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2_1012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8:00pm / 일,공휴일 휴관
누오보 갤러리 Nuovo Gallery 대구시 수성구 삼덕동 118번지 Tel. +82.53.794.5454 www.nuovo.kr
감성의 전방위, 사건의 미학-노병열의 「흐름」 ● (형성하는 삶) 어떤 사람들은 새벽이 오는 길목에 여명의 증인이 되기 위해 서성인다. 언제 오는지, 어떻게 오는지 그것은 우리 주목을 피해 순식간에 자신의 예정대로 나타나고야 만다. 그 순간의 증인이 아니어도 되건만, 기필코 증인을 자처하려는 자들은 대부분 분별적인 의식 너머에 있다고 믿는 무엇을 잡아내려는 자들이다. 그것의 의미는 언제나 존재했었으나 의식의 그늘에 가려 발설되지 못한 비밀 아닌 비밀이며, 존재의 핵이라고 믿는 어떤 것이다. 이들은 이 비밀의 최초 누설자가 되고 싶어 한다. 이 누설자들은 지상의 의미를 무화시키고, 그 허무 속에 존재의 현전을 불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들은 시인이자 예술가이다.
여러 모로 생각해 보아도 노병열 작가는 이런 부류의 사람이 되어 간다. 괴테의 성장소설처럼, 그는 꾸준히 인간성 형성을 향해 나아가는 미감적 인간인 듯하다. 꼭 새벽인지는 모르겠으나 작가는 하루의 꽤 많은 시간을 걷는데 할애한다. 규칙적인 걷기 행위는 그 자체가 대지미술가를 연상시킨다. 그는 스스로 규칙적으로 걸어 다니는 작품이 되기도 하고, 걸으며 접속하는 대지와 공기 그리고 자신의 몸과 나눈 모든 네트워크를 중계하는 매개자가 되기도 한다. 이런 소통의 흔적은 그가 남기는 사진 속에 담겨 있다. 나로서는 (걷기 아카이브)라 이름붙이고 싶은 이 사진에는 살기 위해서는 무시된 곳, 미처 발견되지 못한 곳이 담겨 있으며, 대지와 몸이 만나면서 만들어내는 감성의 실개천들이 기록되어 있다. 개천 마다 작가가 기대하는 존재, 그 현전이 개시된다. 왜냐하면, 그의 기록행위는 예상치 못한 것들의 만남을 기록하고, 그런 발견을 기뻐하는 예식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끝나지만 시작하고, 폐허 같은데 생명이 돋고, 자연이면서도 인위적이고, 드넓은 지평 같지만 구멍이 뚫리고… 급격하거나 예상치 못하거나 낯선 변곡의 지점들. 이를 새로운 의미의 출현이나 기대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걷는 작가 노병열의 몸은, 그의 눈길은 존재를 불러내는 현전의 눈길이라 부를 만한 것이다.
(「흐름」 속에서) '형성중인 삶'은 낭만주의 시절, 인간성의 완성에 이르기 위한 주요 방책으로 이해되던 개념이다. 이는 자연의 성향이나 본능을 극복해 가는 과정 속에 진정으로 인간성이 실현되고 인문학의 주요 과제로 여겨지던 것이다. 여기에는 '형성'이라는 말에 존재의 진리가 실현되리라는 기대가 담겨 있다. 형성, 함양, 성숙, 교육, 도야, 문화 등은 모두 이와 상통하는 단어들이다. 고정된 결과나 존재함보다는 지속적으로 무엇인가를 형성해가는 그 과정의 이해가 중요하고, 과정의 이해 속에서 존재의 함량은 풍부하게 증식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함량의 증가를 함양이니, 도야니, 형성이니 등등의 언어로 부르는 것이다. 존재함량의 증가는 수학적이거나 과학적이지 않다. 인간성 실현이나, 존재의 진리는 과학적이라기보다는 형성, 함양, 성숙 속에서 만나게 되는 특별한 경험의 문제이며, 이 문제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예술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런 맥락에서 예술의 이해나 창작활동은 우리 인간의 존재진리에 대한 탐구라 할 수 있다. 노병열의 작업을 말하기 위해 너무 멀리 간 듯하지만, 그의 일련의 사유나 실천을 들여다보면, 그리고 정갈하면서도 밋밋한 듯이 보이는 그의 작품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들여다본다면 아마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으리라. 그의 작업은 비스듬하게 눕혀놓은 캔버스 위로 인간의 손길이 작용을 하고, 그리고 동시에 가마 속 도자기가 그렇듯 한참동안 자연의 손길과 처분에 따라야 완성된다. 형상(figure)은 대단히 기계적이며 균일하지만 정작 그의 작품에는 보이지 않는 대기의 흔적이랄까, 그 속을 관통하는 시간의 흔적이랄까… 미미하고 잔잔한 흔적들이 물결을 이루거나 고드름이 되어 매달려 있다. 그 물결이나 고드름들은 시간의 고드름이자 무의미가 의미로 결정(結晶)으로 되어 가는 존재라는 대지의 형상화가 아닐까. 고운 모래사장에 나 있는 물결의 흔적처럼 그리고 숨은 대기의 호흡을 묶어내는 동굴 속 고드름처럼. 점진적이며 섬세하게. 작가가 말하듯, 작품의 제목이 「흐름」이니 이 모든 과정 중에, 그리고 형성 중에 풍부해지는 '어떤 존재의 함량'이 작품 위에 남겨놓은 흔적이라 할 수 있다. 그 흔적들은 움직이고 있지만 차분하며 섬세하다. 반복의 무의미와 흔적의 잠재성이 충돌하는 아주 느린 시간의 진동. 여러 존재의 호흡이 지나간다. 호흡이 맺히는 흔적과 고드름은 새로운 의미가 막- 드러나려는 그 순간의 기록인 것이다.
