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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1009_화요일_05:00pm
개막 축하 퍼포먼스 「Call for Avantgarde」 퍼포머_홍신자와 베르너 삿세
좌담회 『김구림의 여정, 그의 세계』/ 2012_1020_토요일_02:00pm
관람료 / 일반 5,000원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주말,공휴일_10:30am~07:30pm
갤러리 화이트블럭 Gallery White Block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마을길 72 Tel. +82.31.992.4400 www.whiteblock.org
'다름'과 '차이'의 실천, 시대의식을 품다_작가 김구림 ● 1. 50년대 이후 21.5세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현대미술사를 들여다보면 다양성에 관한 인정(認定)에 꽤나 야박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역사적 특수성에 대한 면밀한 검토 없이 편향적인 기술에서 자유롭지 못해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견해차는 크지만)50년대 중반을 시원으로 하는 약 반세기 이전의 한국현대미술은 '국전 대 반국전', '국전파와 재야파', '아카데미즘 대 아방가르드(Avant Garde)', '보수 대 진보'라는 이분법 아래 지정되었고, 그것은 대개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적 구분에 어색해 하지 않은 것이었다. 한국적 추상이라 불린 앵포르멜(Informel)이 그렇고 단색화(monochrome)로 대리되는 70년대, 민중미술시대인 80년대 역시 그 권력 중심의 편찬의 도모라는 상징적 기표로서 유효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우린 그 불완전한 억견(臆見)을 인식의 정사(正史)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헤게모니(Hegemonie)에 적용되지 않은 채 우수한 작품성을 선보인 작가들은 적지 않다. 즉, 동란 이후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대립, 반공 매카시즘이 횡행했던 60년대가 암울한 시기였다고 하여 모두가 미학적 차원이 아닌 양식적 측면에서 전개된 앵포르멜을 비판 없이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며, 나까하라 유스께(中原佑价)와 같은 일부 일본 미술계 인사들에 의해 주목되어 한국미술로서의 특성으로까지 발전한 70년대 단색조미술에 우리나라 작가들이 죄다 자신의 예술적 역량을 그 백색(白色) 찬양에 의탁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시대상황과의 일체감, 파괴의 미학이 절실하게 요구된 시절에도 분명 다양한 실험예술과 해프닝, 오브제 작업들을 펼친 이들이 존재했음은 부동의 진리이고, 이는 살아있는 자들이 증언하고 있다. 그들은 지난 역사가 기록하고 있는 일단의 서술이 미학적 차원에서의 수용이 아니라 화단의 주도권과 일본 무대를 통한 세계 진출에의 기회를 엿보기 위한 구성적, 획일적, 기묘한 집단적 현상이라는 의구심을 혁신적인 작품으로 헤쳐나간 이들로써, 부정하기 힘든 존재성을 드러내 왔음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김구림이 들어서 있다. ● 실상 오랜 시간 이어진 우리 미술계의 풍성함은 열외로 한 채 (논리성과 당위성에 대한 고찰이 유효함에도 고유의 정신성 운운하는 애매모호한 상찬 일색인)집단화에 의한 서술에 소외되고 기득권에 밀려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해왔을 뿐 김구림의 화사(畵史)는 곧 한국현대미술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외적으로 보자면, 기득권 중심의 헤게모니에 저항하며 한국미술의 진정성이 서구 대비 무엇이 같고 무엇을 빌려와 설명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조를 이끈 축이었고, 내적으로의 그는 서구나 일본과 우리가 어떤 변별력과 문화적 차이, 대응의 의미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숙고 및 고찰해야 함을 알리는 일종의 현대미술의 조타역할을 해왔다 해도 그르지 않다.
