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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1115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선화랑 · 선 아트센터 SUN GALLERY · SUN ART CENTER 서울 종로구 인사동 184번지 1,2층 Tel. +82.2.734.0458, 5839 www.sungallery.co.kr
선(禪)을 위한 선(線)-대탁(旲卓) 한진만(韓陳滿)의 지구산수(地球山水) ● 자연 natura 라틴어 "나스시(nasci)"에서 유래된 단어 "자연"은 "생성되다", "탄생되다"라는 뜻을 지닌다. 인간에 의해 제작되지 않은 모든 것을 의미하는 자연은 그래서 문명(civilization)과는 반대의 의미로 이해되어진다. 서구(西歐) 고대문화 최후의 위인으로 다음 세기인 중세의 새로운 문화를 탄생하게 한 위대한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 von Hippo, 354-430)는 이 자연을 존재(being)와 본질(substance)로 이해했다. 뿐만 아니라, 플라톤과 스토이커 학파 그리고 신플라톤주의자들 또한 자연을 잘 정돈된 세상의 질서로 바라보며 자연과 우주(cosmos)를 동일시했다. ● 이와는 달리, 동양에서 자연은 기(氣)의 우주 속에서 존재하며, 천지자연(天地自然)으로 이해된다. 중국 당대의 화가인 장조(張燥)는 "밖으로는 조화를 본받고 안으로는 마음의 근원을 얻는다"고 했다. 여기서 언급되는 '조화'는 자연을 일컫는 것으로 결국 천지자연을 본받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순자(荀子)는 자연과 인간의 본성을 비교하였고, 장자(莊子)는 자연을 통해 도(道)를 맛본다 하였다. 대탁(旲卓) 한진만(韓陳滿)은 이러한 동서양의 사상들을 수묵으로 녹여낸다. ● 수묵 산수화의 지평을 넓히며 활발히 활동한 40여 년이 넘는 창작기간 동안 자연-산과 섬 그리고 바다는 한진만의 작품을 위한 모티브이자 주제이다. 특히 산은 그의 창작을 위한 영감의 원천이기도 하다. 지구산수(地球山水)를 주제로 한국내의 수많은 산에서 시작해 금강산,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등을 직접 경험한 그는 그 웅장함과 생명력을 동양의 전통적인 묵의 다양한 농담과 섬세한 붓놀림을 통해 성공적으로 전하고 있다. 지극히 동양적인 조형 언어에 내재하는 세상의 질서와 조화 속에는 동서양을 아우르는 존재와 본질에 대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한진만의 묵필의 세계가 특별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젠(Zen)-선(禪)을 위한 선(線) ● 대탁(旲卓)은 넓은 공간을 채우면서 비운다. 붓 끝에 머금은 검은 먹이 하얀 종이 위를 반복하여 지나며 형상을 마련하는 동안 여백이 형성된다. 채움과 비움을 동시에 이루는 것이다. 이는 선(禪)불교에서 말하는 비움/공허이자 곧 완성/완결이다. 즉 비우면서 완성해 내는 것이다. 미의 이상을 자연과 삶의 조화에서 찾았던 선불교 예술은 현세의 세속적인 물질의 세계를 상징하는 하얀 종이 위로 새겨지는 검은 묵의 자취를 무한한 무(無)의 세계를 가상화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 끝없는 무의 세계란 세속과 동떨어진 곳으로 또한 이승의 고통을 해탈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동시에 모든 것을 생성하게 하는 곳을 의미한다. ● 이 무의 세계를 한진만은 흔하지 않은 거칠어 보이지만 정선된 격동의 선(線) 형태로 이루어 나간다. 붓 끝의 섬세한 놀림과 자신만의 점필에 가까운 묵필법으로 농담을 통해 원근을 형상화 해가는 창작의 길은 즉흥적이고 힘이 넘친다. 하지만 절제되어 있다. 이에 의한 형태표현은 단순화 되어있다. 붓의 탄성을 이용한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필치의 강약조절과 속도조절에 의한 결과 일 것이다. 이러한 기법에 의해 더없는 명산이 화폭에 담기지만 그 외향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물적 대상의 고유한 본질과 그 생명력인 기운을 담아내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동양의 소위 기운생동(氣韻生動)의 표현이기도 하다. ● 놀라운 것은, 격동의 선(線)이 마련하는 정적에 있다. 절제와 단순화가 마련하는 대탁(?;卓)의 산과 물은 끝없는 정적 속에 있다. 이 정적은 경건과 숭고함을 수반한다. 그래서 아름답다. 그의 수묵 산수화만의 분위가 여기서 마련된다. 보다 놀라운 것은, 이 분위기가 조화 속에서 완결 되는 것이다. 그의 산수화가 선(禪)불교적 경향을 담고 있는 듯 보이는 이유가 이러한 점들 때문 일 것이다. 정적과 조화는 선(禪)불교가 지향하는 미(美)철학이다. 이 미(美)철학의 중심엔 단순함이 자리 한다. 물질세계의 공허와 이승의 삶의 '덧없음'에서 출발한 선(禪)의 도덕 윤리는 "뭐든 성가시고 말이 장황하거나 수다스럽고 화려하고 복잡한 것"을 멀리하는 가르침을 전했다.
