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24개의 각재와 여행가방

정소영展 / CHUNGSOYOUNG / installation   2012_1004 ▶ 2012_1013 / 일요일 휴관

정소영_2×4 24개의 각재와 여행가방展_LIG 아트홀 부산_2012

초대일시 / 2012_1005_금요일_06:00pm

주최 / LIG문화재단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LIG 아트홀 부산 LIG ARTHALL BUSAN 부산시 동구 범일동 830-30번지 LIG 손해보험 부산빌딩 Tel. +82.51.661.8701 www.ligarthall.com

『2×4 24개의 각재와 여행가방』은 LIG 아트홀 부산 로비G에서 약 4개월에 걸쳐 진행되는 전시의 제목이며 이 전시에 참여하게 된 5인의 작가에게 주어지는 재료이다. 이 재료는 5인의 작가에게 동시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첫 작가에게만 주어지고 전시가 끝난 후 다시 해체되어 다음 작가에게 전달된다. 이 전시의 프로듀서와 5인의 작가는 회의를 거쳐 재료의 변형범위에 대하여 크게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 한 작가는 한 각재당 60cm 길이만큼 단 한번 자를 수 있다. 각재에 채색은 가능하다. 한 각재당 5개의 못을 사용하는 것은 가능하나 재료를 되돌려 줄 때 제거해야 한다. 각재에 다른 재료의 부착은 가능하지만 재료를 되돌려 줄 때 부착물은 제거해야 한다. 1×3의 비율 상태까지 각재의 두께 변형이 가능하다. 가방의 색, 형태를 변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 붙이는 것은 가능하고 전달자에게 되돌려 줄 때 원상태로 복구하여 되돌려 주어야 한다. ● 이 약속들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어떤 형상에 대한 것이었으며 그것의 해체에 대한 것이었다. 웃음들이 회의 중 간간이 터져 나왔다. 허구적인 세계의 규칙을 부질없이 만들고 묵묵히 따르는 행위. 이미 작가들은 놀이의 세계에 들어와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5인의 작가들은 규칙에 대한 농을 던졌다. 규칙을 이용하여 다른 작가를 곤란하게 하는 해코지를 떠올리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문득 재료를 사용하여 만들어 낼 어떤 형상이 머리를 스쳤고 마치 뱀처럼 스멀스멀 담론의 꼬리가 형상의 뒷면에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놀이를 놀이로 끝내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운명이다. 아주 작정하고 한번 놀아보겠다는 인간의 태도에는 비극적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놀이는 언제든 비극적인 것이 되고 그 비극적인 것은 언제든 희극이 될 무한한 통로로 열려있다. 2×4 24개의 각재. 여행가방. 어떤 언어와 재료들이 지금 무한한 가능성 앞에 놓여있다. 또한 사용-전달-사용-전달이라는 반복적 구조에 놓여있다. 무한. 반복. 해가 뜨고 달이 진다. 생과 사가 있고 폭풍이 몰아치는가 하면 노곤한 나무 그늘이 있다. 생성과 소멸은 반복되고 회전된다. 은근히 무한이 암시된다. 반복의 구조에서 생성된 것이 영원을 꿈꾸거나 완전한 소멸을 염원한다. 그저 한 예술작품이란 고정되어 더 이상 변화 불가능함의 상태를 지향하며 무한의 가능성의 통로로 구조화 되려는 것인지 모른다. 아차! 하면 변화하는 어떤 것. 아차! 하면 영원하거나 완전히 소멸하는 어떤 것. 전시에 참여하는 5인의 작가들, 그들은 반복되는 사건과 시간을 따라, 어떤 이야기의 유실된 경로를 따라 LIG 아트홀 부산 로비G란 곳에 함께 혹은 각자 도달할 것이다. 그곳은 또 다른 통로로 이어지는 무대다. 피란델로의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 처럼 그들은 극적 상황 앞에 놓인 배우이며 세상을 설계하는 작가다. 그들 역시 영원이나 완전한 소멸을 꿈꾸며 어떤 형상을 내보일지 모른다. 그 형상들 사이로 시간이 흐르고 풍문이 생겨나고 어떤 염원이 동글동글 따뜻한 콩자반처럼 데워질지 모른다. 모든 게 쓸모 없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저 쓸모 없는 것에 대한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을 뿐인지 모른다.

정소영_2×4 24개의 각재와 여행가방展_LIG 아트홀 부산_2012

9월 5일 첫 번째 작가 이민정에게 재료가 전달되었고 전시는 9월 14일부터 9월 22일까지 진행되었다. 9월 24일 재료는 반환되었고 두 번째 작가 정소영에게 전달되었다.

