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정욱장 CHEUNGWOOKJANG / A Long Journey 장태묵 JANGTAEMOOK / Engraving Trees on Thousand Rivers
Booth No.79 Zone:C Hall:4
상하이마트 ShanghaiMART 2299 Yan'an Road (West), Shanghai, P. R. China shanghaimart.kex168.com
A Long Journey ● 긴 여행, 긴 여로, 긴 여정이다. 추상작업에서처럼 주제가 무의미한 경우도 있지만, 대개 주제는 창작주체의 작업을 대리하기 마련이다. 정욱장이 자신의 조각에 부친 주제가 그렇다. 이 주제 속엔 여행과 길이 들어있다. 여행은 떠난다는 것이다. 작가가 조각가임을 생각하면, 여행은 한 가지 형식에 정주하는 대신, 계속 새로운 형식을 찾아서 옮겨 다니는 유목민의식을 의미한다. 어떤 작가는 형식을 심화시키고, 다른 작가는 형식을 확장한다. 외관상 작가는 확장의 경우처럼 보인다. 엄밀하게는 확장과 심화를 맴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인데, 다양한 형식적 시도들이 결국 삶의 메타포라는 하나의 전제로 모아진다. 삶의 메타포로 치자면 길이 그 전형에 해당한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매개로 삶의 길이며 조각가의 길을 전망으로 열어놓는다. 여행도 그렇지만 길 역시 삶의 전형을 예시해주고 있기에, 작가가 그 길 위에 풀어놓는 형식의 지점들은 쉽게 공감을 얻는다. ● 조각에 관한한, 그동안 작가는 꽤나 다양한 그리고 꽤나 의미심장한 지점 지점들을 짚어냈다. 이를테면 나무 솟대와 마른 북어는 전통적으로 지복과 기원을 상징한다. 여기에 제의적 포즈를 취한 사람(아마도 하늘과 땅을 넘나들고 이어주는 제사장이며 무당이며 최초의 예술가일 듯) 형상이 가세하면서 전통과 제의(일종의 뿌리의식)에 관련된 표상형식을 부각한다. 그리고 인체와 구조물을 결합시켜 일종의 상황조각과 풍경조각을 예시해준다. 조각에 이야기를 끌어들인 결과로 볼 수가 있을 것인데, 형식보다는 혹은 형식과 더불어 내용에 기울어진 작가의 성향을 엿보게 한다. 풍경조각이 모티브와 모티브가 한자리에 배열된 어떤 전망을 열어놓고 있다면, 상황조각은 그렇게 열린 전망이 어떤 상황(이를테면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실존적이고 존재론적인 상황)을 환기시켜주는 경우로 구별된다. 전망 자체에 방점이 찍히는 경우와, 그 전망에 탑재된 성격이 강조되는 경우로 구별해볼 수가 있겠다. 이런 이야기의 도입으로 차후 작가의 작업은 조각의 경계를 넘어 공간설치작업으로 확장되고, 마치 그림을 그리듯, 그림 속에 이야기를 풀어내듯 평면적이면서 회화적인 조각으로 변주되는 계기가 된다. 공간이나 평면 속에 어떤 극적 상황을 담아내는 연출가로서의 자질이 보태진 것이다. 마치 연극과도 같은 그 전망 속에 대개는 다른 사물들과 함께 말과 사람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말은 인간이 처한 상황논리를 대리한다. 이를테면 말은 이상(그 의미가 여행과도 통하는)을 상징하며, 고삐에 묶인 말은 현실에 발목 잡혀 좌절된 이상을 암시한다. 어쩔 수 없이 현실에 붙잡혀 살지만, 그 와중에도 이상(어쩌면 일탈)을 향한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인간의 실존적 조건과 한계를 상징한다.