어원학적으로 선(禪)의 의미가 명상이듯, "장황한 말과 수다스러움"에 대한 금기는 선(禪)불교의 기본교리로 정의된다. "순수한 절대적 진실은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곳에 존재" 한다는, 또한 "언어와 개념"이란 "실재 일어난 사건의 복제" 일 뿐이라는 교리적 논리는, 종교적 믿음에서 기인 한 것이었다. "성가시고 복잡한 것" 에 대한 금기는 '단순성'의 미를 출현하게 했다. 나아가 이 단순성은 고귀와 경건을 우선으로 표출하게 했다. 동시에 화려한 것에 대한 금기는 영혼의 순수와 맑음을 일깨웠고 이러한 영혼은 "이승의 삶에 있는 덧없는 욕정과 욕심으로 부터 자유로워 짐"을 강조했다. ● 이렇게 단순성은 선(禪)의 미를 대신하고, 이러한 미의 중심을 지탱해 주는 것은 정적이 된다. 그래서 선(禪)불교 미(美)철학의 완성은 정적과의 조화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한진만의 산과 섬은 이 정적이 마련하는 경건과 숭고 속에 우뚝 솟아 있고 이를 배경으로 바다는 유유히 흐른다. 마치 그의 40여 년의 창작세계를 집약하듯, 채우면서 비워내는 노련한 절제의 선들이 궁극적으로 마련하는 세계는 조화이다. 이 조화 속에서 자연과 삶 그리고 전체(우주)에 대한 존재와 본질이 함께 한다.
영(靈)의 산(山) 그리고 숭고 ● 1980년으로 거슬러 오른다. 대탁(旲卓)의 첫 개인전이 마련된 해이다. 국내의 크고 작은 산을 주제로 관념적인 산이 담긴 1980년대의 산수화시기를 지나,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실경(實景)의 산을 보다 자유로워진 자신만의 묵필에 담아내었다. 이를 바탕으로 2000년 이 후에는 영산(靈山) 제작에 몰입하며 자신의 작품세계의 지평을 지속적으로 넓히고 있다. 여기서 영산(靈山)이란 영산의 일반적인 의미인 빼어난 경관과 그 아름다움이 절절해 신선이 머무른다는 것에서 비켜간다. 명산대천(名山大川)도 비켜간다. 대신, 내적인 기(氣)의 우주와 장자의 도(道)를 품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산의 모습에서 (동양의)조화를 그리고 (서구의)존재와 본질을 그려내고 있다.
한진만은 영(靈)적인 산 자태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처럼 시각화 하고 있다. 관조적인 관점이자, 동양적인 숭고의 형태이다. 겸재 정선이 1734년 「금강전도金剛全圖」를 완성하며 12폭에 펼쳐놓은 금강산의 일만이천봉도 유사한 관점이다. 높은 곳에 올라 우주의 위대함을, 그 아래로 펼쳐지는 만물의 변영과 아름다움을 관찰하며 동시에 사방을 멀리서 조망 하는 것, 이것은 고대 아시아인들의 우주와 인생에 대한 숭고함의 의미이기도 하다. 이를 배경으로 중국 최대의 시인이자 시성(詩聖)인 두보(杜甫)는 「망악(望岳)」에서 "꼭대기에 올라 일람하니 뭇 산들이 작구나"라고 읊었고, 당나라 초기 대표적 시인인 왕발(王勃)은 「등왕각서」에서 "하늘은 높고 땅은 아득히 멀어 우주의 무궁함을 모두 담았구나" 고 했다. ● 자연이나 천문을 내려다보며 동시에 올려다보는 관상(觀象)방법과 천지를 관찰하는 「주역」 방법 그리고 위아래를 보는 「예기」의 방법 또는 그림의 삼원법은 유사성을 지닌다. 이 방법들은 세상을 관조함에 유동적인 사유방식을 전한다. 한진만의 작품세계는 이를 내포한다. 이 유동의 관조는 수많은 암벽과 암층들이 때로는 소용돌이치듯이, 때로는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가 이루는 파상(波狀)형태와도 같이, 때로는 직립 형태와도 같은 모습으로 거대한 자태의 위용(威容)을 드러내게 한다. 이 위용을 보다 압도적으로 만드는 것은 이합집산(離合集散) 형태의 거대한 무리 때문이다. 즉 양(量)적인 거대함 때문이다.
