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게 생각하기

이택근展 / LEETAEKKEUN / 李澤根 / installation   2012_1015 ▶ 2012_1025 / 월요일 휴관

이택근_다르게 생각하기展_쿤스트독 갤러리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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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1015_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쿤스트독 갤러리 KunstDoc Gallery 서울 종로구 창성동 122-9번지 Tel. +82.2.722.8897 www.kunstdoc.com

시뮬라크르의 공간을 직조하는 조각적 설치 - 하나의 풍경 ● 전시장에 첫발을 내딛는 관객들은 그곳에서 가득한 풍경 하나를 만난다. 그것은 우리가 문명의 일상에서 흔히 보아온 도시의 한 단편이다. 더 정확히는 보도블럭들이 빼곡하게 채워진 인도와 횡단보도가 있는 아스팔트 차도가 만나는 접경지대의 한 단면이다. 그것은 일상의 공간으로부터 통째로 전시장이라는 예술의 공간으로 옮겨져 있다. ● 이 '조형물 아닌 조형물'은 사실 작가의 작업실로부터 옮겨진 것이다. 이택근은 전시장에 딱 들어맞는 크기의 바닥 구조물을 위해서 30cm x 30cm 크기의 350여개의 보도블록을 여름 내내 땀을 흘리며 만들어내야만 했다. 거기에 덧붙여 실재와 같은 보도블럭과 아스팔트의 표면질감을 만들어내기 위해 화선지 위에 톱밥, 종이죽, 숯, 먹 등을 배합하면서 연금술사와 같은 실험을 지속해야만 했다. 그가 모든 설치물의 조각조각을 주문제작하는 방식을 지양하고 표면방수, 샌딩조차 일일이 수공의 육체적 노동으로 만들어내었다는 점에서, 그의 이번 '조각적 설치' 혹은 '설치적 조각'에는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그의 땀과 손길이 오롯이 담겨있다 할 것이다. ● 여름부터 가을까지 이르는 긴 세월 동안, 그는 왜 이러한 무모해보이기조차 한 노동을 실천해왔을까? 나무틀 위에 '진짜 같은 가짜 아스팔트와 보도블럭'을 만들어 전시장에 옮기면서 그가 성취하려는 예술창작의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의 전시가 어떠한 대답을 내리고 있기 보다는 관객들에게 매우 단순한 유형으로-그러나 복잡한 과정을 거친- 어떠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음을 안다. 그것의 하나는 분명코, 진짜/가짜, 실재/가상, 실재/허구와 관련한 예술의 오랜 전통인 미메시스(mimesis)가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이며, 또 하나는 바닥으로부터 벽을 타고 올라가는 파이프들이나 한쪽 벽면에 투사되는 불꽃 영상들이 유추하게 만드는 메시지처럼 관객과의 어떠한 소통에 관한 것이다.

