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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1017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주말,공휴일_11:00am~06:00pm
바움아트갤러리 BAUMART GALLERY 서울 종로구 원서동 228번지 볼재빌딩 1층 Tel. +82.2.742.0480 www.baumartgallery.co.kr
김효숙의 조각-내면으로의 여행, 진정한 휴식에 이르는 길 ● 나는, 여기에, 내가 바라본 기억 속에서 발견한 기쁨과 슬픔, 삶과 죽음 등 마주선 관념들 사이의 깊은 심연을 들여다본다는 작가의 고백에는 깊은 울림이 있다. 깊은 심연이 있고 깊은 슬픔이 있고 깊은 독백이 있고 깊은 문학이 있다. 슬픔이 깊으면 카타르시스가 되고 환희가 되고 절정이 돼 터져 나온다. 이렇게 터져 나온 기쁨을 어쩌지 못해 걷잡을 수가 없게 된다. 그렇게 슬픔은 기쁨으로 승화되고 기쁨과 통한다.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깊다는 것, 자기 내면 깊숙이 침잠해 들어간다는 것은 감각적 실재와는 다른 실재에 이르고 싶다는, 어쩌면 감각적 실재를 밀어올린 원인에 도달하고 싶다는 열망이며 바램이다. 작가가 조각을 하는 이유이며 작업에 천착하는 원인이다. 조각을 매개로, 작업을 경유하여 나는 나의 내면에 도달하고 싶다. 그러므로 나에게 조각이며 작업은 나의 내면에 도달하게 해주는 여행이며 여로이며 여정이다. 그 여정에 기억이 동반하면서 길잡이 역할을 한다. 그렇게 작가는 기억 속에서 혹은 기억과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삶과 죽음을 끄집어낸다. 그 기쁨과 슬픔, 삶과 죽음은 작가의 내면으로부터 끄집어내진 것이란 점에서 주관적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기쁨과 슬픔, 삶과 죽음은 작가의 전유물이 아닌 탓에 객관적이다. 이렇게 작가는 자기 내면을 매개로 주관과 객관을 하나로 직조한다.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이며 언어를 취하면서 쉽게 공감하게 한다.
자기 내면에 이르는 여정에 기억이 동반한다고 했다. 작가에게 기억은 단순한 기억과는 다르다. 단순한 기억이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며 주체가 기억 속에 휩쓸리는 일이라면, 그렇게 흐릿하고 희뿌연 오리무중에 빠지는 일이라면, 작가에게 기억은 기억을 대상화시켜 바라보는 행위를 의미한다. 기억을 대상화시켜 바라볼 수 있기 위해선 기억과 주체와의 사이에 일정한 거리두기가 전제되어져야 한다. 무의식보다는 의식의 층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처음에 기억은 흐릿하고 애매하지만, 그것이 재생되고 복원되는 과정에서 점차 견고하고 단단해진다. 그렇게 작가는 기억을 일종의 관념으로 추슬러낸다. 그리고 그렇게 추슬러진 관념, 관념화된 기억 곧 일종의 기억 관념은 주관적 관념이면서 동시에 보편적 관념으로 승화된다. ● 작가는 자신의 조각이며 작업에서 깊은 심연을 들여다본다고 했다. 여기에 심연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모티브가 있다. 항아리며 옹기다. 작가는 유독 항아리와 옹기 같은 예스러운 것에 끌린다. 박물관에 가면 고향에 온 것처럼 편안하다고도 했다. 그저 친숙하고 정감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자연의 원형이며 존재의 원형과 마주하고 있다는 어떤 동질감 때문일 것이며, 작가가 자신의 조각이며 작업을 통해서 추구하고 이르고자 하는 어떤 경지이며 차원이기도 하다.
