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중각성 夢中覺醒

이정웅展 / LEEJEONGWOONG / 李正雄 / painting   2012_1025 ▶ 2012_1125 / 월요일 휴관

이정웅_Anemone Blues_캔버스에 유채_112.2×193.9cm_2012

초대일시 / 2012_1025_목요일_06:00pm

작가와의 대화 / 2012_1025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16번지 GALLERY HYUNDAI 16 BUNGEE 서울 종로구 사간동 16번지 Tel. +82.2.722.3516 www.16bungee.com

이정웅의 작품은 '꿈'으로 가득 찬 세상을 표현한다. 시공간은 서로 뒤섞여 있고 이미지들은 서로 일관적인 내러티브를 거부하듯 부유하며 떠돈다. 작가가 구축한 화면은 독특한 공간구획으로 2009년 아트스페이스 휴에서 열린 그의 첫 개인전인 '몽상'과 연장선상에 있다. 이전의 공간처리에서도 이런 레이어드(layered)가 엿보였지만, '몽중각성'으로 묶인 작품들은 마치 두 개의 필름을 겹쳐둔 모양으로 다른 시공간이 연극적인 무대처럼 등장한다. 이정웅의 '몽중각성'은 이중적이다. 이는 꿈속인데도 현실처럼 느껴지는 '각성'적 순간을 의미하며, 반대로 현실에서는 꿈처럼 좋은 순간, '이것은 꿈인가'하고 생각하는 지점을 '몽중각성'에서 느낄 수 있다. '몽중각성'은 꿈과 현실에서 경험하는 데자뷔(Déjà vu)가 발현된 시공간이다. 꿈속에서 깨어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든, 꿈처럼 생생한 것을 현실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든, 그의 작업에는 꿈과 현실의 세계, 무의식과 의식,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교차한다. 상반되는 개념들은 서로 이분법적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양 경계를 오가며 동떨어진 시간과 공간을 묘하게 희석시킨다. '그림에서처럼 시에서도(Ut pictura poesis)'라는 말처럼, 이정웅의 작품은 문학과 회화의 매체적 특징을 끌어들인 '복합예술(composite art)'을 혼용한다. 

이정웅_Clytie_캔버스에 유채_193.9×112cm_2012

이정웅의 작업에는 라파엘전파 화가인 로렌스 알마-타데마(Sir Lawrence Alma-Tadema)의 붓 터치, 상징주의 화가들이 보여준 시적이고 문학적인 구조, 리얼리스트들이 보여준 동시대성과 일상성의 반영과 같은 다양한 특징이 혼재한다. 홍대 앞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에서 볼 수 있는 러시아 화가 일리야 레핀(Ilya Repin)에 관한 책은 이정웅이 상당히 다양한 작가들의 작업을 참조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해석적 차원으로 번안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서구 작가들의 작업은 이정웅이라는 젊은 작가에게 하나의 출발점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알레고리적인 내러티브를 지양하고, 과거의 기억과 시점을 환기시키는 행위를 통해 꿈을 매개로 현재와 과거를 중첩시켜, 초현실주의적인 화면으로 그림을 재구성한다. 즉, 그는 여러 개의 화면을 몽타쥬처럼 재조합하여 그가 경험한 현실을 꿈으로, 그가 꾼 꿈을 현실로 '꼴라주'식으로 재구성한다. 작가는 퍼즐처럼 '완벽하게' 들어맞는 '몽중각성'을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역설적으로 만남과 사랑, 이별 등 꿈으로도 표현될 수 없는 다양한 감정의 깊이와 폭을 이미지로 전환시킨다. 그의 그림은 인간과 인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와 말 대신에, 침묵을 선택한다.

이정웅_Healing Time_패널에 유채_41.5×60cm_2012

16번지에 전시되는 10여점이 넘는 그의 작업에는 공통적인 시선이 존재한다. 그 어느 작업도 관람자를 직시하거나 응시하는 회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시선은 연극 무대 앞에 서 있는 '우리'의 눈을 비켜 오히려 내면을 향한다. 등장인물들은 내적 비전과 심리적인 몰입에 다가감으로써, 현상학적인 지점에서는 만날 수 없는 새로운 감정적인 지층들을 보여준다. 이러한 심리적인 잔상효과는 과거와 현재의 기억과 연관된 이미지를 '필름 몽타주'와 같은 방식으로 펼쳐두는 독특한 화면 구성덕분이다. 이정웅의 작업은 전체를 보고서도 전체를 말할 수 없으며, 일부를 보았으면서도 전체를 예감할 수 없는 모호한 화면을 의도적으로 구성한다. 「Silently Parade」와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이정웅의 이번 전시는 2009년 첫 개인전에서 제시되었던 개념과 과히 다르지 않다. 그러나 처음 등장했던 죽음과 이별이라는 주제는 작가 스스로의 경험에서 출발했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이러한 경험들이 즉물적으로 표현되지 않고 오히려 알레고리적인 느낌을 전달한다. 2012년 근작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남성은 작가의 자화상이다. 「Silently Parade」에서는 한 사건을 진행하는 캐릭터로 작가 자신이 출현하지만, 주인공이 아닌 이 사건을 보완해주는 가이드로서 존재한다.