이택근_다르게 생각하기展_쿤스트독 갤러리_2012

사물의 재현과 인식에 대한 문제제기 ●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이러한 대답을 찾아보기 위해서 우리는 이택근의 이전의 작업들의 세계로 잠시 여행을 떠나볼 필요가 있다. 그는 독일 유학 동안의 조형 연구를 마무리하는 2002년 졸업전을 거쳐 귀국한 이후, 여러 차례 가졌던 개인전에서 사물의 재현과 그것에 관한 존재, 인식, 의미들을 지속적으로 탐구해왔다. 때로는 시멘트조각, 숯, 선인장 같은 사물들을 진짜같이 만들어내는 환영의 눈속임으로 '실재와 허구'의 문제를 탐구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그러한 방식으로 만들어낸 동전을 채워 넣은 작은 나무박스와 거대한 철궤가 균형을 이루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해냄으로써 '허구적 사물'에 부여된 중력의 의미를 탐구하기도 했다.(2005, 브레인팩토리) 한 없이 가벼운 재료로 감쪽같이 만들어낸 '거치대에 걸려있는 역기'(2005)나, 말려 있거나 테이블 위에 걸쳐져 있는 녹슨 철판, 그리고 천장에 매달려 있는 콘크리트 구조물(2007, 쿤스트독)이 실재의 역기, 철판, 콘크리트가 아님을 알게 되면서 관객은 '실재/허구'에 대한 대비적 존재 및 인식에 대해서 던지는 작가의 질문을 비로소 곱씹어보게 된다. 이처럼 작가 이택근이 만들어내는 '가짜 사물들'은 존재, 인식론에 관한 어떠한 대답도 유보하면서 그의 작업이 실재/허구에 대한 회의 자체로 비롯되고 의문제기로 종결되고 있음을 우리게 알려준다. ● 조각의 언어로서 탐구하는 '사물의 재현'과 그것에 대한 의문제기로 지속되어 온 그의 작업이 새로운 방향성을 만나게 된 것은 이것에 끌어들인 공간성에 관한 화두였다.(2009, 쿤스트독 컨테이너). 그것은 작가 이택근으로 하여금, '진짜 같은 가짜 만들기'라는 '사물의 외적 재현' 혹은 '사물의 표면적 재현'에 집중해온 조형언어로부터 한 단계 확장하게 만들었다. 그에게 있어 '공간 탐구'는 단순한 사물의 재현과 나열이라는 응축된 창작언어로부터 탈피하게 하면서 그의 작업을 '조각에 방점이 찍힌 설치적 조각'으로부터 '설치에 방점이 찍힌 조각적 설치'로 이동하게 하는 주요한 전환점이 된다.

이택근_무제_MDF에 종이, 먹물, 톱밥_1200×770cm_2012_부분
이택근_무제_MDF에 종이, 먹물, 톱밥_1200×770cm_2012_부분

시뮬라크르가 직조하는 공간 ● 이택근의 '조각적 설치' 언어는 그간의 그의 '설치적 조각'을 시뮬라크르(simulacre)가 직조하는 공간, 즉 시뮬라시옹(simulation)의 공간으로 이동하게 만든다. ● 주지하듯이, 시뮬라크르란 플라톤이 이데아로부터 모방된 감각의 세계에 하등의 질적 가치를 부여하려는 2구분 중 '원본의 복제'에 대한 최저급의 개념으로 고안된 '복제의 복제'로부터 기원했다. 이후, 이 개념은 들뢰즈에 의해 전복되고 보드리야르에 의해 새로운 해석으로 전개되어 왔다. 시각예술의 차원에서 검토할 때, 플라톤에게서 시뮬라크르는 '복제(현실)에 대한 복제(예술)'로 이데아를 논할 가치조차 없이 거리감을 갖게 만드는 하급의 존재였다면, 들뢰즈에게서 그것은 '자기 동일성'이 없는 '차이의 반복'을 무한히 생성시키는 존재의 원동력으로 부상한다. 플라톤과 달리, 들뢰즈에게서는 모방해야 할 원본의 세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0년이 채 되지 않아 보드리야르로부터 허무주의적 사유의 근원지로 검토되기까지 시뮬라크르는 그 모습이 재정의를 거듭해 왔다. ● 그렇다면, 이택근의 '설치적 조각'이 유발하는 시뮬라크의 세계는 과연 무엇일까? 플라톤식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코 시뮬라크르이며, 그 중에서도 '진실한 모방'으로 풀이되는 에이콘(eikōn)이기보다는 '사물성을 왜곡하는 외형의 모방'만을 시도하는 회화와 같은 판타스마(phatasma)의 세계이다. 이택근이 조각적 설치를 통해서 가짜 인도와 차도를 실재처럼 보이도록 눈속임 기법을 총동원해서 외형적 이미지를 마법(goêteia)화하는 만큼, 그의 작품세계는 피상적으로는 회화의 오랜 전통인 미메시스를 충실히 원용하는 듯이 보인다. ● 아서라! 그러나 정작 가짜를 만들어내는 작가의 의도를 깊이 들어다본다면, 그의 작업세계를 플라톤의 판타스마로 정의하는 일이란, 그의 작품의 본질에 대한 해석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택근의 조각적 설치가 시도하는 모방론이란 시뮬라크르에 대한 들뢰즈의 긍정적 해석과 보드리야르의 회의적 해석 사이에 걸터앉아 있거나 그 둘 사이를 왕래하는 그 무엇으로 정초된다. 즉, 그가 시도하는 복제의 대상인 '오늘날 도시의 단면'이란 더 이상 원본이 없는 복제물임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들뢰즈식으로 말하면 '차이만이 동일성을 지니는' '같은 것 하나 없는 다름들'의 '사건들'이 지속되는 이질성(hétérogénéité)의 공간이자, 보드리야르식으로 말하면 '실재(réalité)보다 더 실재 같은 초실재(hyper-réalité)'의 공간이다. ● 그가 모방한 아스팔트나 보도블럭은 창성동의 것도, 삼청동의 것도 아닌 아스팔트 도로(실재)의 보편적 유형학(이미지)으로부터 빌려온 것이다. 또한 그것은 어느 것 하나도 복제의 대상과 같은 것이 없는 이질성들만이 지속하는 세계이다. 그것은 생멸(生滅)하는 우리 인생의 사건들처럼 '시뮬라크들이 창출하는 즐거운 사건들'의 연쇄들이다. 설치 구조물 맞은 편 벽에 투사되는 '불꽃놀이 영상'은 이러한 시뮬라크르들의 이질성과 더불어 '생성/소멸'의 공존이라는 속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불꽃놀이가 만들어내는 '생성'의 불꽃들이 상호 비슷해 보이지만 어느 것 하나도 같은 모양으로 산포(散布)하고 소멸하는 것이 결코 아닌 것처럼 말이다.