2. 우리나라 근대화 여명기인 50년대 후반~60년대 화단은 앵포르멜이 두각을 드러냈다. 근대화 전기인 70년대는 소위 (현재 애써 무리하면서까지 동양적, 한국적임을 강조하는 온갖 치장과 수사 가득한)추상회화로 대변되는 모더니즘의 절정이었다. 이후 우리나라의 많은 작가들은 실존주의와 정신풍토가 같으며 액션 페인팅과 시대를 공유하는 운동을 통해 기존의 미학을 폐기하고 동력학, 위상기하학, 집합론적 극미(極微)와 극대 등의 개념을 도입하여 '별개의 예술'을 창조하려고 했다. 우리나라의 화단으로서는 최초로 세계적인 흐름에 동참하였다는 것과 아방가르드 세력의 등장에 그 의의가 있는 앵포르멜추상 양식은 물론 60년대 미국 추상표현주의와 70년대 미니멀리즘까지도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 그 당시를 공유하는 김구림도 그런 유형의 작업을 아예 접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착시든 아니든 거대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때의 흐름을 인정하기도 한다. 다만 그는 포괄적 관점에서 서구미술에서 이해되는 운동이나 경향들이 우리와 어떤 변별력을 지니는지, 그리고 문화적 차이 등은 어떠한가에 대한 고찰과 개념인지에 대해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 지적이 그저 사고가 단편적으로 투영된 언어로서의 한계가 아니라, 기실 오늘날의 김구림을 다르게, 달리 보게 하는 분동(分銅)이었음은 자명하다. ● 역으로 들춰봐도 그의 작품들은 주변인들과 달랐고 차이가 있었다. 이미 50년대 초반부터 그의 작업은 일본화된 서구풍의 구상성에서 이탈하고 있으며 58년 첫 개인전 이후 60년대 이르러선 소재나 매체 측면에서도 인위적 혹은 작위적이지 않고, 규칙이나 계산에 의한 의도적인 형식의 회화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당시 활동하던 작가들과는 다소 다른 경향을 내보인다.(사실 60년대는 김구림이 실험미술계열의 행위미술을 주도할 때다) 더불어 70~80년대엔 오브제를 중심으로 한 평면, 설치, 입체, 영상 등의 다양한 개념작업을, 80년대를 건너 미국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게 되는 90년대에 다가서면서 '음양'을 표현 이론이자 기호로 삼는 작품들을 발표해 기성화단과는 확실한 거리를 두었다. 특히 5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 전반에 흐르는 즉흥성, 우연성, 물성을 통한 탈물성화라는 역발상, 화면분할, 감정에서 우러나는 자연스러운 해체의 지향은 그들과의 차이를 명료하게 만드는 매우 적절한 기준으로 자리한다. ● 이러한 판단은 필자의 생각만은 아닌 듯싶다. 이는 윤난지 교수의 글(현대미술사 연구, 통권 15호, 현대미술사학회, 2013, p.145~178)에도 유사한 서술이 눈에 띈다. 그는 당시 김구림의 작업에 대해 "해체주의와 같은 국면을 마주한다"고 운을 뗀 뒤 "해체주의자들은 단일하고 일관된 주체가 발화하는 기호가 단일하고 일관된 의미를 담지하며, 이를 또 다른 단일하고 일관된 주체가 수용한다는 근대적 사유방식의 대전제를 흔든다. 그들은 동일성의 논리를 부정함으로써 의미화의 과정 자체를 해체한다. 김구림의 작업 또한 이러한 성향을 보여준다."고 적은 바있다. ● 이어 그는 "그의 작업이 당대 주류와 다른 점은 다른 의미를 담은 다른 시각 기호를 만들어내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호가 의미하는 과정을 다르게 이끄는 점에 있다"면서 "그의 방법은 한마디로 어떤 것이 아닌 것을 말하는 것, 즉 부정을 통한 사유 혹은 빼기의 철학이다"라고 정의했다. 특히 그는 시대성과 연관지어 "단색조 화가 등 당대 주류가 만들어낸 기호가 '미술은 이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김구림의 것은 '미술은 이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셈이다. 그는 동일성의 끈 자체를 끊어 놓고 있는 것인데, 따라서 그런 발화는 끊임없이 지속될 수밖에 없으며 의미는 무한히 지연된다. 그런 의미는 근대적 사유방식에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그런 의미화의 방식은 의미의 해체에 다름 아니다."고 덧붙이고 있다.