그리고 비록 평면조각이 집중적으로 제작된 것은 근작에서의 일이지만, 매번 그 재료와 형식이 약간씩 다를 뿐, 사실은 기회 있을 때마다 다른 작업과 함께 병행해온 것이란 점에서 일종의 스케치나 에스키스로 볼 수 있겠다. 당연히 그 자체 독립적인 조각들이지만, 다소간 이완된 상태에서 제작된 것 같은 편안한 느낌이다. 이를테면 알루미늄 수작업을 기저로 제작된 근작들을 보면 눈에 쏙 들어오는 화면에 모티브들을 배열하는 감각이나 콤포지션이, 그리고 여기에 드로잉이며 표면질감의 차이를 연출한 것이, 게다가 화면의 대부분을 여백에 할애해 관조적이고 명상적인 분위기로 유도한 것이 영락없는 회화다. 조각에 이야기를 끌어들이는 것이나, 마치 그림을 그리듯 조각을 풀어내는 태도와 방식이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아우른다. ● 그리고 작가는 조각 자체의 문제를 향한다. 어쩌면 조각가로서 당연한 문제의식이랄 수 있겠다. 조각의 본질이 여럿 있지만, 그 중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는 양감과 중력을 들 수 있다. 즉 속이 꽉 찬 덩어리와 이에 따른 필연적 귀결인 중력이야말로 조각을 조각이게 해주는 장르적 특수성일 것이다. 편의상 전통적인 조각과 현대적인 조각을 구별시켜주는 결정적인 계기며 분기점이 바로 이런 양감과 중력을 의심하는 것에 있고, 작가 역시 그 의심에 힘입어 새로운 형식의 조각을 제안한다. 소위 탈조각 내지 망조각이 그것이다. 이를테면 가녀린 철삿줄을 엮거나(밴딩) 이어 붙여(웰딩) 말이며 사람 형상을 만드는데, 하나같이 속이 텅 비어있고, 구조적으로 안과 밖이 구별 없이 하나로 통하는 통구조를 하고 있다. 가벼움 자체만으로 이미 중력을 거스르는 것이 되겠지만, 보다 적극적으론 조형물을 아예 벽에 걸거나 공중에 띄워 중력에 반하기도 한다. ● 흥미롭게도 말에 실타래가 연장돼 있어서 마치 말이 실타래로부터 유래한 것 같다. 그 자체를 시간의 메타포로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사람 형상(다비드 상으로 차용이라는 또 다른 지점을 짚어내는)이 서 있는 바닥에 그 형상과 마찬가지 성분인 철사조각들이 널브러져 있어서 부분과 전체, 재료와 형상간의 유기적인 관계를 암시한다. 더불어 종이로 떠낸 속이 텅 빈 두상으로 중력을 드러내놓고 배반하고, 속을 파낸 텅 빈 돌덩어리를 매개로 중력을 암시적으로 거스른다. 작가의 개입과 해석에 의해 무거운 것이 가볍게, 견고한 것이 일시적이고 덧없는 것으로 탈바꿈된다는 점에서 일종의 변태(존재가 자유자재로 그 태와 꼴을 바꾸는)와 아이러니(역설)가 작가의 주요 문법임을 알겠다. 작가의 작업에는 흔히 상황논리를 설명해줄 최소한의 오브제와 함께 말과 사람이 등장한다.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작가 자신의 자화상이며, 작가에 의해 대리되는 현대인의 초상일 것이다. 그리고 말은 이상을 상징하고 여행을 상징하고 유목을 상징한다. 그 개념의 목록들이 하나같이 작가의 주제에 부합한다는 점에서 말은 작가의 분신인 얼터에고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근작에서 사슴과 코끼리 그리고 낙타와 같은 또 다른 분신을 제안한다. 특히 낙타는 사막에 산다. 그리고 사막은 흔히 척박한 세상살이를 상징하고, 선인장과 함께 낙타는 그 척박한 살림살이를 살아내는 존재일반에 비유된다. 선인장과 낙타는 척박한 환경에서 최소한의 수분과 양분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도록 진화된 몸 구조를 하고 있다. 사막은 넓고 낙타는 키가 크다. 그래서 남보다 먼저 보고 남보다 멀리 본다. 남보다 먼저 보고 남보다 멀리 볼 수 있는 존재는 그 예지력으로 인해 고독하다. 그래서 낙타는 고고한 탓에 고독한 존재를 상징한다. 이상주의자를 상징한다. 그런데 작가가 조형한 낙타는 팔다리가 실제보다 더 길고, 그 만큼 높다란 키를 가지고 있다. 대상의 특징을 과장한 경우로 볼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그 상징적 의미를 더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낙타의 긴 다리는 말하자면 그 긴 다리만큼이나 높고 아득하고 먼 이상을 상징하고, 이상주의자의 운명이랄 수 있는 고독을 암시한다. ● 운명적으로 낙타는 쉴 수가 없다(쉬어서는 안 된다). 일단 주저앉은 낙타는 자력으로는 다시 일어설 수가 없다. 한번 넘어지면 스스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코뿔소와 같다. 