(미니멀, 그 후를 떠맡고.) 노병열의 '걷기'가 작업실로 들어오면 어떠할까.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는 노병열의 작업방식은 말 그대로 인간이 반, 자연이 반 이렇게 관여해서 완성되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완성이라는 용어는 견고하고 지속적인 결과물을 말하지 않는다. 노병열의 작품에 '완성'이라는 말을 쓴다면 그것은 앞으로 무수히 번질 균사체들의 군락이 마련되었다는 의미이지 항구불변의 유일품이 제작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외관상 그의 작업은 대단히 정갈하고 건조해 보인다. 단색처리에 간신히 일렁거리는 흔적들. 사실 그의 건조함은 대단히 기계적인 공정과 관련이 깊다. 성능 좋은 기계로 적확하게 크기를 재단한 듯한 공산품의 이미지 그대로 '도시의 기계적인 역학 이미지'와 맞닿아 있다. 유기체의 정서와는 전적으로 무관한 이러한 형식미에 땟자국처럼 묻어있는 흔적들은 작가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인 세상, 존재의 흔적인 것이다. 공산품, 기계, 반복은 미니멀리즘의 미학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어휘들이자 기법이며 이념이다. 이러한 공정이 만들어낸 텅-빈 자리, 그 자리에 다시 흔적이나 의미를 복구하려는 것이 바로 미니멀리즘 이후의 풍경이다. 노병열 역시 넓게 보아 기계적인 공정이 만들어내고 있는 빈자리에 대지의 혼을 담아, 자신의 작품을 존재 개시의 장으로 확장해 가고 있다.
에바 헤세는 미니멀리즘을 대표하는 몇몇 작가들의 작품에 대항하여, 그들의 침묵이 말하도록 혹은 웅변처럼 울려 펴지도록 하는 작품을 제출한 바 있다. 형상들은 여전히 기하학적인 틀에 놓여 있고 그 배치는 기계적이며 무의미의 반복을 유지하면서도 헤세는, 반복의 단위 세포에 해당되는 형상 하나하나를 재해석한다. 말하자면 억제되고 말끔히 제단이 된 기하학적 선으로부터 그 선을 부정형(informel)으로 해방시킴으로써 수많은 표현을 복원시켰다. 헤세는 메커닉하고 무의미한 반복을 통해 제어되었던 환영의 이미지들을 반복되는 단위 세포의 차원에서 재해석함으로써 개별자의 고유 뉘앙스를 풀어놓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을 일러 역사가들은 '포스트미니멀'이라 부르기도 한다. 에바 헤세의 경우처럼, 포스트미니멀이라는 용어는 미니멀니즘의 내부에서 일어난 일군의 반동으로서 '미니멀 그 이후'를 떠맡아 전개된 한 사건을 부르는 이름이다. 이런 맥락에서 노병열의 작품을 다시 보자. 작품이 뭔지 이제 좀 알겠다고 말하는 작가의 말처럼, 그는 엄격하고 인위적인 반복의 변주 속에 어떤 서사를 복귀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서사는 자율적이고 폐쇄적인 개인의 서사가 아니라 개인의 외부, 자연이 '허용하는 한에서' 개별자가 깊이 관련되는 그러한 서사의 개방인 것이다. 용어에 갇히는 일을 경계하면서 그의 작풍을 보다 큰 미술의 맥락에서 설명하자면, 에바 헤세의 노력처럼 노병열 작가는 개별자의 고유 시선과 세계의 관계를 「흐름」이라는 이름으로 미니멀의 프레임 안에 유입시키는 듯하다. 이럴 때 작가는 자기 작업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과 더불어 미니멀니즘을 스스로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작업역시 '포스트미니멀'이라는 수사로 설명해 볼 수 있겠다. 어느 시인이 말했다. 우리가 우연히 어떤 공을 잡게 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타인의 공력이지 내 자신의 능력은 아니라고. 이 시인의 통찰처럼, 타력이나 타자, 나의 외부에 대한 깊은 성찰과 그것의 공력을 긍정하는 일은 예술가에게 새로운 지평의 개시로 이어지곤 한다. 노병열의 「흐름」에는 이런 긍정과 개시가 흘러간다. ■ 남인숙
Vol.20121013k | 노병열展 / NOBYUNGYEOL / 盧炳烈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