정소영_2×4 24개의 각재와 여행가방展_LIG 아트홀 부산_2012

"오지 않는 재료들을 기다리며 계속 생각이 바뀌었는데요... 한 작가에서 다른 작가로 넘어가는 프로젝트 과정, 그리고 여행가방, 쉽게 구조를 만들었다 해체 가능한 각목의 성격에 주목해서, 이동과 이동에 따라 따라다닌 짐, 무게에 대한 작업을 생각했습니다. 서로를 지탱할 수 있을 정도 만큼만 각목을 이어 구조화하고, 그 안에 각목을 이용하여 짐(여기에서는 저의 조각물- 특별한 상징성은 없으나 무게감을 표현하는 덩어리들)을 운반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운송도구를 설치합니다, 예를 들어, 지게, 봇짐을 매다는 막대기, 짐을 끌 때 사용되는 끈과 손잡이 등입니다. 전시 기간 중에는 각목과 조각들이 상호연계 되어 있는 구조로 전시가 되고..." ■ 정소영

정소영_2×4 24개의 각재와 여행가방展_LIG 아트홀 부산_2012

10월 3일 재료들은 전시를 위해 정소영의 작업실에서 LIG 아트홀 부산 로비G로 향했다. 이 것들이 어떤 작업이 될 것인지에 대한 상상을 미술 비평가 홍지석의 다음의 글로 더듬어 본다. 10월 13일 전시 종료 후 이 재료들은 세 번째 작가 박소영에게 10월 14일 전달될 것이다. 박소영전은 10월 23일부터 11월 1일 까지 진행된다. ■ 가비스튜디오

