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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1020_토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스페이스 라디오 엠 SPACE RADIO M 서울 종로구 삼청로 2길 37-2 (소격동 127번지) B1
춤추는 감각 ● 책장 후미진 곳에서 삼십년 가깝게 자리를 지킨 책 한 권을 꺼내 든다. 수잔 랭거Susanne K. Langer의 1984년 초판 번역본 『예술이란 무엇인가』. 오래된 책 내음에 코가 반응한다. 오래된 책 내음, 그 독특한 향의 생성과정을 난 알지 못한다. 더군다나 그 내음의 화학적 발화 과정을 자세히 분석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이를테면, 눈물이 왜 흐르는지, 눈물의 구성요소를 현미경으로 분석하기보다는 육체에서 분비된 느낌의 반응으로만 헤아리고 싶을 뿐인 것처럼. 춤 또한 그러하다. 코가 반응하듯, 눈물이 흐르듯, 랭거는 무용(춤)이야 말로 최초의 참다운 예술이라 했다. 고전 발레에서부터 브레이크댄스까지 수백 종의 춤과 형식들이 시대를 이어 즐비하지만, 여전히 막춤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타고난 몸치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춤이란 형식의 틀 이전에 존재하고 있었던 원초적인 몸의 반응, 나아가 아이스테시스aisthesis의 원형이자 현현이기 때문이다.
한문순이 선택한 오브제들은 그 용도가 다해 폐기를 목전에 두거나 폐기당한 것들이다. 그녀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의자는 길거리에 버려진 것들이고, 인테리어용 율마와 국화, 절화 백합은 생명을 다해 말라 비틀어진 상태다. 토르소 위에 얹혀진 조화가 그렇고 유행이 지난 구두가 그렇다. 이렇게 용도 폐기된 오브제를 선택한 이유를 정확히 알 길 없지만 단순하게 그녀의 작업을 정크아트Junk Art로 부르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그렇다고 바니타스Vanitas적 정물이라고 하기엔 더더욱 난감하다. 정크아트는 폐기물을 이용한 일련의 작가들이 노린 문명의 비판과 거리를 두고, 바니타스에 함축된 인생의 허무나 덧없음과는 더 멀리 떨어진 한문순의 작업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한문순의 작업을 다소 거칠게 표현하자면 '감각적으로 반응하기'이다. '감각적으로'란 작가가 선택한 오브제와 작가의 시선이 만날 때, 눈은 오브제 구석구석을 쓰다듬고 어루만진다. 생각하는 눈이 아니라 만지는 눈. 이러한 가상의 접촉에서 생겨나는 떨림. 그것이 한문순이 체험한 감각이다. 떨림의 진동은 동공을 통하여 뇌와 심장을 거쳐 사지로 펴져간다. 거기에 코를 통해 감각한 오브제의 내음은 떨림을 증폭시키는 앰플리파이어다.
'반응하기'란 생겨나고 증폭된 떨림을 수용하는 과정이다. 한문순의 작업에서 나는 춤을 본다. 다시 말해 사진기법으로 완성된 2차원 평면의 이미지에서 넘실거리는 춤사위와 마주한다. 찰나와 연속이 교묘하게 결합된 이미지는 춤의 속성인 운동력, 중심과 방사, 갈등과 합화, 고양과 하강을 보여준다. 무의식적으로 떨림에 몸을 맡기는 감각적 반응은 카메라 쉐이킹shaking기법을 통하여 드러난다. 오브제를 수용하는 행위가 촬영이고 촬영이 그녀만의 춤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춤은 어느 장르에도 속하지 않은 독자적인 막춤이다. 요컨대 아이스테시스의 또 다른 현현인 셈이다. 또한 한문순의 작업은 드러내기와 지우기의 경계를 허문다. 드러내기는 수천분의 일초 즉, 찰나의 순간광으로 나타나며, 지우기는 장노출과 쉐이킹을 결합한 연속된 시간의 누적으로 이미지는 사라진다. 그렇게 드러나고 지워진 이미지는 스며들 듯 합체된다. 찰나의 합이 연속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러나 한문순의 작업이 모두 감각적으로 반응한 결과만은 아니다. 영악하게도 앵포르멜Informel의 지향점중 하나인 단일 의미의 탈피, 형이상학적 재현의 붕괴를 가져온 유사와 상사, 마그리트가 천착했던 ~이다 ~아니다, 고흐의 낡은 구두를 해석학에서 해방시킨 해체Deconstruction, 그리고 복제에 대한 원본의 우월적 지위를 무너뜨린 시뮬라크르simulacre와 교묘하게 관계시킨다. 예를 들면, 작품 「프란시스Francis Ⅰ~Ⅲ」에서 등장한 의자는 일반인이 사용했던 의자에서 출발하여 멀리 17세기 벨라스케스가 재현했던 교황의 의자로, 다시 프란시스 베이컨의 의자로 의미의 선회곡선을 그리며 단일 의미를 탈피한다. 원본과 복제의 닮음을 포기한 상사처럼 원본과 전혀 다른 프란시스의 의자로 둔갑하며,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고 텍스트로 강조한 마그리트의 주장과 달리 텍스트가 생략되어도 한문순의 의자는 의자이면서 이미 의자가 아니다. 또한 의자는 본래의 형상을 간직하듯 지워지며 해체되고 이윽고, 의자는 원본의 의자가 가진 지위를 탈취하여 원본을 능가하는 위상을 획득한 시뮬라크르인 것이다. 과연 한문순은 이러한 넘나들기의 사유체계 속에서 작업을 전개하였을까?
지적잠입이 감성적 도약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선결조건으로 믿고 있는 대다수의 예술가들은 오늘도 잠입중이다. 그리하여 작품은 부재하고 철학은 넘쳐난다. 지적잠입이 명쾌한 관통으로 이어지지 못한 때문이고, 잠입에만 몰입하여 엉성한 흉내내기에 급급한 까닭이다. 기이하게도 잠입으로부터 관통하는 여정을 거스르는 한문순의 작업은 이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녀는 이미 관통 저편에서 이편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오랜 공백 끝에 드러낸 한문순의 작업이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노작勞作으로 자리하려면 지속적인 떨림의 춤추기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이성적 질서와 합리적 판단을 횡단하며 자유로움이 넘쳐나는 감각의 춤추기. 무엇이 두려우랴. 이미 리좀Rhyzome으로 부터 응원의 박수를 받고 있지 아니한가. ■ 안수영
Vol.20121020i | 한문순展 / HANMOONSOON / 韓文順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