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2_1120_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175 Gallery 175 서울 종로구 안국동 175-87번지 안국빌딩 B1 Tel. +82.2.720.9282 blog.naver.com/175gallery
그리기의 즐거움, 거기까지 ● "오직 사실을 가장하는 행위의 즐거움과 짜릿한 전율만을 위해 만들어진 이 허구 이야기의 세부 묘사가 대부분 가짜인 것처럼." 이 구절은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미술가이기도 한 조르주 페렉Georges Perec의 어느 소설의 말미다. 주되게 다룬 사건 자체가 가짜였음에 동요하는 독자에게 그가 짐짓 위로라고 얹는 말이 결국 이 허구 이야기에서 독자를 집요하고 맹랑하게 설득한 세부 묘사도 또한 가짜라는 것이다. 그럼 이 모든 것이 가짜였다는 허탈감을 안고 책을 덮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 조금만 더 침착해보자. 허구 이야기의 세부 묘사는 왜 만들어졌던가. "사실을 가장하는 행위의 즐거움과 짜릿한 전율만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지 않나. 가짜라고 해서 동요할 것 무엇 있을까. (어짜피) 소설인데 말이다. 소설과 마찬가지로 미술도 가짜다. 고안물이고 구성품이다. 실재적인 성격은 부여받고 획득하는 것이지 미술 그 자체가 실재는 아닌 것이다. 세부적으로 회화에 대해, 특히 구상 회화에서 대상 세계와 얼마나 동일한가를 따지지 않는 것도 동일한 이치다. 2차원의 세계에 3차원의 세계를 담는, 그 사실을 가장하는 행위에서 작가는 좀 더 행위의 즐거움과 짜릿한 전율을 느끼면 안되는 것일까. 엄숙한 금욕주의로부터의 탈피. 그리기의 즐거움에 대해 솔직해지기. 나는 이런 일련의 고민이 장고운의 「어느 바람 부는 날, 서울」에 깃들여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2010년 당시 준비하던 기획전을 위해서였다. 그때 그녀는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체류할 때 그린 꽃그림 연작을 보여주었다. 그림은 이렇게 그리는 것이라는 밥 로스Bob Ross의 지침을 탐구하며 그린 그 연작은 내게 "꽃그림을 그린 꽃그림"으로, 다시 말하면 그림을 그린 그림으로 다가왔다. 회화란 무엇인가, 이 담박한 질문에 대해 간단히 답하기는 대체로 묘연 할 텐데 그녀가 취하는 태도는 회화란 이런 것이라고 대답하는데 호기부리지도 않았고 회화란 이도저도 아닌, 온갖 현상들의 '아닌 것'이라고 답을 회피하지도 않았다. 그 연작은 다만 '내가 생각하는 회화는'이란 주어에 닿아있을 여러 술어에 대한 모색으로 여겨졌고 그 점이 내겐 꽤나 우직한 필경사처럼 느껴졌다. 과거의 인연으로 이번 전시의 글을 준비하는 지금도 내게 그녀는 여전히 그린다는 행위에 멋을 부리지 않는다는 점이 매력이다. 그러므로 나의 과제도 되도록 단출한 글을 쓰는 것이라 여겨진다.
작가의 3번째 개인전인 『어느 바람 부는 날, 서울』은 제목이 전하는 서정과 무엇을 그렸는지 비교적 이해가 쉬운 작품의 내용 사이에서 자칫 놓칠 수도 있는 층위를 갖는다. 먼저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창을 통해 본 저녁 남산 풍경」과 4개의 캔버스로 구성된 「쇼윈도우 안에 꺼진 전등」, 「쇼윈도우에 비친 산」, 「쇼윈도우의 마네킹」, 「마네킹과 남산」은 남산 타워라는 철골 구조물이 철과 함께 근대 건축 구조물로 자리매김한 유리라는 매질에 비친 서울, 특히 남산의 풍경이다. 햇수로 3년째 이태원 작업실에 머물고 있는 작가는 남산과 산 위에 우뚝 솟은 서울타워라는 서울의 지리적, 문화적 중심지이자 상징적 구조물을 작품에 담았다. 작업실 동네를 오고 가며 찾은 그림의 소재는 유리라는 필터에 걸러진 것이다. 우리는 흔히 투명함이 유리의 본질이라 여기지만 실상 유리를 통해 빛은 굴절, 반사되고 색은 변질된다. 「창을 통해 본 저녁 남산 풍경」은 관념의 저녁 하늘색과 유리라는 매질에 의해 감각적으로 변화한 하늘색에 대한 경험이 대결하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이 천착은 2007년 「창 너머 바깥 풍경」, 「4가지의 하늘색」, 「보랏빛으로 넘어가기 전 하늘, 소나무, 창」과 같은 전작에서 시도한 바 있으나 엄격한 규율처럼 구획지어지고 평평하게 처리하던 화면 구성은 이번 전시에서 해제된 것처럼 보이며 대신 그곳에 파편화된 빛의 입자를 남겼다.
