궈진의 미학_타나토스 郭晋的美学_腾纳托斯

궈진展 / Guo Jin / 郭晋 / painting   2012_1019 ▶ 2012_1108 / 일,공휴일 휴관

궈진_Nightfall No.5_캔버스에 유채_200×150cm_2009

초대일시 / 2012_1019_금요일_05:30pm

관람시간 / 09:3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인터알리아 아트컴퍼니 INTERALIA ART COMPANY 서울 강남구 삼성동 147-17번지 레베쌍트빌딩 B1 Tel. +82.2.3479.0114 www.interalia.co.kr

궈진의 미학_타나토스 郭晋的 美学—天啊同事 Guo Jin's Esthetics_Thanatos트리스탄 : "사랑의 밤이여,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잊게 해다오." 이졸데 : "무의식 속에서 더할 나위 없는 쾌락이여." (바그너의 악곡 – 트리스탄과 이졸데 中) 1. 시각 언어든 문자언어든, 일반적으로, 언어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약속 체계이며, 우리의 사고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매개물이다. 문학작품에서 언어란 예술적 표현을 도모하는 도구로서 하나의 매개물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특히 시에서 두드러지는 언어의 함축성과 상징성은 언어의 힘을 글의 문맥적 구성에 의해 충분히 발휘시켜 완전히 새로운 가상적인 생의 비전을 표현해 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회화에 있어 구도와 드로잉 색채와 재질 그리고 소재는 작품이 가지는 함축적 의미를 표현해 주는 중요 요소로 작품의 의미를 부여해 주며, 또한 작가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내밀한 감정과 그의 사상을 보여준다. 이러한 예술작품에서의 함축적, 상징적 기표들은 때로 형식적인 측면에서 혹은 내용적인 측면에서 다의적인 의미를 초래한다는 것은 알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궈진_#6 I want to be a child that have the right to choose_캔버스에 유채_42×32cm_2000 궈진_#7 I want to be a child that have the right to choose_캔버스에 유채_42×32cm_2000

필자는 궈진의 작품을 이해하고 읽어 냄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 형식의 문제가 작품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의 독특한 표현기법은 단순히 기호와 지칭물 간의 이항관계를 넘어서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그리고 작가의 세계관이 내포된 다항관계로 이루어진 기표로 이해되며, 이는 사회, 역사적인 관계 속에서 비판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함축적, 알레고리적인 기표로 이해되어, 궈진이 예술에 있어 추구하고자 하는 "과거에 있었지만 의식하지 못했던 이상주의적 아름다움"과 "나는 여전히 환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술의 책임과 진심을 믿는다."와 같은 예술에 대한 이상주의적 표상의 과정이 아도르노의 예술사회학적 입장, 즉 예술은 사회와의 관계에서 그 근거를 사회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으나 끊임없이 사회구조를 비판하고 부정하여 특정상을 형성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판단을 내리지 않은 채 나아감을 주장하는 예술작품들의 유토피아적 특성과 유사함을 논하려 한다.

궈진_#18 On the tree No.2_캔버스에 유채_100×70cm_2011 궈진_#19 On the tree No.3_캔버스에 유채_100×80cm_2012

2. 일반적으로 시어는 산문과 비교하여 그 의미의 테두리가 명료하지 못하고 몽롱하게 나타난다. 싸르트르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시인은 시속에서 정열이 흐를 때, 그것을 재인하는 것을 중지한다… 그리하여, 감동은 사물이 되고, 사물은 불투명성을 지닌다. 감동은 자기가 그 속에 갇혀있는 그 모호한 특성에 의해 흐려진다."라고 언급했듯이, 우리는 시어가 가진 함축성과 상징성으로 인하여 이미지를 은근하게 비쳐 보여주는, 그러나 결코 전부가 아닌, 마치 한 작가의 번뇌와 고통, 즐거움과 기쁨이 그대로 작품에 표명되지 않고 감추어서 보여주는 논리하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불투명성이란 사물과 도구를 가르는 중요한 말로서, 이것은 실존철학에서 즉자(속이 단단히 차 있는 충만한 존재로 우리의 시선이 거기에 가 부딪치는 것, 즉 불투명한 속성을 지님)의 성질을 나타내는 여러 용어 중 하나였다. 우리가 쉽게 접근했을 때 이는 중의성(ambiguity)이라고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 ● 이와 같은 문자언어에 있어 시어와 같은 특성은 마찬가지로 시각 이미지에서 나타나는데, 이러한 현상은 형상과 구도, 색채와 명암 그리고 재질감에 의해서 표현된다. 즉 원근법의 무시로 화면에 등장하는 대상물을 동등하게 나열하여 평면화하는 것과, 색채에 있어 명도와 채도의 차이를 거의 없애서 이미지간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것, 또한 재질감을 표현하는데 있어 대상물에 맞는 표현이 아닌 하나의 동질적인 표현방식으로 이미지를 더욱 애매하게 하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이러한 독특한 기법들의 예는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작품 「Mona Lisa」의 얼굴표현에서 입가와 눈가의 처리기법에서도 볼 수 있었다. 일명 "스프마토(sfumato)"기법이라 불리 우는 레오나르도의 표현기법인데, 이는 한 형태가 다른 형태로 녹아드는 듯하게 하는 흐릿한 윤곽과 부드러운 색채로 보는 이에게 항상 상상의 여지를 남기게 한다. 레오나르도는 눈가와 입가를 흐릿하게 남기고 그것들이 부드러운 음영으로 융합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Mona Lisa」가 우리를 보고 있는지 아닌지를 결코 확정 지을 수 없게 한 부분으로 그녀의 표정은 항상 우리의 시선을 빠져나가는 것 같이 느끼게 만들었다.