이택근_무제_MDF에 종이, 먹물, 톱밥_1200×770cm_2012
이택근_무제_MDF에 종이, 먹물, 톱밥_1200×770cm_2012
이택근_무제_PVC 파이프, 종이, 먹물_가변크기_2012

시뮬라시옹에 대한 재성찰 ● 이층으로 올라가자. 거기에는 전시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계단식의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그곳에 앉아보자. 이곳에서 우리는 아래에 펼쳐지는 아스팔트길과 보도블럭이 '진짜 같은 허구적 실재'인 하이퍼리얼리티의 세계였음을 확증하게 된다. ● 이층의 전망대 장치는 이러한 '하이퍼리얼리트가 만들어내는 시뮬라시옹 세계에 대한 우리의 그 동안의 좁았던 '수평적 시각'을 반성하게 하면서 비로소 '부감적 시선'과 같은 드넓은 방식의 새로운 시선을 요청한다. 그런 면에서 이곳은 아스팔트길에 그려져 있던 일방통행 기호(sign) 또는 지표(index)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사회의 구조틀에 자신의 의지와 욕망을 구겨 넣으며, 허겁지겁 살아왔던 우리의 그간의 인생을 되돌아보고 반성케 하는 지점이 된다. 즉 이곳은, 모든 사물들이 기호로 대체되어가는 오늘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체성 없이 기호를 소비해왔던 우리 스스로를 반성함과 동시에 그 기호를 재성찰하는 지점이 된다. ● 이곳에서는 아래층에서 보았던 높은 벽면에 부착된 창문이 기실 폐쇄된 벽에 덧붙여진 가짜 창문임을 비로소 알게 된다. 또한 이곳은 바닥으로부터 벽을 타고 올라가는 파이프들을 올려다보던 시선으로부터 이탈시켜 비로소 그것들을 굽어보게 만든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인생에서 지나온 과거를 회상하는 황혼기를 추체험케 하는 미래적 시공간의 장치처럼 보이지 않는가? 이층의 전망대 공간이 불꽃놀이가 만개하고 있는 벽면의 상징적 공간 위에 올라서 있다는 점도 이러한 이층 전망대의 상징적 위상을 강화시킨다. ● 그런 면에서 이 공간은, 관객들이 저마다, 허무주의적 사유로 점철된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이라는 오염된 현실계로부터 잠시나마 탈피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안전지대에 다름 아니다. 아울러 이곳은 관객들로 하여금 작가 이택근이 문제제기한 시뮬라크르의 세계에 대한 미래적 처방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게 만드는 명상소(冥想所)가 되기에 족하다. ■ 김성호

Vol.20121015b | 이택근展 / LEETAEKKEUN / 李澤根 / installation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