여기서 실제 유무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작가는 낙타의 생물학적 닮은꼴이나 생리보다는 인간상황에 대한 유비에 관심이 있고, 그 관심으로 인해 낙타를 소재로서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징적 의미에 대해선 현실원칙보다는 신화적 사실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상식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이런 신화적 사실을 따르자면, 키가 큰 낙타는 키가 작은 낙타보다 자력으로 일어서기가 더 힘들 것이다. 이상이 높은 사람은 그렇게 높아진 이상만큼이나 다시 현실로 되돌아오기가 어렵다. 사람들은 이상을 꿈꾼다. 단순하게는 현실을 잊고 싶어서이다. 현실이 힘들수록 이상도 커진다. 일종의 보상심리다. 현실이 아니라면 이상으로라도 충족되어져야 한다. 리비도 원칙이며 엔트로피 법칙이다. 그렇게 이상을 키우다가 마침내 아득해진다. 현실로부터 멀어지다가 종래에는 보이지도 않게 된다. 그러므로 작가가 제시하고 있는 눈에 띠게 높다란 키를 가진 낙타는 (진정한?) 이상주의자를 상징하고, (적어도 저마다의 무의식 속에서만큼은) 다시 현실로 복귀할 수 없을 지경으로 멀리까지 가버린 현대인의 꿈을 암시한다. ● 낙타가 서있는 아래쪽 바닥에는 공이 놓여있다. 외계를 투명하게 반영하는 거울 같은 공이다. 낙타가 사는 지구를 의미할 수도 있겠고, 자기를 반영하는 자기반성적인 거울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숫자들이 흩어져 있다. 삶의 시간이며 시계를 의미할 것이다. 자신이 살아온 삶의 시간을 헤아리는 것은 가장 본질적인 행위이며, 존재론적 행위이며, 아마도 예술적 행위일 것이다. 낙타는 그 생긴 꼴이 왠지 현실적인 동물이라기보다는 비현실적인 존재 같고, 외계에서 온 존재 같고, 신화적인 존재 같다. 작가는 그 신화적인 존재와 더불어 꿈을 꾸자고 초대하는 것 같다. 때론 그렇게 꿈을 꾸다가 영영 현실로 다시 돌아오지 못해도 좋을 것이다. ■ 고충환
한국인 장태묵초대전을 열며... ● 과거에서 모더니티로 인도하는 여러 갈래의 길들이 교차하는 숲 가에 위치한 Millet Museum은 두 가지 이유로 인해 놀라운 장태묵 작가의 전시를 망설임 없이 개최하게 되었다. 우선 첫 번째 놀라움은 화가의 선택에 있다. 한국인인 장태묵 작가는 야외 풍경을 화폭에 담은 풍경화의 요람인 바르비죵의 노선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풍경화가이다. 또 하나 놀라운 점은 그가 보여주고 응시하게 해주는 데 있는데, 한 달 간 전시되는 그의 작품들은 평온함과 평정을 불러일으키는 우수에 찬 숲 혹은 조용한 강과 호수와 같은 침묵이 가득한 풍경을 펼쳐놓고 있기 때문이다. 박물관으로서는 또한 이번 전시가, 인상주의 화가 이전에 외부를 향한 이러한 움직임을 이끌었던 당시에 매우 혁신적이었던 바르비죵 학파에 대한 오마쥬이며, 언제나 그리고 여전히 전 세계의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유명한 Jean-François Millet 파에 위치한 모든 예술가들이 그들 당대에도 그러했듯이, 외국으로의 전달과 교류를 그 소명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그들처럼 장태묵 작가도 자연을 찬양하고 찬미한다. 자연이 화폭을 점령하고 있다. 이것이 끈질기게 반복되는 이미지이다. 작가는 오로지 첫 번째 받은 자신의 인상, 처음에 받은 자신의 감동만을 화폭에 담으려고 노력한다.
서울 예술 학교에서 수학한 작가는 이러한 인상을 잘 포착하기 위해 자신의 자발성(Spontaneity)이 표현되도록 내버려 두기를 좋아하지만, 이는 절제된 자발성이다. 왜냐하면 창호지 위에 잉크를 번지게 하는 전통적인 기법 속에서 캔버스지와 아크릴이라는 현대적인 매체를 다루는 노하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사실 수면에 비친 풍경, 공기의 부드러움, 나무들의 가벼운 흔들림을 포착하기 위한 제스처의 유려함이 느껴진다. 캔버스 지에 혼을 불어넣는 물과 그 물에 반사된 풍경 혹은 땅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독창적인 공간배치에서 화가의 기발함이 보여지며, 겸손함과 지혜로 가득 찬 아시아적인 시선은 끊임없이 아래로 향한다. 아시아의 철학적인 전통에서 자양을 얻은 이러한 관조는 빛을 제압할 줄 안다. 작가의 영적 탐색이 그 초점을 맞추는 물, 공기, 땅과 같은 요소들이 지배하는 작품의 구도는 평온하다. 작가의 그림은 모두 「천 개의 강에 새겨진 나무들」이라는 동일한 제목을 가진다. 간결함의 예술, 단순함의 절정… ■ Hiam FAR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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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121109c | 상하이 아트페어 출품작 SHANGHAI ART FAIR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