궈진_#16 Siren_캔버스에 유채_150×200cm_2011

서설이 길었지만, 궈진의 작품에 있어서 다의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해주는 키워드는 바로 그의 독특한 표현기법 즉 "불투명한 녹슨 듯한 기법"에 있다. 그의 작품을 처음 마주하고자 한다면, 분명 시간의 개념을 잊게 하는데 이는 그의 끊임없는 부정의 부정을 거듭하는 그의 붓질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먼저 그의 기법상의 특징을 설명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궈진이 작업을 완성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 캔버스에 바탕을 완전하게 깔고서 그리고 싶은 인물이나 사물들을 아주 정확하고 완벽하게 그린다. 그런 다음 그 위에 다시 형상을 모호하게 뭉개듯이 덧칠을 한다. 그리고 나서 다시 또 완벽한 형상을 덧붙이고, 또 다시 녹슨 듯이 물감을 덧붙이는 방식을 취하는데,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계속적으로 반복하여 작품을 완성시킨다. 이는 마치 시간이 흐르면서 쇠붙이가 녹이 쓰는 과정과 마찬가지로 시간의 때를 계속 붙이기를 반복하면서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예술상을 추구하고자 한다.

궈진_#23 Child with his cap No.2_캔버스에 유채_145×115cm_2008 궈진_#22 Child with his cap No.5_캔버스에 유채_145×115cm_2008

3. 기법상의 이러한 특이점은 사실,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다음의 예술상에 다다르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중국의 50-60년대 출생 작가들과 다르게, 작가 궈진은 자신의 사상과 예술의 관점을 표현기법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즉 직접적으로 사회상이나 개인적 심리상태를 드러내는 방식을 배제하고, 그의 부단한 부정의 붓질을 통하여, 다사다난 했던 중국의 현대사를 그리고 자신의 예술관을 표현해 냈다고 볼 수 있다. 혹자는 그의 그림을 보고 아동이라는 소재와 영웅주의 등을 그의 작품의 주요 키워드로 읽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 부분에서보단 그의 기법적인 면이 조금 더 은밀하고 내밀한 예술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즉 아이란 소재를 이용하기는 했지만, 그가 작품에서 무한 시간의 굴레로 파고 들며 인류와 역사에 대해 고민할 수 있게 하는 부분은 아마도 그의 이러한 기법상의 특징 때문이지 않을까! 그의 화면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아마도 어느 시간 때인지를 줄곧 망각하게 된다. 즉 과거의 혹은 꿈속에서 어떤 비현실적인 순간의 몽상이 화석화된 느낌이랄까! 한 순간의 경험이나 사건들을 고정화시켜 시간이 그 순간에 멈추어져 있는 느낌이 들다가도, 100년 혹은 200년 그 이상의 몇 겁의 년을 품고 살아있는 느낌이 든다는 점이다. 그의 작품에는 물론 중국의 근대화의 시기 그리고 격동의 발전기 등을 품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이 하나의 역사적 표상이랄지, 혹은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물의 등장으로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다. 즉 그에 따르면 넓은 의미에서 사회전체는 이상과 꿈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고, 자신은 중국인으로 중국에서 나고 자랐으며 사회적인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와 아이의 꿈, 영웅이 되는 것을 통해 중국의 일체 교육 등에 대한 비판의식이 담겨 있다고 보긴 어렵다고 한다. 그가 아이를 소재로 해서 아이의 꿈과 영웅이 되기 등을 그린 것은 다다르고자 함에 사실 다다르기 어려운, 그래서 인간의 꿈일 수 밖에 없는 이러한 희망 반복의 기제가 우리의 삶과 즉 인간의 역사와 닮아 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보는 편이 맞을 듯하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들이 그의 표현기법의 과정과 결과물로 화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므로, 사회와의 연관을 피할 수 없고 작가 궈진 역시 피할 수 없는 문제인 것은 사실이다. 그의 작품에 있어서 이러한 면은 사실 모순적인 상황 설정, 역설적인 표현기법으로 나타난다.