그래서 대탁(旲卓)의 자연은 크다(大)고 할 수 있다. 이는 '단적으로 크다'는 서구의 숭고를 떠올리게 하지만 다른 의미이다. 수적으로 많은 것에서 그래서 그 (힘의) 거대함으로 숭고의 의미를 정의한 계몽주의 철학자 칸트(Immaneul Kant)는 숭고가 간접적인 미지의 세계에 속하기 때문에 "몰형식성"과 "무한성" 또 객체에 속하는 어떠한 목적도 그 규정 근거로 갖지 않아야 함'을 강조 했다. 문화적으로 근대의 산물인 서구의 숭고는 19세기에 이르러서 미의 하나로 간주 되었고, 투쟁을 통한 초월에서 그 힘을 발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서구의 숭고의 효과는 고통과 쾌감으로 이해된다. 이에 반해 자연과 인간사이의 대립관계가 배제된 채 성립되는 동양의 숭고는 높고(高), 큰(大) 것에서, 즉 높은 산과 큰 강의 자연에서 무한함을 발견하고자 했다. 동양의 우주관인 무한함이 높고 크며 공경하고 삼가고 엄숙한 숭고의 의미를 내재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한진만의 산수가 마련하는 숭고는 여기에 있다. ●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 공자세가」에서 "높은 산을 우러르며 큰 길을 따라 걸어가는 것이니, 끝내 도달 할 수는 없어도 마음만은 그를 향해 가리라"라는 묘사를 했다. 크고 숭고한 인물 성왕을 찬양하는 공자에게 건넨 사마천의 그 마음엔 즐거움이 가득하다. 자연을 즐기는 그래서 자연에 의한 즐거움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큰 자연을 통해 존재의 본질 간의 조화 및 내적인 일치를 말하는 것으로, 숭고와 인간의 관계를 상생(相生)으로 풀고 있다. 그래서 즐거움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의미하는 것이 된다. 동시에 동양의 숭고는 즐거움이라는 것의 설명이기도 하다. 어쩌면 한진만의 영(靈)의 산은 마치 위대한 영혼이 위대한 자연 속에서 경험하는 또 하나의 "영혼의 메아리"로 숭고함과 그 무한함을 천산(天山)의 의미로 전하는지도 모른다.
공즉시색(空卽是色)-실즉시허(實卽是虛) ● 대탁(旲卓)은 "바위 안에서 숨을 쉬고 따뜻함을 느끼는 가운데 필을 든다면 말로서 다 할 수 없는 자연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럴 때엔 나 자신도 모르게 나무가 되기도 하고 물이 되기도 한다. 대상을 스쳐 지나듯이 볼 것이 아니라 관조하며 황홀경에 젖어야 한다"고 기록한다. 이는 아마도 실즉시허(實卽是虛)에 대한 사색이 아닐까 한다. 동시에 공(空)에 대한 특별한 의미 부여처럼도 보인다. ● 공령(空靈)은 동양이든 서양이든 예술이 발하는 최고 경지에 속한다. 한진만은 이 부분을 건드리며, 동양의 허(虛)가 진실보다도 더 진실함을 그래서 비어있어 모든 것을 잉태하고 만물을 품을 수 있는 조건임을 강조 하고 있다. 이는 실(實)과 허(虛), 색(色)과 공(空)혹은 번뇌와 깨달음 혹은 채움과 비움의 관계를 대립적인 것이 아닌 또한 차별적인 것이 아닌 일의(一義)로 관조하고 있음을 설명한다. 이는 곧 조화이다. 대탁(旲卓)의 기(氣)의 우주인 천지자연이 주는 조화가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이유는 여기서 기인하는 것이다. 어떤 대상의 상태나 성질이 아닌 영혼 안의 정념을 동시에 본질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실(實)과 허(虛), 즉 색즉시공(色卽是空)의 공령(空靈)은 대탁(旲卓) 한진만(韓陳滿)의 40여 년의 창작세계에 대한 집약이 아닐까 한다. ■ 김은지
Vol.20121115i | 한진만展 / HANJINMAN / 韓陳滿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