물론 윤난지가 언급한 김구림의 해체적 성향이 한 시대에 국한되는 건 아니다. 주류 밖에서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온 것임에 틀림없고 해체성을 지닌 변주의 알레고리는 '음양'을 토대로 한 수많은 실험적인 작품들에서 드러나고 있다. 일례로 1950년대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회화 『Moon Night(1958)』이 비교적 회화성에 안주하며 '음양'에 대한 기초를 담았다면, 나무 패널에 유화물감으로 비정형적 이미지를 거칠게 옮긴(행위의 흔적이 뚜렷한) 『Untitled(1960)』 연작은 그의 탈고정성을 내보이는 작품이랄 수 있다. ● 특히 나무 패널에 신문지를 오브제로 덧대어 일정한 도식을 첨가한 작품 『Work 8-63(1963)』은 플라스틱과 비닐을 조합해 미적 대상의 규칙성을 배열하고 있는 『Space Construction A-B(1968)』와 더불어 동일성의 논리를 부정함으로써 의미화의 과정 자체를 해체하는 작업으로 꼽을 수 있다. 그리고 김구림 특유의 전위적인 성향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현상에서 흔적으로(From Phenomenon to Traces(1969))』 시리즈 같은 70년대 설치작업과 『현상에서 흔적으로-김구림의 불과 잔디에 의한 이벤트(From Phenomenon to Traces(1970년 4월 11일)』 등의 대지미술 작업은 캔버스라는 물질성의 벗어남이자 예술에 대한 새로운 시점을 제시했다는 점, 나아가 기존에 없던 방식으로 내재성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시도로 평가받고 있다. 허나 정작 의미적인 건 오늘날의 작업과 견줘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 다양한 장르를 포괄한 채 탈고정적 일관성이 불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이밖에도 그는 판화(판화전문서적까지 발간한 적이 있다), 사진, 설치, 비디오, 대지미술, 퍼포먼스, 영화, 무용, 무대미술, 의상, 도자, 메일 아트에 이르기까지 시대적 고착성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폭넓은 작품들을 선보여 왔다. 그의 작업실에 쌓인 (경계를 초월한)수천 점에 달하는 작품들을 보면 놀라울 정도다. 여기엔 기본적으로 음과 양이 놓여 있고 음양은 흔적으로 나아가며, 그것은 다시 음양으로 돌아가는 김구림만의 표현 언어가 숨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들 작품엔 작가란 존재하지 않으나 그렇게 자신의 존재성(작가중심주의)을 부정함으로써 예술의 진화가 구현된다는 논리가 내재되어 있다. 결국 '무위'와 '인위'가 서로 받들고 그 사이에서 주체적 행위가 이뤄지지만 끝내 그 주체적 행위를 죽음으로 용인함으로써 예술의 생명에 불을 지펴온 셈이다. ●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그의 예술가로서의 존재성, 작품과 작가 간 동일성은 획득하게 된다. 예술세계의 한 부분으로서 스스로를 목도하게 되는 지점이 된다. 물론 이는 같은 작업을 무한 반복해 자신의 존재성을 드러내지만 매너리즘에 젖어 있다 해도 무리가 아닌 예술가들과 '다름'을 빚어내는 바탕임은 주지의 사실이며, 지난 수십 년간 이어져온 이러한 특질이 시대의 전후와 관계없는 김구림을 만들었다 해도 부족하지 않다. ● 이 가운데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회화(독자적이거나 결합적인 방식으로 자주 드러나는)는 직관적으로 휘돌아나가는 붓놀림이 매우 즉흥적이면서 생명적이다. 존재하지만 비존재이면서 무존재하지만 존재하는 경이롭고 날카로운 움틈을 보여준다. 반면 오브제 작업들은 정적이면서도 대단히 기호적인 특징을 갖는다. 그리고 그 기호들은 잉여물로서의 기호를 가리키며 오브제들은 "의미화 할 수 없는 부분을 포함하고 드러내는, 다시 말해 완결될 수 없는 잉여물이다." 나아가 오브제들은 현재라는 시대성을 빌려 미술적으로 발언하는 수단이자, 그 발언을 대신하는 사물이나 물질이다.(한편 그 시대에 대한 발언이 김구림의 삶을 괴롭혀 왔음도 맞다.) ● 이에 대해 김구림은 "오브제 작업을 포함한 내 작업은 늘 흥미를 선사한다. 우리시대의 삶과 문화를 놀이와 같은 재미로 푸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그 가운데 오브제는 메시지 전달에 용이하면서도 음양의 한 축으로 제 기능을 다한다. 그것들은 대개 일상에서 얻어지는 것인데, 그 하나하나의 의미와 가치들이 회화적 변주 안에서 고유한 역할을 벗어나 풀어지고 흩어지며 다시 재결합해 드러날 때 달라짐을 발견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 그런데 생각해보면 '달라짐'이란 오브제 혼자만으론 불가능하다. 회화의 붓질에서의 우연성, 즉흥적 몸짓(행위)이 수반되어야 하고, 그것에 맞는 기호가 선택되어져야 하며 상대적인 위치를 점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음양'이라는 명사를 자주 사용하는지도 모른다. 이와 관련해 김구림은 지난해 말 그의 작업실에서 가진 필자와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바있다. "붓질은 인위적이지 않다. 몸짓이 들어 있고 자존적인 존엄성이 깃들어있다. 그래서 흔히들 생명력을 언급한다. 반면 오브제는 철저한 구조성을 지녀야 한다. 주된 작품 제목인 『음양』은 이와 같은 논리를 바탕으로 한다."
