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2_0919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화~금_10:00am~06:00pm / 주말_10:00am~05:00pm / 월,공휴일 휴관
진화랑 JEAN ART GALLERY 서울 종로구 통의동 7-35번지 Tel. +82.2.738.7570 www.jeanart.net
달콤 쌉쌀한 노스텔지아(nostalgia)의 세계 ● 1977년 12월 28일 약한 것은 위대하며 강한 것은 보잘 것 없다. 사람은 태어나면 약하고 유연하다. 그러나 죽으면 딱딱해지고 유연하지 않다. 어린 나무는 휘기 쉽고 부드럽지만 메마르고 거칠어지면 나무는 죽는다. 굳고 딱딱함은 죽음의 동반자들이고 유연함과 부드러움은 삶의 신선함을 뜻한다. 따라서 딱딱하고 단단한 것은 결코 부드러움을 이길 수 없다. (Andrej Tarkowskij. Martyrolog: Tagebuecher 1970-1986. 1989. Berlin: Limes, p. 194.) ● 예술은 철학적이다. 예술은 미적이고 지적인 유희를 통해 인간과 세상의 근원을 탐구하고 그것을 재구성하기에 철학적이다. 동시에 예술은 현세적이다. 예술가가 작품에 담아내는 모든 내용은 그의 실질적인 삶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작품이 다시 그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그렇다. 예술가는 자신의 생각, 감성, 욕망, 그리고 작업을 하는 순간 자신의 내면을 차지하고 있는 관심사를 작품에 담는다. 이에 예술은 자아를 음미(self scrutiny, 內省)하는 일기(diary)와도 같다. 소소(小小)해보이지만 일기에는 현세적인 삶과 그것으로부터 나온 철학적인 사유들이 가득하다. 일기에는 그것을 쓰는 주체의 기억과 그것으로부터 유발되는 즐거움과 슬픔, 희망과 절망, 회상과 상상, 그리고 자기 존재에 대한 물음과 그에 대한 해답이 가장 청정(淸淨)한 상태로 기록된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이지만 가장 개인적이고 은밀한 것이기에 삶에 대한 근원적 고민을 순수하게 담을 수 있는 것이 일기이다. 한희숙의 작품은 일상적이고 친근하다. 예전부터 그 자리에 놓여 있던 것처럼 묵묵(默默)하다. 수줍어 보이는 그의 작품들은 한 순간에 관람자를 압도하거나 경이로운 세계로 이끌지 않는다. 그것들은 자연스럽고 편안한 공존을 선택한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작품의 크기와 제작 방식에 있다. 한희숙의 -몇몇의 회화나 설치를 제외한-작품 대부분은 품에 안을 수 있는 크기이며 가까이 다가가야 이미지(image)를 파악할 수 있다. 마치 대화하는 것처럼 작품 가까이에 서서 들여다봐야 한다. 이것은 관람자에게 그의 작품을 더욱 내밀하고 친밀한 것으로 느끼게 한다. 한희숙은 재료적인 면에서도 자연스러운 일상의 반영을 중시한다. 작품의 주된 재료는 일상에서 발견된 작은 오브제(object)들이다. 한희숙은 무의미해 보이는 작은 물건들을 보관하여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작품에 담는다. 일상의 물건들은 모두 재료가 된다. 사실 그것들은 하늘과 땅 사이의 상상할 수도 없고 꿈꿀 수 없을 정도의 숱한 사건들을 품고 있다. 자신이 사용하던 물건들과 조개껍데기, 돌, 유리 조각, 미니어처(miniature) 같은 수집품의 결합은 인생의 모든 기억과 흘러간 시간을 재생시키는 낭만적인 행위가 된다. ● 한희숙에게 삶의 모든 순간은 이미 그 자체로 아름다우며 예술의 소재가 될 가치가 있는 것이다. 구체적인 형상이든 추상적인 형상이든 선택된 오브제들은 작가, 아내, 어머니로 살아온 일생을 보여준다. 작가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또 다른 주제는 여행, 문학, 그리고 영화이다. 한희숙이 생각하기에 일상에서 가장 남다른 사건은 여행이다. 여행은 가장 낯선 일상이고 특별한 일상인 동시에 압축된 기승전결(起承轉結)을 가진 인생이다. 작가는 여행을 떠나면 매번 자신만의 로드 무비(road movie)를 찍는다고 말한다. 로드 무비의 결말은 여행지에서 수집한 오브제들을 통해 여행의 순간을 회상하는 것이다. 작가는 오브제들을 작업실에 늘어놓고 떠오르는 기억에 상상력을 더하는 유희의 과정을 즐긴다. 이 과정은 낭만적인 향수(鄕愁)를 자극한다. 