정소영의 근작들: 인스톨레이션의 零度 ● 'Zero Construction' 이것은 2008년 정소영 개인전(사루비아 다방)의 제목이다. 'zero'라는 단어가 내 눈길을 끄는데 그것은 이 단어가 -어떤 심리적 연상작용을 통해- 'zero degree'라고 하는 단어를 내 앞에 가져다 놓기 때문이다. 이 단어를 어떤 이가 영도(零度)라고 번역했는데(나는 지금 바르트의 번역서를 염두에 두고 있다) 내게는 이 번역이 적절해 보인다. 여기서 영(零)은 뉴스 기상캐스터가 오늘은 "영상 몇 도입니다", "영하 몇 도입니다" 할 때 쓰는 바로 그 단어다. 어떤 수사학자(Jean Cohen)의 표현을 빌면 수사학은 표준(norm)으로부터 벗어난 것, 규범으로부터 일탈(deviation)한 것에 집중하는데 이 표준, 규범을 지칭하는 단어가 바로 '영도'다. 좀 더 정확히 그것은 "차이가 감지되고 인식되며, 심지어는 측정되는 수사학적 영도 rhetoric degree-zero"(폴 리쾨르)다. 그러니 수사학적 영도는 모든 문채(문체)의 작동을 가능케 해주는 기원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물론 다른 모든 '기원'이 그렇듯 영도 역시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기상캐스터가 "오늘의 기온은 영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봤는가? 적어도 나는 아직 그 말을 듣지 못했거니와 그 말을 듣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 날은 모든 기온(온도)이 자신의 존재를 위탁하는 '기온의 기원'과 만나는 날이 될 것이다. 예술가라면 어떨까? 일찍이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작업)을 통해 '영도'를 구현 내지는 발현하고자 노력해왔으나 아직까지 그 궁극의 경지에 도달한 작가/작품/작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표현을 빌면 영도는 존재하지만 도달할 수 없는 '성배'와 같은 것이다. 물론 존재하지만 도달할 수 없는 것, 없지만 있는 것에 우리는 매료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이다. ● 다시 'Zero Construction' 으로 돌아오면 이 작업 역시 제목에서 명시하고 있듯 '영도'에 대한 탐색이다.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이 작업은 공간의 생성에 대한 상상을 통해, 채석장이라는 물리적 가상공간을 조성한 프로젝트이다. 채석의 과정은 인공적 공간을 창조하는 건설 현장의 최초의 단계이며, 그 과정에서 양각(positive)의 사각형 돌은 채석됨과 동시에 돌산에 똑같은 형태의 음각(negative)의 공간을 형성한다. (…) 음각과 양각의 공간이 동시에 만들어지는 ZERO CONSTRUCTION의 상태를 가시화하였다."(작가노트) 이 말을 수용한다면 'Zero Construction'은 'posi-'와 'nega-'의 동시적 공존 상태를 구현하는 방식으로 'zero'를 지시하는 전략을 취한다. 이렇게 영(零)의 양쪽(+/-, 陰陽)을 동시에 공존시킴으로써 영(零)을 지시 내지는 상기시키는 전략은 정소영의 많은 작품에서 나타난다. 예컨대 상승(↑)과 하강(↓)의 동시적 공존(또는 미결정)을 나타내는 상태로서 '매달린 suspended' 상태(↙, ↖)에 대한 관심( 2012), 또는 안(←)과 밖(→)의 동시적 공존을 가능케 하는 헐린(collapsed) 또는 깨진(shattered) 상태(↔)에 대한 관심( 2011, 2007) 이 그렇다. 또는 의미 수준에서 '녹아서 흘러내리는 액화'와 '얼어서 엉겨 붙는 고화'의 상태에 대한 관심(, 2007, 2012), 또는 집짓기(채석장, 또는 공사장)와 '허물기(폐허)'에 대한 관심(2008)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 이렇게 영(零)의 양쪽(+/-, 陰陽)이 동시적으로 공존하기에 정소영의 작업은 대체로 "과정 중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작가의 말: "(2007)은 하얀 종이 위에 떨어진 검은 잉크의 2차원 점의 형태에서 시작되었다. 일시적이고 우연적이며 유동적인 액체는 3차원의 전시 공간에서 공중에 다른 높이로 맺히고 중력에 인해 밑으로 떨어진다. 지하의 원유가 지상으로 나와 있는 모습 같기도 하며 이 형상은 동굴 안에서 자라는 종유석을 연상시키기도 한다."(작가노트) 요컨대 정소영은 영(零)을 구체적인 형태로 가시화하여 표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작가는 이쪽(+)과 저쪽(-)을 동시에 가시화하여, 또는 과정을 가시화하여 우리로 하여금 영(零)을 상기하게끔 한다. 이 경우 영(零)은 외부에 있는 객관적인 것, 우리의 관찰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주어진 이질적인 것을 종합하거나 통각하고 그 매개점(zero)을 산출하는 것은 우리의 주관, 우리의 마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정소영의 작업이 심리적이라고 말하겠다. 그렇게 주어지는 마음의 영토를 이 작가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인공과 자연사이의 제 3의 풍경"이라고 지칭하거니와 나는 그것을 -좀 더 현학적으로- 객관과 주관이 판단이 중지된 상태에서 조우하는 탈중심적 장(de-centered field)이라고 불러야겠다. 이 탈중심적 장에서 우리는 그 '과정 중에 있는 것'에 불안(모든 비결정의 상태가 우리에게 야기하는 바로 그 불안)해 하거나 미묘하게 감지되는 영(零)의 좌우, 상하, 안팎에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또는 저쪽에서 이쪽으로 흘러가는 마음의 상태를 즐길 수 있다. 정소영의 경우는 어떨까? 언젠가 이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자연과 도시공간에서 발생하는 변이(mutation) 현상에 대한 강렬한 환희(fascination)에서 유래한다"고 했는데, 이 작가에게서 돌출해 있는 것에서 움푹 들어간 것을 보는 일, 떠오르는 것에서 추락하는 것을 보는 일은 거의 생래적이다. 이러한 비결정적, 무규정적 상태에 직면하여 지금까지 정소영의 논(평)자들은 "자기동일성이라는 경계 밖으로 내쳐지고 억압받는 내부의 타자를 드러내는 행위"(이선영), "변화무쌍한 속성들을 마치 일종의 놀이처럼, 그 묘한 가시화의 쾌감마저 즐기고 있는 것"(민병직)으로 해석했고 그러한 해석은 충분히 수긍할만하지만 나는 어쩐지 그러한 해석들로 포괄할 수 없는 잉여가 남아있다고 느낀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 글을 '영도'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영(zero)은 비결정, 무규정의 상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이 상정할 수 있는 최고의 평정상태(equilibrium)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쩌면 정소영의 불안한(또는 동요나 불안감을 야기하는) 작업들이 기실 '얻을 수 없지만 얻고자 소망하는' 어떤 것에 관한 작업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이 글은 서울시립미술관 워크샾을 위해 작성되었던 글입니다.) ■ 홍지석

Vol.20121003k | 정소영展 / CHUNGSOYOUNG / installation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