3. 김구림은 여러 면에서 한국 최초라는 수식어를 동반하고 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최초의 대지미술 작업인 『현상에서 흔적으로-김구림의 불과 잔디에 의한 이벤트(From Phenomenon to Traces(1970년 4월 11일)』와 역시 우리나라 최초의 실험영화인 『24분의 1초의 의미』가 그렇다. 이 모두가 실은 김구림 특유의 경계 넘나들기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기존 예술개념의 경계를 부단히 왕복하면서 그 경계가 예술을 규정지으면서도 또한 가변적이고 임의적인 것임을 노출시킨 부산물이다. 이와 관련해 '틀'의 해체에 입각해 설명한 윤난지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김구림은 회화, 조각, 설치뿐만 아니라 퍼포먼스나 영화를 통해서도 예술이라는 '틀'을 해체한다. 그는 각 예술장르의 벽을 넘나들 뿐 아니라 예술의 안과 밖도 넘나듦으로써 모든 종류의 틀을, 그것의 모호함을 드러낸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그 틀과 그 안을 가능한 견고하게 지키려 했던 그린버그 식의 모더니즘 강령, 나아가 그린버그가 스스로 자신의 이론적 아버지로 삼은 칸트식의 자율성의 미학과 정 반대의 방향을 향하고 있으며 그런 면에서 (김구림은) 포스트모더니스트인 셈이다." ● 굳이 다원적 층위를 곁들이지 않더라도 포스트모더니스트로서의 김구림을 설명하는 단초는 강둑을 일정한 빗금을 긋고 불태워 그 변화 양상을 보여줬던 한국 최초의 대지미술 작업인 『현상에서 흔적으로-김구림의 불과 잔디에 의한 이벤트(From Phenomenon to Traces(1970년 4월 11일)』에서 적절히 드러난다. 불에 탄 것과 타지 않은 것이 삼각뿔 모양을 만드는 이 작품은 대지도 하나의 도화지가 될 수 있고 대지 자체가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으로, 기존 예술의 표현방식에 대한 새로운 시도였다. 예술의 비물질화에 대한 작가적 시선을 담보하는 신선한 작품이기도 했다. ● 이어 1969년에 만든 『24분의 1초의 의미』는 우리나라 최초의 실험영화로 자리 잡고 있다. 김구림이 감독 편집 디자인까지 맡았고, 같이 활동한 정찬승 작가가 출연했다. 10분가량 되는 영화의 내용은 시대상을 통한 시선과 고찰, 성찰 등이 어우러진 것이었다. 굶주림과 동시에 개발에 목매던 시절, 관조가 반복과 단절, 이음을 통해 해체 형식으로 드러난 작품이었던 것이다. 『24분의 1초의 의미』이외에도 그는 시대성과 장르를 초월한 전위적이며 실험적인 작업을 줄곧 선보였다. ● 대표적인 작품으로 『心柱』이라는 작품이다. 일종의 퍼포먼스에 가까운 이 작업은 "1970년 5월 15일 오후 6시 40분 정각에 개봉하라"거나 "가루를 20cc의 냉수에 타고 자기 이름을 3번 반복하고 난 다음 가루를 탄 물컵을 마시고 정신을 가다듬어 2번 봉투를 8시 50분에 개봉하라"는 식의 다소 익살스러운 명령어가 적시되어 있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작품이다. 이 외에도 지문이 찍힌 봉투를 두 번 연달아 보내고 이후에 제목을 100명의 문화인들에게 발송한 『매스미디어(MASS MADIA)의 유물(1969, 김차섭과 공동진행)』이라는 작품도 있었다(헌데 당시의 언론은 비주류에 대한 조명은 비교적 옹졸한 태도를 보였다. 때문에 그의 행위예술은 주간지 가십 란이나 일간지에서조차 흥미거리 정도로 보도되곤 했다.). ● 이에 대해 미술평론가 윤진섭은 모 월간지에 기고한 『한국의 행위미술 1967-2007(국립현대미술관)』전과 관련한 리뷰에서 "(김구림의 작품)『매스미디어의 유물』은 메일아트(Mail Art) 계열의 작품이지만, '사회적 퍼포먼스(social performance)'의 성격도 지니고 있어 흥미로운 작업이다."고 평했다. 이어서 그는 "재미있는 것은 관객의 반응이다. 