이정웅_Monkey Magic_캔버스에 유채_72.5×117cm_2012

이러한 작업은 한 편의 연작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러면서도 모호한 불협화음도 존재한다. 작가는 뚜렷한 내러티브를 만들기를 거부하면서도 사건을 인도하는 가이드처럼 자신을 등장시키며, 현세가 아닌 다른 세상에서 바라보는 시선으로 나타난다. 자신을 연출자로 규정하면서도 인터뷰에서 검정색 옷을 입은 인물이 '저승사자'라는 언급한다. 그러나 무서운 모습으로 인간의 영혼을 뺏어가는 서구의 저승사자가 아닌, 때로는 해학적인 인물로 때로는 인간적인 인물로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하던 메신저로서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킨다. 멜랑꼴리한 자화상 왼쪽에는 동시대 복장을 한 여성이 춤을 추고 있다.

이정웅_Silently Parade_캔버스에 유채_193.9×390.9cm_2012

「아네모네 블루스(Anemone Blues)」에서도 같은 여성과 갓을 쓴 자화상이 동시에 등장한다. 바람의 신인 제피로스가 사랑했던 시녀 아네모네는 제피로스의 부인인 플로라의 질투로 꽃이 되어 사랑의 괴로움이란 꽃말로 사람들 입에서 회자되어 왔다. 전경에는 중앙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과 무관한 누드상이 배치되어 있으며, 일본풍의 머리스타일을 한 남성이 동시대 복장을 입은 여성을 안고 달래는 모습이 표현되었다. 오른쪽의 인물은 우연한 사건인 듯 가장자리가 크로핑(cropping)되어 이 모든 것은 계산적이면서도 우연적인, 친숙하면서도 낯선 양가성을 지닌 화면을 보여준다. 여기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연극 무대의 속성이다. 전경을 프리즈(frieze), 부조화처럼 수평구조로 만들어 '연극적인' 무대를 연출하는 것이다. 인생은 어차피 연극적인 액팅이고, 이 액션에는 인간의 희로애락이 묻어있는 무대이자, 마스커레이딩(masquerading)이 진행되는 가상공간이다. 무릎을 꿇어앉은 인물도, 여성을 달래는 남성도 결국 그들이 쓴 가발을 벗고 나면 자화상과 똑같은 인물로 변신한다.

이정웅_그릇이 작다_캔버스에 유채_97×193.9cm_2012

「클뤼티에/(Clytie)」라는 작품도 역시 이러한 '기다림'과 '바니타스(vanitas)'를 해바라기와 해골이라는 알레고리적인 모티프를 통해 전달한다. 물의 요정이었던 클뤼티에는 태양신 아폴로와 사랑을 나누지만, 그에게서 버림받고 아무 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발가벗은 채 9일 동안 자신을 버린 아폴로를 바라보았다. 9일이 지난 후 클뤼티에는 해바라기로 변해버렸다는 그리스 신화를 보여주듯, 그림 속의 여성은 누군가를 기다리듯 왼쪽을 직시한다. 이정웅의 작품 속에는 아네모네, 해바라기 외에도 연꽃, 백합, 타래붓꽃 등도 등장해 알레고리적인 내러티브를 제시한다. 그러나 꽃말이 전달하는 희망과 절망, 사랑과 비애의 감성은 쉽게 해독될 수 없는 이미지들의 모호함 때문에 오히려 직설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Monkey Magic」에는 과거시험에 급제한 사람이 쓴 어사화(御史花)로 장식된 모자를 쓴 인물(자화상)이 등장하지만, 의자에 앉은 여성은 남성의 제스처와는 전혀 다른 무관심을 표명한다. 작가는 오리엔탈리스트(Orientalist) 화가들이 많이 구사했던 이국적인 모티프를 사용해 이러한 사건이 지금, 여기가 '아닌' 형식으로 제시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몽중각성'은 꿈과 침묵으로 말을 던지는 리얼리티의 세계이다. 과거의 형식을 통해 지금, 여기를 이야기 한다. 

이정웅_타래붓꽃 Iris Lactea var.chinensis(Fisch.)Koidz_캔버스에 유채_91×117cm_2012

이정웅은 이야기에 저항하지만 이미지로 존재하는 알레고리와 이야기를 거부하는 작가는 아니다. 그는 스케치에 시나리오를 정하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화면에 들어서는 이미지와의 '대화'를 통해 그림을 완성해나간다. 이러한 과정은 그림그리기에 많은 시간을 요하며, 꼼꼼하게 채워진 화면은 대화의 흔적이 오간 시간성을 보여준다. 이미지는 시간성의 흔적이자, 그리기라는 노동의 결과이기도 하다. 작업실에 붙어있는 사진 속 여성과 자화상은 인물과 세팅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데, 이것들은 드로잉과 같은 사전 작업에 해당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정웅의 '몽중각성'은 이번에 전시되는 「Healing Time」이라는 작업이 알려주듯이, '치유의 시간'으로 와 닿는다. 파편화된 이미지의 꼴라주로 배치된 신화와 꿈은 과거와 현재의 기억이 만나면서 과거와 현재가 의미가 없어진 새로운 시공간을 형성한다. 즉, '각성'은 단순히 '깨닫는다'라는 의미를 넘어 사물과 관념의 탈신화화(脫神話化)로 전치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정웅의 꿈은 비로소 세상과의 두 번의 조우(개인전)를 통해 탈신화화 된다. 그렇게 본다면, 이정웅의 '몽중각성'은 꿈과 현실(실재)이 서로 맞닿아 있는 호접지몽(胡蝶之夢)으로 가는 첫 출발점이다. ■ 정연심

Vol.20121025d | 이정웅展 / LEEJEONGWOONG / 李正雄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