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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2012 이랜드문화재단 2기 작가공모展
주최,기획 / 이랜드문화재단
관람시간 / 09:00am~07:00pm / 주말 휴관
이랜드 스페이스 E-LAND SPACE 서울 금천구 가산동 371-12번지 이랜드빌딩 Tel. +82.2.2029.9885
홍수정의 낯설고 기이한 인물화 ● 얼굴 없는 인물형상이다. 이마를 가린 채 이목구비가 지워진, 얼굴 형체만 덩그라니 보이는, 낯설고 기이한 그림이다. 앞머리를 반듯하게 자른듯한 모습에서 다분히 중성적인 여성이거나 소녀임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 인물들은 하나같이 거미줄처럼 생긴 가느다란 선으로 휘감겨 있거나, 구름모양이 반복적으로 그려진 덩어리들로 배경과 연결되어 있다. 머리카락 혹은 거미줄처럼 얽혀진 선들은 가까이에서 보면, 하나하나 작은 타원형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반복적으로 증식하는 형상이다. 화면은 작가의 꿈과 무의식 세계가 뒤섞인 것처럼 보이는데, 평면적으로 처리된 공간 안에 무수한 반복적인 선들이 핏줄처럼 여기저기를 넘나든다. 이러한 익명의 인물을 보고 있자니 어떤 낯섦, 언캐니(uncanny)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 '언캐니(uncanny)'는 최근 문화이론에서 중요하게 사용되는 개념이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트라우마(trauma)와 언캐니(uncanny)의 관계를 설명했는데, 언캐니를 「두려운 낯섦(The Uncanny)」(1919)에서 오래 전부터 친숙했던 것에서 출발하는 공포감의 특이한 변종이라고 정의하고, 「쾌락원칙을 넘어서(Beyond the Pleasure Principle)」(1920)에서는 그 개념을 학문적으로 확장했다. 그러니까 낯익은 것의 반대 개념으로써의 낯섦이 아닌, '낯익은 낯섦'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원래 익숙했던 현상이 억압에 의해 낯선 것이 된 것으로 어떤 다른 경험 때문에 되살아나거나 할 때 경험된다는 것이다. 억압된 것이 회귀하는 것이므로 주체는 낯선 공포의 근원이 외부가 아닌 우리 자신 속에서 찾는다는 것인데, 주체가 이해하기 힘든 모호한 현상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언캐니는 환상이 실재가 되기를 바랬던 초현실주의자들의 작업에서 주로 이용되었다.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인간과 비인간이 혼돈된 원초적 상태를 생각나게 하며, 실명, 거세, 죽음에 대한 불안을 떠오르게 하는 인형이나 마네킹 등의 오브제나 이미지를 활용해 자신들의 무의식을 해방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모호한 성격의 이미지를 작품 속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초현실주의자들처럼, 홍수정은 인형과 실제 인간의 경계를 알 수 없는 여성인물을 표현하고, 현실과 비현실, 꿈과 무의식의 세계와 관련된 이중적 심리태도를 취하면서 작품을 진행하고 있다. ● 작품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실타래, 거미줄, 혹은 머리카락과 같은 선들은 반복과 중첩으로 증식을 꾀한다. 시들어버리는 꽃잎에서 착안했다는 작가의 이 집요한 작은 타원형 드로잉은 작품 안에 실제 머리카락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연결해 주는 장치로도 읽어낼 수 있다. 이러한 무성한 꽃잎 다발들은 인물형상과 뒤엉켜, 기이하고 언캐니한 이미지를 강화한다. 또한 이목구비가 사라진 인물형상은 인형과 사람의 그 중간에 위치하며,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포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이 낯섦의 실체는 무엇일까?