마치 요즘 유행하고 있는 '보이스 피싱(Voice Fishing)'처럼, 겁에 질린 편지의 수신인들이 보인 다양한 반응들, 즉 섬뜩한 느낌이나 공포감 등은 공작정치가 횡행하던 당시의 암울한 사회상을 희화적(戱畵的)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고 기술했다. 『심주』, 『매스미디어의 유물』 사례에서 알 수 있듯 김구림은 60년대부터 퍼포먼스도 김구림의 예술성을 담보하는 것으로 부족하지 않는 것이었다. ● 그런데 필자의 관심을 끄는 부분은 김구림의 경우 그림으로만 말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정찬승, 방태수, 손일광 등의 작가와 디자이너, 기자, 스님, 시나리오 작가 등 다양한 예술분야에 종사하는 13명인 참여한 예술단체 제4집단을 1970년에 만들어 '통령'으로 취임하며 현실 참여적인 예술, 시대를 바탕으로 하는 예술, 예술로 시대성을 파헤치는 움직임을 실천하기도 했다. ● 이 단체의 중심 사상은 '무체'였는데, 무체란 "우주의 원체가 무체로서 일체를 이루고 있으며 무체의 유체화인 인간이 무체에서 출발하여 무체로 환원되는 새 인간 윤리의 표방이다."라는 것이었다.(제4집단의 리더를 회장이란 직함 대신 '(대)통령'이라 불렀는데, 1970년 8.15 광복절을 기해 사직공원에서 선언문을 발표하였고, 그 '통령'이라는 단어와 '집단'이란 표현에서 문제가 되기도 했다. 실제로 김구림은 이 사건으로 인해 대구에 거주하던 부친까지 '모처'의 요원들로부터 고초를 겪는 등 수난에 처해졌다. '집단'이란 명칭 때문에 북의 지령을 받은 것이라 생각한 경찰에 잡혀갔다 풀려난 김구림에게도 늘 형사들이 따라붙었다. 이에 김구림은 어쩔 수없이 제4집단을 결성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체선언을 해야만 했다. 이 일화는 예술의 자유는 고사하고 예술가 역시 존재하기 어려웠던 공안정국에서의 한국미술의 한 단면, 그리고 시대를 앞서간 전위 예술가들의 현실을 상징한다) ● 이뿐 아니라 김구림은 작가로서는 이례적으로 1970년 국립극장에서 열린 제1회 서울국제현대음악제에 참여하는가하면, 그 보단 앞선 1969년엔 대구 시립종합문화회관에서 '극단앵글562'의 연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예술 확장의 시도는 1977년 대한민국 연극제 '참새와기관차'를 비롯해 1978년에 열린 팬터마임 '돼지들의 산책', 1981년 창작무용 '이상의 날개', 1982년 연극 '통막살' 둥에서 공연하며 연출과 안무, 의상. 무대미술까지 담당하는 등 현존과 허구의 경계를 흐릿하게 함으로써 고정관념의 틀을 불식시키려는 의도는 오랜 시간 지속됐다. 따라서 그것이 어떤 장르이든 김구림에겐 한계가 제공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4. 갤러리 화이트블럭이 필자에게 전달한 자료에 적혀 있던 "아방가르드 자체였던 삶, 타인과 다른 삶, 타인과 다른 예술. 그에게 삶은 녹록치 않았고 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온 김구림"이라는 문장은 오늘날의 김구림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실제로도 한국현대미술사에서 작가 김구림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며, 그는 지금도 여전히 개성 있는 작가요, 정해진 틀 없이, 습속적인 규정 없는 작업으로 과거나 현재나 새로운 예술 양식을 찾고자 했던 도전 정신에 충실한 작가로 남아 있다. 다른 작가들이 온갖 아름다운 단어로 모호하기만 한 정체성을 치장할 때에도 그는 부단히 기존 미술의 진부한 관념과 획일적 사고를 이탈하고 유출시키는 작가로서 살아왔고 일상과 시대성을 연계시키려는 시도와 태도, 그리고 그 의미들은 기록으로 남기기에 손색이 없다. ● 그렇기에 고정되지 않은 사유와 철학을 지닌 그는 확실히 한국미술사에 최우선으로 기록해야할 작가임에 틀림없으며, 그것이 미술사를 벗어나 문화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인물을 언급할 때 우린 김구림을 빼놓지 않는 이유가 되고 있다. 