궈진_#25 A guardian of Buddhism No.1_캔버스에 유채_50×50cm_2012 궈진_#28 A guardian of Buddhism No.4_캔버스에 유채_50×50cm_2012

초기의 작품에서는 이상과 환상, 그리고 몽상적인 부분이 조금 강했다면, 이제 그의 작품은 자신에 대한 생활, 그리고 생존에 대한 것으로 다가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전에 보단 자신의 존재에 대해 더 많은 사고를 하고 표현한다고 할 수 있을까! 작품의 기조에서 일관적으로 드러나 있는 부정 반복의 붓질은 이제 어느덧 숙련을 더 하고 있음이다. 그가 언급한 시지프스의 신화 속의 시지프스의 숙명적인 운명의 굴레는 이제 점차 자신의 일부로 인정하기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조금은 추상적이라 생각할 수 있겠으나, 청년기의 그림은 아무래도 희망과 약속의 봉인 즉 이상주의의 봉인으로 보여지는 부분이 강하다면, 현재의 그의 작품에서는 한 없이 펼쳐져 있는 무한 반복의 변주의 주름 속에 자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나는 여전히 이 세계에 대한 나의 심리상태를 말하고 있다. 이전의 작업은 이상주의에 관한 것인데, 내 생각에 이러한 것들은 하나의 붙잡아 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 즉 그것들이 거기에 있음을 알아차렸을 때, 그것은 매우 모호하며, 명확하지 않은 어떤, 즉 붙잡아 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최근의 궈진의 작업에서는 이전의 아이들의 이상과 꿈, 무한의 열망과 야망 그리고 동경에 대한 표현보다는 꿈속의 몽상적 시간의 표현과 같은 한밤중의 혼란스런 상황이나, 새벽녘의 신비스런 빛을 머금고 있는 자연물들이 자주 등장하곤 한다. 즉 이제 그의 형식의 해방, 즉 녹슨 기법을 통해 사회적 해방과 위안을 체화시키기 시작한 듯하다. 다시 말해 피안에 대한 알레고리가 충만한 그림으로, 형식의 해방, 형식의 함의, 함축에 의해 작품세계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궈진_#1 The Cosmic Tiger_캔버스에 유채_129×193cm_1995

4. 서두에 인용한 바그너의 악곡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대사를 통해 우리는 인류의 오랜 사랑이야기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트리스탄이 외쳤던 사랑의 밤 즉 가장 절정의 순간에 살아있음을 잊게 해달라는 말은 사실 끝도 없는 죽음의 실타래 속에서 멈추어져 있길 바람이며, 이졸데의 "무의식 속에서, 더할 나위 없는 쾌락이여!" 역시 죽음과 무의식 그리고 쾌락을 동일선 상에서 바라보면서 쾌락을 얻고자 하는 말이다. 궈진의 작품에서 역시 시간의 개념은 이상 추구를 향한 텅 빈 시간의 형식을 말하고 있다. 즉 그의 작품에서 시간은 기억의 구축과 파괴를 통해서 펼쳐졌고, 다시 세워졌으며 궁극의 형태를 취한다. 그 궁극의 형태는 직선으로 이루어진 미로로서 볼 수 없는 끝없는 미로로, 빗장이 풀린 텅 빈 시간 즉 타나토스이다. 이 죽음본능은 에로스와 더불어 어떤 하나의 일환으로 들어가지 않으며, 다만 일정한 수명의 생명이 물질 앞에서 겪는 제한에서 오는 것도, 불멸의 생명과 물질 사이의 대립에서 오는 것도 아니며, 차라리 문제 틀의 마지막 형식이고, 문제와 물음의 원천이며, 모든 대답 위에서 문제와 물음들이 항구적으로 존속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표지라 할 수 있겠다. 궈진은 이러한 그의 미학적인 입장을 그의 형식적인 틀을 통해 구축하고 파괴한 작가라 할 수 있겠다. ■ 김미령

Vol.20121016f | 궈진展 / Guo Jin / 郭晋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