내가 알던 그녀의 작품의 특징은 해외 체류 시절부터 이동이 용이하도록 만들던 캔버스 사이즈(100×40cm)에 대상을 분해해서 조각내는 방식으로, 캔버스 하나하나는 기하학적 추상에 가까운데 캔버스가 조합될 때에는 대상이 드러나는 방식이었다. 정돈된 붓질과 돌출하지 않는 색감은 화면을 중성화시키는 것처럼 보였고 내겐 그 태도가 인식에서 발생하는 차이를 수긍하면서도 공통감에 대한 기대도 공존하는게 아닌가 읽혀졌었다. 담담한 방식으로 보였던 전작과 비교해 볼 때 이번 전시는 작가 스스로가 이전의 작업 방식을 탈피해야겠다는 과제를 부여했고 지난 몇 년간 그녀의 작업을 지켜보던 내 관점에도 이 시도는 명확해 보인다. 「쇼윈도우 안에 꺼진 전등」, 「쇼윈도우에 비친 산」, 「쇼윈도우의 마네킹」, 「마네킹과 남산」은 선호하는 사이즈를 고수하면서도 각각의 작품은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 충족시키는 양상이다. 의미는 양 옆에서 조응하는 작품의 관계망에서 충전된다. 그녀는 그림의 대상을 분명히 하면서도 그리기의 자기 벽을 성실히 허무는 과정에서 쾌감을 얻고 있는 것일까. 그림이 '무엇'에 대한 것이라는 단언에 대한 방어가 붕괴된 곳에 몽롱하게 아롱거리는 빛의 입자가 있고 그리기의 쾌감이 자리하는 듯하다. ● 이와 같은 맥락에서 「환기구 박스에 아른거리는 나뭇잎 그림자」와 「흐르는 불꽃」은 매끈한 마감으로 붓 자국 조차 남기지 않던 작가의 자기 경계가 자취를 감춘 작품이다. 「밤, 까페 밖으로 보이는 불빛과 창에 비친 조명」은 흔들거리는 빛을 아크릴 물감의 흘러내림으로 그냥 둔다. 이 작품들이 붓 쓰임을 향한 모색이라면 「옷더미」, 「한사람의 색」은 집약된 것들 그리고 그 속에 산재하는 색에 대한 관심의 표명이다. 「27개의 수건과 선반」에서 보여준 켜켜이 개어진 수건과 색의 배열은 여기서 구겨지고 무질서하게 엉겨있다. 어쩌면 장고운을 아는 이들에게 전작과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 사이의 격차가 과하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이번 전시작들 사이의 격차도 과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탈피나 해제, 방어 기제의 붕괴가 마냥 즐거움의 증식이자 내려올 줄 모르는 조증의 발현이라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원하면 얻는 것은 즐거움보다 그 밖의 것들이기 쉽다. 어쩌면 즐거움을 제외한 다른 것들일 수도 있다. 작가는 이제 자기 부정의 여러 단계를 여기에 놓고서 궁금해 할 것이다. 오늘의 전시를 분기로 어디로 향할지 아직은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녀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듯 하니 밝은 눈과 솔직한 입으로 그리기의 즐거움에 대해 함께 토로했으면 한다. 거기까지. 그럼. ■ 김현주
Vol.20121120i | 장고운展 / JANGKOOON / 張고운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