비록 80년대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그에 관한 많은 자료가 소실되었다는 물리적 안타까움, 내적으론 세상과 절충하지 못하고 헤게모니를 쥔 이들의 맹목적, 집단적 움직임에 일부러라도 빠져나와 순응하지 못한 삶을 살았지만 자신만의 확고한 예술 의지와 철학으로 스스로의 예술을 입증해 온 김구림의 예술사적 가치는 오히려 굳건하게 하는데 큰 질료가 되고 있다. ● 특히 50년대 이후 현재까지 이어지는 끊임없는 실험정신과 스펙트럼이 매우 넓은 그 결과물들은 자칫 안일함에 빠질 수 있었던 미술계에 신선한 자극이 되어 왔으며, 인간의 생과 욕망에 대해 기술하며 한길을 걸어온 그의 삶은 주류와 트렌드만 좆는 동시대 미술의 예술과 작가상, 그리고 현주소를 뒤돌아보게 하는 촉매로 부족함이 없다. 작금의 젊은 작가들, 후배 작가들이 한국현대미술을 다양한 시각으로 보게 하는 그의 작업의 진정성에 대해 얼마나 느끼고 전이 받을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분별이 무소용한 일은 분명 아니다. ● 한편 일찍부터 일상의 사물을 이용해 일상성을 다뤄왔다는 점에서 한국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초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는 김구림은 1958년 대구 공보관화랑에서의 개인전을 시작으로 2012년 9월 화이트블럭 갤러리에 이르기까지 국내외에서 약 60여회가 넘는 작품전을 가졌다. 주요 그룹전 및 해외 출품 전시로는 1971년 제7회 파리비엔날레(프랑스 파리), 1973년 제12회 상파울로 비엔날레(브라질.상파울로), 1974년 오늘의 방법 74전(일본 교토 시립미술관), 1974년 제2회 국제 IMPACT ART VIDEO 74전(스위스 로잔느), 1974년 SIGNIFYING 국제초대전(일본 교토시립미술관), 1974년 제1회 서울비엔날레(한국 국립현대미술관), 1976년 제7회 까뉴 국제회화제(프랑스.까뉴), 1976년 몬테칼로 국제회화제(모나코), 1978년 제4회 인도 트리엔날레(인도 뉴델리), 1980년 아세아 현대미술전(일본 후쿠오카 미술관), 1983년 유고슬라비아 국제 판화 비엔날레(유고슬라비아), 1984년 제8회 브리티시 국제 판화비엔날레(영국), 1988년 한국현대미술의 모더니즘 1970-1979(현대미술관 개관기념) 등 셀 수 없이 많다. ● 이중 1992년 미국 찰리위쳐치갤러리에서의 『김구림, 백남준 2인전』을 비롯한 일본 시즈오카 현립미술관에서의 『침묵의 대화 서구와 일본의 정물화』전, 미국 아트센터 뉴저지에서 열린 『오늘의 6인』전.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한국의 행위미술 1967-2007』에 이르는 미술사적 맥락에서의 굵직한 족적들은 작가 김구림이라는 인칭명사를 수용하는 장으로, 또한 세계 유수의 미술관과 비엔날레의 초대 등은 한국을 대표하는 전위예술가라는 현재의 지위를 대신한다. 그리고 이러한 흔적들은 작품 외적으로도 김구림의 독자적인 미학의 세계를 구축해 왔음을 증명한다. ■ 홍경한
■ 부대행사 1. 개막 축하 퍼포먼스 「Call for Avantgarde」 퍼포머: 홍신자와 베르너 삿세 일시: 2012년 10월 9일 (화) 17:00 장소: 갤러리 화이트블럭 야외 테크 2. 좌담회 『김구림의 여정, 그의 세계』 주재: 홍경한(월간 아티클 편집장, 미술평론가) 패널: 김종길(경기도미술관 교육팀장, 미술평론가), 김종목(경향신문 기자) 일시: 2012년 10월 20일 (토) 14:00-17:00 장소: 갤러리 화이트블럭 지중 세미나실
Vol.20120921f | 김구림展 / KIMKULIM / 金丘林 / painting.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