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2_1012_금요일_06:00pm
2012년도 서울시립미술관 SeMA 신진작가 전시지원 프로그램 선정展
관람시간 / 10:30am~07:00pm / 2층(Café di KiMi)_10:30am~11:00pm
키미아트 KIMIART 서울 종로구 평창동 479-2번지 1,2층 Tel. +82.2.394.6411 www.kimiart.net
본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시행중인 2012 SeMA신진작가 전시지원프로그램의 선정작가 전시입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전시장 임대료, 인쇄료, 홍보료, 작품재료비 및 전시장 구성비, 전시컨설팅 및 외부 평론가 초청 워크숍 개최 등 신진작가의 전시전반에 관한 사항을 지원하는 SeMA신진작가 전시지원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
우리는 우리가 속한 세상을 과연 얼마나 이해 할 수 있는가? ● 나는 언제나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내가 겪어온 삶의 경험을 토대로 의미를 반추해 보거나, 천문학이나 생물학, 화학 등의 자연과학 분야부터 역사와 문화 인류학, 심리학과 같은 분야, 그리고 예술이나 문학, 음악. 그리고 종교와 신화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것들을 공부하면서 세상을 더욱 잘 이해 할 수 있게 되리라는 기대와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이 세계는 언제나 그런 것처럼 나에게 그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정의를 주지 않는다. '세상은 마치 한 눈에는 미처 전부 들어오지 않는 그림과도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내가 느끼는) 이 세계에 대한 인식을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나의 회화 안에는 개인적인 경험을 반영한 다양한 환유의 상징물들과 의미의 추적이 불가능한 모호한 이미지들이 뒤섞여서 동시에 존재 한다. 그것 들은 다양한 관계를 이루며 화면에 배치되고, 각각의 독립된 사건들을 이루는 주체가 되며, 화면 안에는 그러한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 나는 캔버스 하나에서 작업을 시작해서 계속 옆이나 위나 아래로 캔버스를 붙이며 화면을 확장해 나간다. 이러한 방법으로 나의 작업은 유기체처럼 스스로를 증식해 나가며, 결국은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모습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작업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은 태생적으로 불가해를 내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우리가 우리의 세상을 단편적으로 밖에 이해 할 수 없는 것처럼. 전체의 개괄적인 이미지에서 시작해서, 찬찬히 뜯어보고 들여다 볼 때야 비로소 찾을 수 있는 아주 작은 붓 자국 속에 담긴 이미지에 이르기까지, 거시적인 것과 미시적인 것으로 작업은 다양한 층위를 이루고 있다. 나는 이를 통해서 관람자에게 자신만이 겪었던 경험을 반영하는 사유를 요구하고 있다. 나의 작업 안에서 이미지들이 벌이고 있는 사건들을 보면 마치 어떠한 서사의 구조를 지닌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마치 현대판 신화와도 같은데, 다만 그 차이점이 있다면, 여기에는 그 어떤 기승전결도 없다는 점이다. 나의 회화 안에는 시작도 끝도 없어서 사실상 결코 서사의 구조라고 할 수 없는데, 이는 내가 세상을 인식하는 시선을 반영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진리나 역사라고 부르는 것들이 어떤 한 점을 향해 나아간다(다시 말하면 발전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 시작도 끝도 없이 중간에서 헤매고 있는 나의 그림은 마치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도 닮아있다. (원본은 7권으로 출간되었고 우리나라에는 11권으로 번역이 되어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창석 옮김 ,국일미디어, 2001) 이 소설은 끝나지 않는 긴 문장과 집요한 묘사로 인해 전체의 줄거리를 이해하기 어렵기로 악명이 자자한데, 결국 그러한 그의 글쓰기 방식이 전체의 줄거리가 아닌 분위기나 감정, 혹은 그 복잡함 자체에 대하여 집중 하게끔 이끄는 것 같다. 