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부산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am~07:00pm
동백아트센터 DONGBAEK ARTCENTER 부산시 해운대구 중2동 1500-6번지 Tel. +82.51.744.6161
민화, 마모된 의미의 재구성 ● 문자의 매력은 무엇보다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의 명료성에 있다. 애매모호함보다 지칭과 의미 전달의 명료성과 그 의미 적용에서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일관성 때문이다. 누구나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는 문자 언어의 특징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런 만큼 개인적인 이해나 느낌, 표현이랄 수 있는 부분의 배제는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문자는 풍부한 경험의 미세한 차이를 담기에 때로 건조하다. 류현욱의 이번 작품들은 모두 기존하는 민화나 산신도, 문자도 등을 차용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민화에서 목격되는 문자적 명료성과 이미지의 친근성에 주목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림으로 가능한 상상력과 의미 사이가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지점인 것 같다. 민화나 산신도, 문자도의 특징은 이제 예사로운 방법이자 소재가 되고 있다. 앞 시대의 유명한 작품들뿐 아니라 현역작가들의 작품 역시 서슴없이 차용되고 있다. 후기모더니즘의 한 증후로 오리지널한 의미나 방법의 해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원본에 대한 존중이나 경외감보다 그것을 재구성하고 활용하여 의미의 외연과 내포를 넓히는 데 초점이 가 있는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그것은 때로 독창적 창의성을 의심하게 하지만 오늘날의 작가들이 자연이라는 직접경험보다 도시가 만든 간접적인 경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증상들이기도 하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정보화 되고 구성되어 있다. 일상생활은 이를 만나고 익히고 경험하게 할 뿐, 어떤 것에도 직접적 경험에 노출되게 하지 않는 기묘한 시대상의 하나를 보여준다. 정보는 이제 경험이고 소재이다. 그것을 가지고 작업을 한다는 것은 기존하는 것들로부터 시작하게 한다. 풍경이 아니라 풍경 사진으로, 고화나 명작을 묘사하면서 그 어법을 배우기보다 그것들을 패러디하거나 재구성해서 차이를 만드는 게 더 급박하다. 그리고 그런 것들에 더 매료되어 있다.
류현욱의 작품 역시 이런 시대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한계라기보다 그런 형식과 양식이야말로 이 시대의 반영이고 성찰이며, 문제의 도출이기도 하다. 민화나 문자도, 산신도 등의 차용이 일반화 되었다는 것은 대상이 실재의 구체성이나 현실이 아니라 현실을 구성한 정보가 구체적 현실을 대신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민화나 산신도 등의 고화가 현대화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은 전근대적인 정보가 현실 구성의 한축이 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민화는 현세 구복적 의미체로서 민간신앙의 주술적인 특징을 지닌다. 그림이라기보다 문자 언어를 대신한다는 특징은 그런 차원에서이다. 주술적 의미와 음성을 대신하는 셈이다. 그것이 현재의 구복성(求福性)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 날 민화의 차용이 주술의 현재화라는 측면에서 고찰될 수 있다면 혹은 대중이 그런 점에서 매료되고 있다면 차용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림의 근원성에 대한 고찰을 새롭게 제기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류현욱의 작품에는 소재, 구성, 방법의 변용, 분명한 인용과 차용이 민화에서 오고 있다. 닭, 사슴, 거북, 수석, 파랑새, 대, 매화, 문자 등 민화와 삼재부적에 쓰이는 소재들이 어렵지 않게 목격된다. 수석은 호랑이를 닮은 것으로 형상과 의미라는 이중성을 가진 것으로 등장한다. 더구나 이번 전시의 작품 전체를 이끌고 있는 모란은 노골적일 정도로 문자언어의의미와 주술성을 부정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모란은 부귀와 재물의 상징이다. 붉고 화려한 색상이 주는 소구력 또한 이런 의미를 더한다. 산신도에나 나올법한 삼신할미나 보살들이 등장하는 것도 이런 의미의 현실적 구복행위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파랑새와 파도, 현무, 주작으로 보이는 형상들 역시 용왕신화와 무관하지 않으며 재화와 복을빌고 장애를 없애려는 기원의 하나이다. 붉은색과 푸른색의 대조로 작품 전체를 구조화하고 있는 태도 역시 이런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의 문자도 역시 기쁠 喜(희)와 복 福(복)자가 주종이다. 이런 작품상의 맥락 때문에 그가 민화의 구복성을 자신의 작품에서 재연하려 한 것은 아닐까 하고 의문도 가진다. 소재와 구성, 채색에서 민화의 분명한 수용 때문에 회화적 의지가 무엇인지 묻게 된다. 거칠게 민화를 옮겨 놓은 듯 한 표현 역시 의도와 다르게 표현의 한계나 자신의 감성적 영역으로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될 수 있다. 회화로서 감성, 자신만의 눈썰미와 언어로 재구성된 민감한 영역의 감지와 표현이 없다면 차용이라는 일반적인 혐의는 여전하게 남게 된다. 새로운 회화성에 대한 탐색이나 의지가 아니라면 민화 재생산이 무엇이겠는가. 민화의 역사적 의미를 재탕해서 그가 제기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니면 유행처럼 번진 포스트모더니즘 류의 이론으로 민화 차용의 안이함을 은폐하려는 것일까.