홍수정 자신의 꿈과 무의식 세계를 화면에 담아 내고 있는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작가의 유년기 혹은 사춘기의 소녀의 모습으로 추측해 볼 수도 있다. 「그곳에 나는 있더라」, 「꿈, 봄」 작품에서 인물형상은 구멍 속에서 솟아 오른다. 하반신은 구멍에 감춘 채,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이거나, 혹은 몸의 일부가 남겨진 채 구멍에서부터 불쑥 올라오는 신체로 그려지는데, 이 모든 것이 기이하다. 이는 억압된 것,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는 무의식의 세계가 드러나고 감추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의식 안에 숨겨진 그것들이 의식 밖으로 그 실체를 풀어내고자 시도하지만, 날것으로 드러내기에는 어쩐지 두렵다. 왜냐하면 억압된 욕망이란 거의가 불온한 것이고, 다시 마주하기 싫은 트라우마와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욕망들은 그 실체를 유보하며, 여전히 두렵고 낯선 이미지로 위장한 채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에 들러붙어있다. ● 인형인지 실제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이목구비가 지워진 인물형상은 주로 익명의 소녀들로 짐작된다. 그렇지만, 성모마리아나 오필리아처럼 구체적인 여성 이미지로도 등장한다. 짧은 단발머리로 소녀이미지를 보여주었다면, 성모마리아나 오필리아는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거나, 긴 두건을 머리에 감싸고 있다. 이때 머리카락과 꽃잎 드로잉이 엉커 감정의 증폭을 꽤한다. 전작 「Ophelia」에서 죽어서 누워있어야 할 오필리아가 생경하게 서서 정면을 응시하기에 낯선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면, 「Maria」는 죽은 예수를 품에 안고 애도하는 피에타(pieta)이미지, 혹은 어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성스러움을 부각한다. 그리고 동시에 작가의 유년기 환상을 끄집어 내는 단서로 작용한다. 이는 어머니로부터 충족되지 못한 욕구가 시각화된 작품이 아닐까? ● 어머니를 바라보는 시각은 대개 양가감정(ambivalence)을 띠게 마련이다. 자신의 신체 일부가 변해 생긴 자식에 대한 여성의 애착과 모성은 남성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여성이 갖는 자녀에 대한 개념은 자신과 분리해서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일부분으로 생각하기 쉽다. 따라서 여성 자신이 성취하지 못한 욕망을 자식을 통해 성취함으로써 대리만족을 느낀다거나, 자신의 욕망을 강요하기가 쉬운데, 이는 남성의 욕망보다 강도가 세다. 특히나 자신과 동성인 딸에게 느끼는 어머니의 감정은 특별하다. 이때 아이는 과도하게 부여된 어머니의 욕망에 순응하기도 하지만, 그에 반하기도 하는데, 그로부터 어머니에 대한 양가감정이 생기게 된다. 그러니까 자신을 보호해주고 보살펴주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동시에, 그 사랑이 결핍되었을 때의 불안, 혹은 어머니의 욕망에 대한 거부감으로써의 반발로 인한 미움이 뒤섞여 있는 감정말이다. 홍수정은 이러한 어머니에 대한 복잡한 심리를 「Maria」라는 작품에 나타내고 있다. 또한 이러한 양가감정은 어머니의 소녀시절의 흑백사진에서 모티브를 땄다는 「Gils4」작품에서도 나타내고 있다. 단발머리 사춘기 소녀의 어머니와 자신의 소녀시절의 모습을 나란히 그리면서, 지금은 부재한 사춘기의 어머니 모습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동시에, 미래의 늙고 사그라질 자신을 애도하고 있다.
이처럼 한 화면에 두 인물형상을 나란히 그리는 방식이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은 홍수정 작업의 특징이다. 「Long time couple」, 「그곳에 나는 있더라」, 「너의 나에게」가 그것이다. 이 작품들은 어머니와 나, 혹은 나를 바라보는 나로서, 자화상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작품에는 자아가 온전히 확립되지 못한 자신이 거울 속의 나를 보며 완벽한 존재로 인식한다는 라깡(Jacques Lacan)의 '거울단계(mirror stage)'의 유아처럼 나르시시즘적 자기애가 뒤섞인 세계를 보여준다. 이러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하나의 이미지일 뿐 자기 자신일 수는 없는데, 파편화된 신체에 대한 환상이자, 자신과 가까이에 있는 어머니를 자신과 동일시하며 나타나는 분열된 주체를 작품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까 홍수정의 자화상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어머니의 소녀시절을 자신의 것으로 동일시하는 동시에, 자신의 소녀시절의 환상에 대한 애도를 시각화 한 자화상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금새 사그라드는 꽃에서 모티브를 삼았다는 꽃잎모양의 드로잉에 대한 발상은 이러한 지나간 것에 대한 아쉬움과 슬픔에 대한 애도라는 관점에서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 홍수정은 유년기의 기억, 무의식, 꿈들의 경계, 자신의 소망을 넘나들며, 이들이 믹스된 이미지를 얼굴 없는 인물형상으로 반복해 그려낸다. 유년기, 소녀시절이라는 특정시간에 집착하는 작가의 억압된 욕망의 단서는 헤아릴 수 없다. 하지만 그 시간에 대한 회상과 집착으로 반복되어 나타나는 소녀이미지는 작가 자신의 자화상인 동시에, 작가의 어머니에 대한 애도이며, 영원히 완벽할 수 없는 소녀시절에 대한 작가의 무의식적 표현이다. 작가 작업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낯섦'의 정체는 어머니처럼 늙고 노쇠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을 '소녀시절의 어머니' 모습과 현재의 자신, 그리고 지금의 어머니 모습 사이를 두리번거리며, 그 사이에서 만나게 되는 또 다른 나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 고경옥
Vol.20121005b | 홍수정展 / HONGSUJUNG / 洪受廷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