나 역시도 이러한 구조를 충분히 의식하며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탈 중심화 된 구성을 통해서그 동안 우리가 보기를 피해왔던 어떠한 감정들과 정서에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지점을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다. ■ 이세준
미로에서 되찾은 시간들 ● '지금, 이곳에서는 어떤 일들이?'(전시부제)를 묻는 이세준의 전시에 대해 한 마디로 답한다면, 실로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다. 주로 나타나는 도상--풀, 나무, 화분, 그림도구들, 드로잉, 곤충, 파충류, 맹수, 인체 등--이 몇 가지 있기는 하지만, 그 조합의 수는 무한하기에 그의 작품은 무척 다채롭고 복잡해 보인다. 크든 작든 하나의 화면에는 여러 도상들로 붐비는데다, 여러 크기의 화면들이 종횡무진 이어지며 공간을 장악해 나가는 방식 또한 관객으로 하여금 길을 잃게 하는데 이렇듯 전시는 화면 안팎 모두에서 뿌리줄기 식으로 이어지는 미로를 이룬다. 자크 아탈리는 『미로』에서, 미로는 유목민들이 정주민들에게 준 마지막 메시지라고 말하면서, 이제 직선을 넘어 미로가 복귀하고 있다고 예언한다. 직선은 발전을 위한 전망을 가지지만, 꼬불꼬불한 우회로로 이루어진 미로는 시간을 절약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공략하고 소비한다. ● 이세준은 미로 같은 작품 역시 한정된 공간 안에 무수한 길을 만들고자 한다. 아탈리가 말하듯이 예술에서는 길을 잃는다는 것이 창조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수많은 일들 중에, 예술이란 잃음으로서 얻는 것이 많은 것 중의 하나가 아닐까. 이세준의 작품 속 서사 또한 미로이다. 그의 작품을 보고 읽는 것은 미로를 통과하는 것과 같다. 끝이 없을 것 같이 이어지는 사건의 행렬은 축제와도 같은 즐거운 혼돈으로 가득하다. 그는 이러한 무아경적 스펙터클을 통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사건들 대부분은 정의할 수 없다. 구체적 도상들이 등장하지만 읽으려 하면 할수록 미궁 속으로 빠지게 하는 그의 작품에서, 이세상은 이해할 수 없음이라는 태생적 불가해성을 가진다. 그가 이러한 불가지론의 지경에 빠지게 된 것은, 그가 처음부터 회의주의자였거나 세계에 대한 인식의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반대로 무익한 방황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이 난감한 결과는 그러한 노력의 과도함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생물학에서 천문학까지, 신화에서 종교까지, 음악에서 문학까지 식을 줄 모르는 열정으로 다양한 분야를 섭렵해온 젊은 예술가의 전형이다. ● 작가에게는 '한마디로 정의될 수 없는' 것이 바로 세계이고, 그러한 세계를 가장 효과적으로 담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예술의 언어는 과학 등 여타 다른 분야의 언어보다 복잡다단한 현실계를 포획하기에 적절하다. 그것은 예술이 은유의 언어이며, 인간의 사고 또한 본질적으로는 은유적이기 때문이다. 한 눈에 포괄할 수 없는 이세준의 그림은 다양한 우주가 똬리를 틀고 있으며 예기치 못한 연결고리를 통해 상호적 변형이 이루어지는 장이다. 엄청난 식욕으로 흡수한 지식과 경험들이 원동력이 되어 자라난 상상력은 하나로 정리된 결정론적 인과 고리가 아니라, 다양한 고리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조차도 매순간 재구축된다. 끝없는 이야기를 이어가는 '그리고' 라는 접속사는 느슨하지만, 전체를 흩어지지 않게 해준다. 쉬지 않고 하는 드로잉들, 특히 작은 그림들은 미지의 거대한 퍼즐을 연결하는 작은 단편들로 작동하곤 한다. 그의 작품은 각각의 세계이면서 동시에 서로 상호작용이 가능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있는 다원적 우주에 대한 유비로 다가온다. 하나의 시점으로 일괄될 수 있는 총체성 대신에 병렬적 집합을 이루는 그의 작품에는 여러 도상들과 패턴들만큼이나 여러 소리들이 들려온다.
