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준성展 / BAEJOONSUNG / 裵准晟 / painting   2012_1017 ▶ 2012_1107 / 월요일 휴관

배준성_The Costume of Painter - Phantom of Museum O , sketch girl_ 캔버스에 유채, 렌티큘러_290.9×197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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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1017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인 GALLERY IHN 서울 종로구 팔판동 141번지 Tel. +82.2.732.4677~8 www.galleryihn.com

산책자 배준성. 그림 속을 거닐다. ● 배준성은 비닐 레이어 작업과 관람자의 움직임에 따라 변화되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렌티큘러 작업 그리고 최근에 선보인 에니메이션 영상작업까지 표현의 가능성을 확장시키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전개해왔다. 관람자들로 하여금 작품을 수없이 들춰보고 움직이며 상상, 변형할 수 있는 여지를 작품에 두어왔고 이는 늘 재미있는 호응을 불러 일으켰다. 현 시점에서 그가 사용하는 매체의 표현 방식이 새롭고 독특한 무엇이 되지 못할지라도 배준성의 작업들은 작품에 드러나는 도발적 이미지와의 상승효과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 우리는 늘 본다는 행위를 통해 보여지는 것들의 진의를 파악하려고 무던히 애쓴다. 대화 중에 곁들여지는 손놀림과 표정, 초상화에 그려진 의복 혹은 포즈로 인하여 드러나는 어떤 인물의 권위와 사회적 위치, 정황 묘사를 통한 시간적 복선, "무엇은 무엇이 아니다" 라고 선언하는 어떤 전복적 사고까지, 이렇게 무수히 많은 이미지들은 주장하고 함축하고 예언한다. 이어 감탄을 불러일으키고 경청하게 하며 이미지의 정의는 일원화되고 고정되어 불변한다. 이처럼 이미지의 역사는 의미하기와 의미 강요하기의 역사라 생각해 볼 수 있다.

배준성_The Costume of Painter - Museum R, legs left 3_캔버스에 유채, 렌티큘러_181.8×290.9cm_2012

현대의 이미지는 조금 더 진지하고 집요한 이해를 요구하며 중첩된 베일 속에 그 실체를 미루어둔다. 진의(라고 추정하는)가 드러나는 순간의 지적 쾌감은 증폭하였고 이런 성취감을 이미지가 가져야 할 덕목으로 상정하며 점점 더 치밀한 개념과 암시를 설계한다. 배준성의 이미지 또한 언뜻 보기에 일련의 탈 맥락적 구성 때문에 그 역시 어떤 개념의 코드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하는 물음을 가지게 된다. 물론 그의 작품들은 그 동안 보여준 다양한 표현형식의 변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원작과 재해석하는 작가 그리고 이를 관람하는 관람자의 '상호성'을 염두에 둔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상호성은 예측 가능한 어떤 인과적 결과를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늘 우발적이다. 이러한 공통분모 속에서 우리는 그가 제시하는 거창한 시대정신이나 이데올로기적 코드를 발견할 수 있을까?

배준성_Tazan of Balzac Musuem (발자크 미술관 _ 여경)_캔버스에 유채, LED 패널_193.9×259.1cm_2012

작가가 모종의 기획을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 기획의 본래 의도는 오해 받고 변질되기 십상일 것이다. 자크 라캉 (Jacques Lacan)의 저서 『에크리』 (ecrit-글모음집)는 저술 과정에서부터 특이한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에크리』는 읽히지 않기 위해서 쓰였다고 라캉 스스로도 고백하였고 실제로 쉽사리 읽혀지지 않는다. 심지어 독해의 난해함은 차치하고라도 그저 읽어 내려가기 조차 힘들다. 왜냐하면 라캉은 글 또는 언어라는 상징(the Symbolic)을 통해서는 상상(the Imaginary)과 실재(the Real)에 도달할 수 없다고 여겨 글쓰기 자체를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언어로 치환하지 않고 자신이 인식하기 좋은 형태로 비틀어 표현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방식을 통해 견고한 의미로 가득한 세상의 차이와 반복을 무수히 언급함으로써 간혹 그 견고한 틈을 비집고 실재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기도한다. 집중해서 탐독 할수록 진의를 파악하기 힘든 『에크리』처럼 배준성의 현재 작업도 초기의 화가의 옷(The costume of Painters) 시리즈의 우발적 재배치를 통하여 해석 불가능한 어떤 지점으로 관찰자를 인도한다.

