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무든 장글란 1

김미숙展 / KIMMEESOOK / 金美淑 / photography   2012_1022 ▶ 2012_1122 / 수요일 휴관

김미숙_Myrtle Beach, South Carolina_디지털 프린트_60×60cm_2004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더스텝 작가동 105호 갤러리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 예술마을 6번게이트 TEL. +82.10.9091.4403

아르카디아의 노스텔지아 ● 자연 풍경을 주제로 한 회화 '풍경Landscape'이라는 말은 네덜란드와 벨기에 지방에서 사용되었던 언어에서 유래한 것이며, 16세기 후반 즈음 처음으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초의 순수한 풍경화가로 불린 독일의 알트도르퍼Altdorfer는 '그림은 이야기를 전달해야 한다.'는 인습을 깨뜨린다. 그러니까 독자적인 자연 풍경이 주제가 된 시발점인 것이다. 그러나 Landscape painting으로 명명된 풍경화가 미술사에 또렷한 장르로 자리하기까지는 얀 반 호이엔Jan van Goyen,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을 거쳐 18세기 컨스터블Constable, 터너Turner의 시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풍경화의 위상은 20세기에 들어 난해함의 강도를 점점 더해가는 현대미술에 의해 저 만큼 치워진다. 과연 풍경화와 그 계보를 충실하게 잇는 풍경사진은 종말을 맞이한 것일까?

김미숙_Sand Dune, Outer Banks in N.C._디지털 프린트_60×60cm_2004
김미숙_Tacoma, Washington_디지털 프린트_60×60cm_2004

각박한 도시를 벗어나 목가적인 전원생활을 꿈꾸는 현대인의 욕망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고르게 분포한다. 동양의 무릉도원武陵桃源이 그렇고, 서양의 아르카디아Arkadia가 그렇다. 무릉도원은 동진東晉 시대 시인 도잠陶潛의 글 『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이상향으로 전해지며, 아르카디아의 경우는 무릉도원과 달리 실제 고대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반도 중앙에 위치한 고원지대를 이른다. 고대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Vergilius가 아르카디아를 풍요의 낙원으로 묘사한 이후, 후대 화가들에 영감을 불어넣어 아르카디아는 대자연의 풍요로움이 가득한 낙원으로 세인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그리하여 무릉도원과 아르카디아의 DNA를 이어 받은 현대인은 여전히 유토피아를 꿈꾼다.

김미숙_Outer Banks, North Carolina_디지털 프린트_60×60cm_2004

여기, 바다와 해변, 능선과 구름, 나무와 이름 모를 날짐승, 점점點點한 인간을 주인공으로 한 풍경사진이 있다. 이번 김미숙의 작업에서 아르카디아를 떠올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 모두 무릉도원의 후예이자 아르카디아의 지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어렵지 않게 떠올린 아르카디아는 감상자를 즉각적으로 반응케 한다. 현대미술의 전략인 은폐나, 비꼬기, 탈의미의 술수가 제거된 김미숙의 풍경은 '아! 그리로 떠나고 싶어...'를 자연스레 읊조리게 만든다. 그렇게 김미숙은 자신의 의도를 단도직입으로 드러내는데 이는 고매하기 그지없는 현대미술에 대해 뾰로통한 표정 짓기로도 보인다. 원근법에 충실한 소실점의 이미지는 소실점 끝까지 발을 내딛게 하는 무의식적 방랑 본능을 충동케 하고, 티 없이 맑은 바다와 뭉게구름은 모든 세상의 요령을 내려놓게 만든다. 그렇게 무장해제된 곳에서 몇몇의 사람들은 자연과 일체되어 노닐며 이윽고 사람이 곧 풍경이 된다. 또한 클로즈업 촬영된 이끼 낀 나무와 고목枯木은 푸생Poussin의 「아르카디아의 목동들」처럼 죽음마저 포용한 자연과 삶의 궁극적 조화 'Et in Arcadia Ego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의 치환이 아니고 무엇이랴.

김미숙_Blue Ridge Parkway, N.C._디지털 프린트_60×60cm_2004

김미숙의 제목 붙이기는 또 다른 흥미를 준다. 고려시대 작자 미상의 가요 청산별곡靑山別曲은 해석자의 견해에 따라 각기 다른 주석이 뒤따른다. 민중의 괴로운 삶, 광대 등의 혼합집단의 노래, 여인의 한과 고독,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김미숙은 청산별곡의 또 다른 해석자로 등장한다. 청산별곡에 나오는 '잉무든 장글란' 즉, '이끼 묻은 쟁기를' 힘든 노동과 결별하고 자연과 유유자적하는 표상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전시 제목으로 『잉무든 장글란』을 전면에 내세운다. 고려시대의 잉무든 장글란과 이국적인 아르카디아적 풍경에서 불협화를 보는 듯한 시선을 보낼 필요는 없다. 다시금 강조하건데 시대와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 공통정서가 바로 무릉도원이요 아르카디아이기 때문이다.

김미숙_Niagara River, New York_디지털 프린트_60×60cm_2004
김미숙_Duke Forest, Durham in N.C._디지털 프린트_60×60cm_2004

김미숙의 작품은 이렇듯 잊혀진 아르카디아의 노스텔지아를, 동서고금의 감각적 정서를, 솔직담백하게 부른다. 아니 저 만큼 치워진 아르카디아의 복권, 픽처레스크picturesque의 귀환을 암암리에 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 안수영

Vol.20121023c | 김미숙展 / KIMMEESOOK / 金美淑 / photography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