그런 의문은 空(공)이라는 문자도의 제작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의 작업은 민화가 아니라 민화적일 뿐이며, 민화의 의미와 주술성을 부정하지 않지만 회화일 뿐이다. 그것을 위해 空(공)에 대한 무속적이거나 불교적 혹은 도가적 의미를 담론화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공은 다만 비어 있음이고 그 비어 있음은 없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 무엇이라도 가능한 하나의 가능성으로 주어지고 인식된다는 것이다. 문자도의 喜(희)와 福(복)은 희와 복의 의미를 분명하게 보여주지만 개인적인 감성적 영역, 문자로 잡히지 않는 어떤것, 섬세하게 드러나는 개별적인 문제를 담을 수 없다, 그것이 문자 안에 들어선 시각이미지의 병용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시각이미지의 병용이라는 측면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있다는 반증이 空(공)이라는 문자도의 작업이다. 공은 인간의 욕망을 담을 수 있는 가능성일 뿐이다. 그의 문자도는 다만 그런 가능성으로 보여질 뿐이지 전근대의 주술적 의미를 그대로 옮겨놓자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온갖 것을 문자화할 수 있으며, 그 곳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무한, 즉 空(공)이라는 입장에 다르지 않다. 다만 공의 무한성이 공허하지 않으려면 무한한 변형 가능성의 원천적 인식이어야 하며 그런 면에서 그의 작업은 민화와 다른 측면을 열어줄 것이다. 민화의 조형적 특징이기도 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작업은 분명할 정도로 평면성을 추구한 다. 평면은 사물을 배열할 수 있지만 현실적 원근을 표현할 수 없다. 그가 흔하게 묘사하고 있는 모란조차 입체감을 얻기보다 모란이라는 지칭성을 보여주는 기호에 가깝다. 물론 중첩이나 크기, 대상 사이의 공간을 이용해서 현실적 공간 효과를 얻기도 하지만 현실적 공간감을 얻거나 묘사하는 그런 차원과 다르다. 그가 그리는 것이 민화의 소재이듯 그의 관심은 현실이 아니다. 현실적 상황과 경험의 문제에 대응하기보다 현실에 대한 문자적 구성이다. 문자로 문장을 구성하듯, 민화의 소재들로 어색하지만 문장을 구성해보는 것이다. 고법을 따른 어색한 문장, 표기를 얻어내는 낡은 소재들은 그 언어가 만드는 마모된 의미 사이에서 얻어지는 생경함이다.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의 친숙함에 묻힌 생경함을 보아내는 것이다. 차용된 언어의 재구성은 문자 언어의 자획이 갖는 의미의 규정성을 일탈하거나 비틀게 마련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규정적인 의미를 넘어서고 민화를 현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글속의 그림, 그림 속의 글이란 다름 아니라 그림 속에 시가 있고, 시 속에 그림이 있다는 唐詩(당나라 시)의 한 구절이지만 그림과 문자 언어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글과 그림의 본래적 기능에 대해 물음을 제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작업은 아마 이런 차원, 인간이 가진 본능적 욕망이 문자적 의미와 시각이미지 사이에서 어떻게 변용되어 나타나는지를 보아내려 한다. 류현욱의 작업은 문자 언어의 규정과 차용된 민화풍의 그림이 펼치는 비규정 사이에서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읽어내는 일, 민화 차용이라는 방법으로 친숙함과 도식화 사이에 있는 마모된/마모되지 않은 욕망들을 들추어 보는 일이다. ■ 강선학
Vol.20121105c | 류현욱展 / RYOUHYUNUK / 柳炫旭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