원초적 혼돈 또는 축제의 기운이 역력한 이세준의 작품은 안정된 선율이나 화음의 조화보다는 다성적(polyponic)이다. 공간적 복수성은 시간적 복수성의 이면이다. 작품 속 도상은 사물자체보다는 그 이전이나 이후의 유동적 상태를 나타낸다. 그의 작품에는 서사가 있지만, 결론을 향해 최 단축 거리를 설정하는 논리적 언어와는 다른 서사이다. 그것은 시간예술인 음악이나 문학과는 다른 조형예술만의 방식인데, 관객의 시선은 독자나 청자와 달리 정해진 경로를 따를 필요가 없다. 공간적 형식인 미술은 이 부분을 봤다가 저 부분을 봤다가 할 수 있다. 정해진 시간적 연속으로부터 벗어나, 관객이 조합하는 방식에 따라 매번 이야기는 다르게 펼쳐질 수 있다. 다양한 시점이 복합되어 있는 이세준의 작품은 이러한 미술의 어법을 최대한 부각시킨다. '여러 사건의 조직'(아리스토텔레스)을 뜻하는 고전적인 의미의 플롯 역시 느슨해진다. 어떤 목적과 계획을 추진시키게끔 되어 있는 작품 속의 사건은 에피소드 형식으로 와해된다. 그러나 아무 연관 없이 나열하지는 않는다. 생명을 이루는 구성요소들을 찾아내 단지 하나의 상자 안에 넣고 흔든다고 해서 생명이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기계이든 유기체이든 효과적인 연결망이 있어야 작동하는 것이다. 이전 시대에는 그것을 '존재의 대연쇄'를 창조한 전지전능한 신에서 찾기도 했지만, '숨은 신'(루시앙 골드만)의 시대에 그것은 각자 찾아야 한다.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건들이 알고 보면 이런저런 고리에 의해 연결망을 이루듯이, 이세준의 작품은 또한 연결망을 지향한다. 그런 연결망이 명확히 감지되는 않는 이유는 그의 작품이 하나의 주된 줄기를 가지는 나무모델이 아니라, 뿌리줄기의 모델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는 '시작도 끝도 없이 중간에서 헤매고 있는 나의 그림은 마치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도 닮아있다'고 밝힌다. 현대소설의 어법을 확립한 이 '탈 중심화 된 구성'은 현대미술의 어법과도 유사하다. 공간적으로는 중심과 주변의 유기적 관계가 해체되는 것이며, 시간적으로는 과거와 현재의 관계가 달라진다. 사물과 말, 사건과 서사, 지각과 기억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현대예술은 이 간극에 대한 자의식으로부터 탄생했다. 가령, 시간을 주제로 하는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 소설과 마찬가지로 미니멀리즘 이후 현대미술은 시간성에 대한 감각을 고양시켜 왔다. 모더니즘에 전제된, 공간적 관계의 명료성이라는 미학적 이데올로기는 시간이라는 불순한 요소에 의해 시작도 끝도 없는 불분명한 과정으로 변모했다. 이러한 현대미술의 추이는 회화라는 형식의 억압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세준은 회화를 통해 이러한 현대적 감수성을 표현한다. 현대예술의 추이가 그래서일 뿐 아니라, 인생 자체가 그러하다. 우리 인생을 잡다하게 채우는 수많은 단기적인 목표들은 목표 없는 시간에 대한 공포증에 불과하다. 이세준의 작품은 이러한 시공간 간극들에서 예술 활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짐을 알려준다. ■ 이선영
Vol.20121012j | 이세준展 / LEESEJUN / 李世準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