이런 연유로 작가의 작업엔 항아리며 옹기가 주요 모티브로서 자주 등장한다. 항아리를 들여다보면 심연이 보인다. 그저 빈 항아리를 들여다볼 때보다 큰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워 수면을 통해 수심을 들여다보면 심연은 더 잘 보인다. 이 때 수면은 일종의 거울역할을 하고, 그 거울에 수심을 통해 건져 올린 심연을 반영한다. 그저 어둑하고 컴컴하기만 한데 무엇이 보이느냐고 하겠지만, 원래 심연은 어둑한 법이고 자기 내면과 대면한다는 것은 그 어둠과, 어쩌면 어둠 자체이며 어둠의 원형일지도 모를 어둠과 직면하는 일이다. 이렇듯 어둠 자체를 반영하므로 수면은 일종의 검은 거울 곧 흑경에 해당하겠다. 여기에 항아리에는 각별한 의미마저 탑재돼 있다. 옛날 사람들은 항아리에 생명을 담았고 주검을 담았다. 태항아리가 그렇고 옹관묘 혹은 독무덤이 그렇다. 자연에 그리고 존재의 원형에 더 가까웠던 옛사람들에게 항아리는 생명과 죽음을 의미했고 시작과 끝을 의미했고 따라서 우주며 존재 자체를 의미했다. 이런 연유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항아리에는 여전히 그런 주술적이고 종교적인 염원의 잔재가 남아있고 최소한 상징적 형태로 전해진다. 무슨 거창한 종교로부터 연유한 것이라기보다는 생활사가 밀어올린 것이며 몸에 밴 것이어서 그만큼 더 자연스럽고 설득력이 있는 편이다. 아마도 작가가 항아리며 옹기를 소재로서 취한 원인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 얼굴과 토르소가 심연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또 다른 모티브로서 제안된다. 하나같이 눈과 입을 파내 뻥 뚫린 구멍을 낸 것이 흥미롭다. 바로 얼굴에 난 그 구멍이 심연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통로 구실을 한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다.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마음을 가장 많이 닮은 몸꼴이 눈이다. 마지막으로 눈을 그려 넣는 순간 그림이 용이 되어 승천한다고 해서 눈을 그려 넣기를 저어하거나 반대로 혼신을 기울였던 것도 이처럼 눈에다 각별한 의미를 부여해서이다. 그리고 입은 알다시피 숨이 드나드는 통로다(물론 음식도 들락거리지만, 여하튼). 숨이 없으면 생명도 없고, 숨 자체가 생명이다. 그래서 눈과 입의 뻥 뚫린 구멍은 그저 몸의 일부라기보다는 존재 자체에 더 가깝고 존재의 내면이며 심연에 더 가깝다. 여기에 작가는 주술적인 가면에서나 볼 법한 추상적인 패턴을 얼굴에 그려 넣어 얼굴이 그저 얼굴을 재현한 것이 아닌, 일종의 정신의 표상이며 내면의 메타포임을 알게 한다.
그리고 목 위에 얼굴을 이고 있는 토르소의 형상이 예사롭지가 않다. 도판을 구워낸 테라코타를 마치 벽돌을 쌓듯 층층이 쌓아올려 만든 형상이 무슨 건축물을 보는 것 같다. 몸은 정신이 거주하는 건축물이며 존재의 집이라는 메타포를 떠올리게 한다. 10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운 것인 만큼 돌보다 단단하거나 최소한 돌만큼 단단한 탓에 도판을 층층이 쌓아올려 형태를 깎아내는 과정에서 특히 접합부분에 저항으로 인한 비정형의 미세 균열이 생긴다. 자연스럽기도 하거니와 마치 삶이며 존재의 크고 작은 상처를 연상시키는 것이 애틋하기도 하고 예쁘기도 해서 그대로 살렸다. 그리고 토르소는 가슴에 음각으로 움푹 파인 물고기 형상을 품고 있다. 작가의 조각에 등장하는 음각이나 양각으로 표현된 물고기 형상은 절대적인 존재이며 절대자를 상징하고 그리스도의 증표에 해당한다. 가슴 곧 마음속에 절대자를 품고 사는 존재의 삶을 표상한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기억을 매개로 자기 내면으로의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이런 주제의식이 작가의 조각에 신화적인 서사에 연유한 아우라를 더한다. 알다시피 자기 내면으로의 여행은 신화의 가장 큰 주제에 속한다. 이러저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마침내 진정한 자기를 찾는 이야기는 거의 모든 종교와 문화에 깊고 넓게 뿌리 내리고 있는 이야기의 원형에 해당한다. 여기서 다시 작가는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이며 언어를 통해서 객관적인 가치며 보편적인 관심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항아리와 뻥 뚫린 사람 얼굴 형상이 심연을 들여다보게 했다면, 가방과 꽃신, 새와 물고기 형상의 모티브가 심연으로의 여행을 상징한다. 부연하면, 작가에게 물고기 형상의 모티브는 절대적인 존재를 상징하고 인간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 밑바닥에는 특히 항아리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바다가 흐르고 그 바다는 삶의 바다를 상징한다.
작가는 근작의 주제를 Rest in Nest 곧 둥지 속의 휴식으로 명명한다. 아마도 진정한 휴식과 쉼의 의미를 묻는 것일 터인데, 절대자에 귀의한 삶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죽음이야말로 지극한 휴식이며 진정한 쉼이란 점에서 죽음마저 끌어안는 삶을 의미할 것이다. 자기 내면에서 만난 심연은 어둠 자체라고 했다. 그 어둑하고 컴컴한 심연에서 기쁨을 볼 수도 슬픔을 볼 수도 삶을 볼 수도 죽음을 볼 수도 있다. 공과 허와 무를 볼 수도 있고 아무 것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심연에서 무엇을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리고 그렇게 보아낸 것을 매개로 어떻게 진정한 휴식에 이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저마다 물어볼 일이다. ■ 고충환
Vol.20121019f | 김효숙展 / GIMHYOSOOK / 金孝淑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