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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1010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화봉 갤러리 HWABONG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7-28번지 백상빌딩 B1 Tel. +82.2.737.0057, 1159 gallery.hwabong.com
이끼 : 미시적 전복 Bryophyte : Microscopically Subversion ● 작가 이만우의 작품 테제는 사건과 경험의 이미지를 재인식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개념화된 이미지들에 대한 미시적 전복이다. 사건들, 풍경들, 경험들의 고정되고 관념화된 이미지들에 이끼를 증식시키고 시간의 층위들을 두텁게 쌓음으로써 일련의 사태들-사건, 경험, 인상을 은폐시키거나 해석의 발생을 보류시킨다. 갈아엎어진 봄날의 논바닥, 화면을 어지럽게 뒤틀어버린 트랙터의 바퀴와 쟁기가 만들어낸 교차선들(고랑과 이랑), 과거의 경험과 기억을 재인시키는 말라비틀어진 벼의 성장과 소멸의 선들, 그리고 끈질기게 솟아오르는 잡초들의 선, 이 모든 교차선을 잠식하고 있는 이끼-선태류(蘚苔類)는 천천히 그리고 아주 조용하게 증식하며 재현된 이미지의 전복을 꾀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발생시키고 생육시키며 소멸화로 이끄는 선류(무성생식)와 태류(유성생식)가 기생/공생하는 순환의 장으로서의 캔버스. 이미지 고착화 과정이 지연될수록 사태들은 더욱 명확해지거나 모호한 상태의 풍경(landscape) / 반-풍경(anti-landscape) / 비-풍경(non-landscape)을 가로지르는 내재성의 이미지가 된다.
작가에게 있어 봄날의 논밭은 그리 살가운 대상이 아니며 절망이자 증오로 가득한 도피할 수 없는 세계였다고 한다. 갈아엎고 또 갈아 뒤엎어 버려도, 솎아내고 또 죽여도 끝없이 솟아오르는 풀들과의 투쟁의 장이자 생명을 담보한 터전이었고, 아버지의 삶과 자신의 삶이 충돌하는 고통과 탄식, 슬픔의 노래가 각인된 풍경이었다.
작품의 제작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그는 현장을 직접 찾아가 트랙터를 몰아 논을 갈아 업고, 사진으로 촬영하여 1차적 풍경-이미지를 먼저 확보한다. 그리고 이를 캔버스로 옮기는 과정에서 2차적 반-풍경의 이미지로 재생한다. 재생산 과정에서 자신의 경험들이 캔버스와 사투를 버리는 제작행위로 나타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숨 막힐 듯 조여 오는 봄날의 햇볕과 비, 그리고 따뜻한 바람을 타고 오는 비릿한 흙냄새와 거름냄새를 기억에서 지우려는 행위가 반영-투사된다. 이러한 이중-삼중의 욕망의 억압과정이 심층화된 논바닥-이미지는 반-풍경이다. 논과 캔버스는 분명 그에게 다른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농부의 삶과 작가의 삶이 캔버스 표면에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서 교차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알 수 없는 부정/긍정의 욕망이 분출되어 표면을 점령하고 있는 반-풍경.
이 2차적 이미지들 위에 다시 하나하나 세필 선으로 이끼를 그려 넣는다. 작가에게 이끼는 무엇일까? 왜 그토록 이끼에 집착하는가? 이끼는 충돌의 경계지점에서 발생하며 서서히 충돌의 힘을 약화시키고 덮어버린다. 의지의 힘들이 충돌하는 공간과 공간 사이-경계, 고랑과 고랑사이의 경계-이랑, 보도 블럭들의 사이-틈, 정원과 마당의 경계-돌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분절된 사건의 해석들 사이-관점들. 작가는 경계와 경계들이 분할하고 있는 반-풍경의 이미지에 이끼를 새기고 경계들을 무력화시킴으로써 그의 회화가 다시금 욕망이 근원도 없고 목적도 없는 것이며, 개인과 사회적 관계 속에서 발생되었음을 확인하게 하는 비-풍경이 되게 한다. 욕망이 가능하게 하는 것은 '믿음'이라는 것과, '자신의 욕망'과의 대면, 그리고 자아의 욕망의 승화이다. 이것은 자신 혼자만의 문제로 해결 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근원적 관계성을 이해하고 이를 그 자체로 받아들임으로써 개인적 욕망과 사회적 욕망의 가로지르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에게 있어 회화의 이미지란 끝없이 비워내는 것 그리하여 감각이 더 살아날 수 있는 생성-이미지의 장(fild)인 것이다.
화면에 가득한 트랙터의 흔적, 그 흔적을 따라 걸었던 신발자국, 이끼로 가득한 논바닥과 오브제이자 상징적 이미지인 회로판들, 그리고 일련의 사건-이미지(삼풍백화점 붕괴현장)들을 그는 우리 현시대의 현상이자 새로운 풍광이라고 언급한다. 그가 풍광에 주목한다는 말은 일상적인 풍경, 무심한 여행자의 눈에 비춰진 아름답거나 추한 풍경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 빼곡하게 찬 자신의 몸-감각을 통해 걸러낸 것 혹은 빠져나간 것들을 한 화면에서 대비시키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는 세필 붓과 물감으로 그의 캔버스를 점진적으로 점령하며 자신의 회화-이미지의 전복을 시도한다. 표상과 반-표상, 비-표상의 형상화라는 회화-이미지로부터 탈주하는 것, 미끄러지듯 이랑과 고랑으로 분화된 논바닥을 가로지르며 표상과 재현의 이미지를 새기면서 지워나간다. 수천 수 만 번의 반복적 행위를 거듭하며 과거의 경험-이미지를 지우고 현재를 새겨 넣는다. 그리고 다시 현재를 비우고 미래의 이미지가 도래하게 한다. 화면을 채우는/비우는 세밀한 붓질은 이끼무리로 응집되는 듯 하다가 다시금 모호한 경계선을 무너트려 버린다. 붓질의 흔적을 추적해서 화면에 근접하면 이내 선들의 일어남과 지속됨 그리고 멈춤의 과정만이 캔버스 표면 전체에 남아있을 뿐이다. 작가가 그리고자 하는 것, 캔버스를 채워/비워나가려는 욕망이란 것은 실체가 없으므로 재현할 것, 재현될 대상은 없다. 오로지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는 것, 부정과 거부를 통해 그 너머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도 재현하지 않고, 흐름들, 차이들, 기생과 공생의 다양성들이 가득한 캔버스-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작가가 제시하는 이끼그림은 농촌-이미지, 도시-이미지는 문화의 질서가 만들어내는 코스모스의 세계와 자연의 무질서가 만드는 카오스의 세계가 복합된 카오스모스의 도형적 상징으로 제시된다. 오래되어 기억조차 나지 않는 혹은 무관심의 대상들과 사건들에 이끼가 자라게 함으로써 그 사건-이미지를 더욱더 모호한 상태, 구별 불가능한 상태로 이끈다. 이것은 회화의 이미지를 통해 사건자체에로 회귀시킴으로써 이미지의 기원으로 소급시키려는 행위가 아닌 현재적 시점에서 다시 읽기를 제시하는 행위이며 본질 또는 공통감에 대한 파기를 유도한다. 작가의 화면은 풍경 또는 반-풍경 혹은 비-풍경을 가로지르면서 예술의 내재성을 이미지화하는 행위이다. ■ 황찬연
Vol.20121010d | 이만우展 / LEEMANWOO / 李萬雨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