배준성_The Costume of Painter - Shadow of Museum Ka , J.J.Lefevre odalisque ds_ 캔버스에 유채, 렌티큘러_193.9×259.1cm_2010

"Museum" 시리즈가 이러한 시도의 초기 형태라고 가늠해 볼 수 있다. 과장된 농담을 가미하자면 이렇다. 애국주의에 경도 된 한 인물이 화가의 옷 시리즈가 자리잡은 서양의 미술관을 보고 '한국계 동양 미술가의 서양문화 정복'이라는 표면적 해석을 가한다면 그 해석은 우스꽝스럽게 작가의 캔버스 위를 미끄러져 내릴 것이다. 하긴 실로 어떤 종류의 해석이든 마찬가지 결과일 것이다. 한 기사에서 작가가 "Museum" 시리즈를 놓고 언급한 코멘트의 말미가 눈에 들어온다. "내 작업의 모티프는 명화다. 렌티큘러 작품이 명화가 걸린 유명미술관 벽면에 걸리고, 그것을 작품 속 관객이 보고 있고, 그 그림을 지금 한국관객이 또다시 보는 상황이 흥미롭지 않은가." 배준성은 렌티큘러를 그곳에 위치시키는 행위와 주변의 정황적 변화를 즐기고 있다는 것을 감지 할 수 있다.

배준성_The Costume of Painter - Peeling Wall_Window , Landscape Forest 2_ 캔버스에 유채, 렌티큘러_181.8×259.1cm_2011

"Peeling Wall_Window" 시리즈에서 이런 우발적 정황이 더욱 두드러짐을 포착 할 수 있다. 김 서린 투명 유리창 너머의 장소. 그는 그리스 유적이 창 밖으로 내다 보이는 호텔에서 그 너머를 바라본 것 일까? 사실 작가는 투명 유리창이 아닌 욕실의 흐려진 거울에서 작품이 기획되었다고 말한다. 손으로 지워낸 너머에서 그는 자신의 얼굴이 아닌 어떤 예기치 못한 상황을 바라본다.

배준성_The Costume of Painter - Still Life with mirror in shoe shelf_115.3×80cm_2012

"Still Life" 시리즈는 표현하는 대상에게 목적 없음의 성향을 띠는 그의 이런 태도를 강하게 대변하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미술사를 통해 우리는 정물화(Still Life)가 작가의 의도를 통해 당시의 시대상 혹은 생활환경, 생각을 드러내는 그림이며 박제된 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샘 테일러 우드(Sam Taylor Wood)의 "Still Life"는 영상기술을 통해 기존의 정물화의 속성 중 한가지인 고정된 순간을 변화하는 현실로 확장시킨다. 부패하며 변화되는 토끼의 신체 혹은 과일 등은 북유럽 정물화에서 나타나는 바니타스(Vanitas: 세속적인 삶이 짧고 덧없다는 것을 상징하는 그림, 해골, 타 들어가는 촛불, 엎어진 접시 등의 대상이 등장)의 패러디 혹은 극적인 효과증대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고정'에서 '변화'를 찾는 키워드는 유사하나 배준성의 정물화면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연관 관계의 단서를 찾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 변화를 통해 일종의 메시지를 던지는 샘 테일러 우드의 정물과 다른 점이다. 꽃으로 변하는 책과 강아지로 변하는 구두에서 도대체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배준성_The Costume of Painter - Still Life with toy in bookcase, a square_렌티큘러_80×80cm_2012

이처럼 배준성은 자신의 회화가 탄생하고 보여지게 되는 여정을 통해 생성되는 수많은 오해와 의미의 변화를 온전히 전하고 설득하고자 하지 않는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종종 인용하는 산책자(Flâneur)의 시선으로 주변에 산재한 오판을 예감하고 방치함으로써 어떤 동일화 되지 않은 각성을 기도한다. 종합하자면 그의 표현이 가지는 의의는 이미지의 역사가 수행해왔던 의미 '명명하기' 또는 '해체하기'를 통한 숨겨진 진리 드러내기에 그치지 않고 행위 자체에 그 뜻을 둔다는 것에 있다. 작가는 부지불식간에 행하여지는 수많은 행위를 통해 이미지가 암시하는 기존의 의미망에서 벗어나기를 무수히 반복한다. 뒤이어 섬광처럼 머릿속을 스치는 어떤 감각을 통해 지금껏 감지되지 않은 창조성의 근원을 기다린다. ● 그의 작업에 대한 이런 해석적 시도 역시 우스꽝스런 역설을 담고 있음을 에둘러 설명하려 하는 것은 무작위의 의미를 설명하려는 이 글의 논리 전개만큼 허망한 일일 것이다. 지금도 그의 작품 앞에서 흔들거리고 있을 관람자의 몸짓이 그것을 증명하듯, 오늘도 그의 그리기는 의미화의 폭력성에 유쾌한 회화적 제스쳐를 드러내며 항거 중이다. ■ 방윤호

Vol.20121017j | 배준성展 / BAEJOONSUNG / 裵准晟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