가는 그렇게 열린 일루전과 비전에 매료돼 지난한 과정을 잊을 수가 있었다. 엄정한 반복패턴을 보여주고 있는 화면이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을 것 같고 최소한의 우연한 계기마저도 들어설 자리가 없을 것 같다.
감각적 쾌감을 자아내지만 흐트러짐이 없는 화면이 쉽게 자기를 보여줄 것 같지가 않고 자기를 내어줄 것 같지가 않다. 아마 모르긴 해도 지루하게 반복되는 과정과 지난한 노동과정 속에서 작가는 자신의 존재를 반쯤은 무의식적인 상태로 방기했을 것이다. 자기를 지우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다. 자기를 지우는 일과 자기를 억제하는 일은 서로 통한다. 예술과 창작의 당위성을 수신에서 찾은 전통적인 관념과도 통한다. ● 니체는 예술의 원인이며 동력으로서 아폴론적 충동과 디오니소스적 충동을 꼽았다. 한쪽이 질서를 향한다면 다른 한쪽은 해체를 향한다. 이 가운데 작가는 디오니소스적 충동보다는 아폴론적 충동 쪽에 기울어져 있고, 해체보다는 질서 쪽을 지향하는 것 같다. 작가의 그림은 흐트러짐이 없다고 했다. 여기서 흐트러짐이 없다는 것은 아무래도 반어법으로 읽어야 할 것 같다. 흐트러진 세상사를 흐트러짐이 없는 그림으로 갈무리한 것이다. 작가의 작업은 어쩌면 자기 내면에 흐트러짐이 없는 질서로 축조된 어떤 인공적인 세계를 구축하는 일일지도 모르고, 이로써 흐트러진 세상이며 무질서한 세상을 건너가게 해주는 동력을 얻는 일일지도 모른다. 기하추상을 떠올리게 하는 엄정한 형식은 사실은 이처럼 내면의 상징이며 내적표상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작업에선 반복패턴이 두드러져 보인다. 여기서 반복과 패턴은 리듬과 운율과 서로 통한다. 반복패턴 탓에 화면은 마치 옵아트에서처럼 미세하게 여울지거나 일렁이는 것 같고, 돌출돼 보이는 큐브들의 각면에 부닥쳐 빛이 섬세하게 산란하는 것도 같다. 화면 자체는 비록 정지된 것이지만, 착시효과로 인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고,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져 큐브를 도드라져 보이게 한다. 그리고 움직이는 화면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화면에서 어떤 잠정적인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정지화면인데 움직이는 것 같고 그림인데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바로 하나의 동기가 반복 변주되는 음악에서처럼 큐브로 나타난 하나의 모나드가 반복 확장되고 있는 것에 기인한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수학공식에다 비유했는데, 음악 역시 수학에서 유래했다는 사실과 어울린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전통적인 미적 관념이며 형식논리 중 결정적인 부분들, 이를테면 조화와 균형과 비례는 하나같이 수학과의 연관 속에서 추상해낸 것들이다. 이로써 작가는 그림과 음악이 하나로 통하는 일종의 공감각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 그림은 소리를 부르고 소리는 그림을 견인한다. 그림과 소리가 시각과 청각이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넘나드는 어떤 차원이 열리는 것인데, 암시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예술은 그리고 창작은 어쩌면 이런 암시를 만들어내는 기술일지도 모른다. 알다시피 암시란 그림으로 하여금 미처 그려지지 않은 무엇을, 존재로 하여금 부재하는 무엇을 떠올려주는 기술이다.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일이 예술이라는 폴 클레의 말과도 통한다. 작가의 그림은 비록 추상이지만 순수한 형식논리가 밀어올린 추상이라기보다는 이처럼 미처 그림으로 환원되지 않은 무엇, 부재하는 무엇, 비가시적인 무엇을 암시하는 추상이며 어떤 의미내용을 함축한 추상이다.
작가의 그림은 비록 추상이지만 사실은 그 속에 지극히 감성적이고 서정적인 것을 담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담아내고 있는가. 추상적인 그림은 어떻게 형상에 해당하는 것들을 암시하는가. 가시적인 것은 어떻게 비가시적인 것을 상징하고 표상하는가. 소리를 암시한다(소리는 작가의 근작을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 소리는 자기 내면에 구축한 질서의 성좌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다. 감각적이기보다는 관념적인 소리에 가깝다. ● 그리고 감각적인 소리도 암시하는데, 자연과 계절감각으로부터 실제로 들려오는 소리나 추상된 소리다. 이를테면 봄에 새싹이 움트는 소리, 여름에 생명이 약동하고 환희하는 소리, 가을에 나무와 나무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면서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 겨울에 티타늄같이 차가운 금속성의 얼음 속에 동면하면서 생명을 준비하는 소리들이다. 감수성이 풍부한 귀에는 들리겠지만 여간해서 실제로 들어보기는 어려운 소리들이다. 더욱이 작가는 이 소리들을 추상적인 형식 속에 담아냈다. 그럼에도 이 소리들이 실제로 암시되는 것은 작가가 그림 속에 끌어들인 조형원리며 형식요소 때문이다. 이를테면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움직이는 반복패턴이며, 큐브의 각면 위에서 산란하는 빛, 그리고 계절감각에 맞춘 색깔이며 빛깔이 어우러져 소리를 암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작가는 자기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관념적인 소리를, 그리고 자신의 생활사로부터 유래한 감각적인 소리를 채집하고 암시하고 들려줄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자기내면에 질서의 성좌를 구축한다고 했다. 그 성좌의 최소입자가 큐브고 이 큐브들이 반복되면서 하나의 전체에 수렴된다. 부분은 전체로부터 유래했고 전체는 부분들로 확장된다.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표상한 것이다. 여기서 부분과 전체는 다 무엇인가. 부분 곧 하나하나의 큐브는 나와 너를 상징하고 존재와 개별자를 상징한다. 그렇게 나와 네가 모여 존재를 만들고 그 존재는 더 큰 존재(사회일 수도 있겠고 경우에 따라선 존재가 유래한 절대적인 존재일 수도 있는)에 수렴된다. 바로 관계의 미학을 표상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큐브 곧 사각형의 입방체가 집이며 방을 닮았다는 점이다. 공교롭게도 존재의 집이며 방을 이처럼 사각형이나 입방체에 곧잘 비유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사각형이며 큐브를 현대인의 생활사에 대한 메타포로 볼 수는 없을까. 알다시피 현대는 온통 사각형이며 큐브로 이뤄져 있다.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사각형이며 큐브는 바로 현대를 상징하고 문명을 표상한다. 그리고 드물게 직사각형의 패턴이 보이는데, 이 형태며 패턴은 상대적으로 그 속성이 문명보다는 자연에 가깝다. 이를테면 흐르는 바람, 흐르는 물결, 흐르는 시간과 같은. 자연은 온통 흐른다. 흐르는 것은 자연의 본성이다. 그래서 그 꼴이 옆으로 길다. ● 이렇게 작가는 사각형의 큐브를 매개로 자기내면에 질서의 성좌를 구축하고, 자기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표상하고, 자연에서 유래한 소리를 채집할 수가 있었다. 존재와 더 큰 존재를, 문명과 자연을 아우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렇듯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인 엄정한 형식 속에서 감성적이고 서정적인 존재의 결이며 느낌의 결을 읽어내는 것은 관객의 몫으로 남겨진다. 그림으로부터 존재의 결이 읽히고 느껴지는가. ■ 고충환
Vol.20121121g | 김순섭展 / KIMSOONSUB / 金順燮 / fiber craf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