작가는 자신의 기억을 되살림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자신이 살아온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기억은 개인의 정체성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면 한희숙은 이국의 정서를 담아내는 낭만적인 영화와 문학에 탐닉한다. 한희숙은 책의 인상적인 글귀들을 기록하고 영화의 포스터와 브로셔(brochure)를 벽에 붙여놓으며 탐미적 몽상에 빠진다. 여행지에서의 이국적인 경험은 문학, 영화, 그리고 작가의 일상과 결합되어 노스텔지아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한희숙은 삶에서 유리된 거대 담론, 현학적인 주제들을 이야기하는 예술과 자신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작업은 하루하루의 일기를 쓰는 것처럼 거를 수 없는 행위이자 가장 행복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행위이다. 그는 작고 편안하고 익숙한 것들에서도 예술적인 경험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평범한 것이 작품의 주인공이 되면 가볍고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되는 경직된 미학적 편견을 비판한다. 기념비적이고 압도적인 작품, 강한 메시지(message)를 전달하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편안하게 일상과 공존하는 예술 작품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논지이다. 인간의 삶이 늘 철학적이고 거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희숙에게 작업은 서사시가 아닌 서정시이며, 비망록이 아니라 에세이(essay)이다. 이에 한희숙은 거리를 두고 감상하는 심오한 예술보다는 그것을 시각적으로 감상할 뿐만 아니라 만져보고, 사용하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을 제작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자신의 삶부터 바꿔나갔다. 작가는 자신의 삶을 이루는 모든 사물과 공간에 예술의 흔적을 남기겠다는 소박하면서도 순수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자신의 공간-가족과 함께 하는 집과 작업실-을 하나하나 예술적 공간으로 바꿔나갔다. 옷장, 캐비닛(cabinet), 책상, 심지어 부엌과 욕실까지도 예술적 행위를 위한 장(場)이 되었다. 이러한 시도들이 압축, 정제된 결과물이 바로 '브로치 회화(brooch painting)' 시리즈이다. '브로치 회화'는 회화와 공예, 평범한 물건과 보석, 감상과 실용, 예술과 삶의 결정체이다. 작가는 물감, 철, 흙과 모래, 목탄, 시멘트 등 다양한 재료로 두꺼운 마티에르(matiere) 효과를 준 앵포르멜(informel)적인 회화 위에 브로치를 부착해서 부조를 만든다. 발견된 오브제들을 이용한 아상블라주(assemblage)인 브로치는 탈부착이 가능하다. 브로치가 캔버스에서 분리되어 장신구로서 기능할 때 캔버스는 독립적인 추상 회화로서 존재하게 된다. ● 순수 미술을 대표하는 가장 전통적인 장르인 회화와 공예인 브로치의 만남은 장르간의 경계를 부정하여 다시 혼합시키고, 예술에 일상을 끌어들이며, 작은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특징을 갖는다. 그러나 한희숙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는 이즘(ism)이나 유행에는 관심이 없다. 미술의 경계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단지 자신의 작품을 순수 미술인지 공예인지 궁금해 하고, 하나의 장르로 정의 내리려는 시도들, 자신을 상업적인 작가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들을 이해할 수 없었을 뿐이다. 삶과 예술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작가에게 애초부터 미술의 장르 구분은 무의미한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작가가 삶과 예술의 사이의 경계를 완전히 무시하고 허물어버리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는 경계의 해체가 아니라 조화를 원한다. 이에 대한 증거로 그의 작품을 감싸고 있는 액자와 그릇을 들 수가 있다. '브로치 회화' 시리즈를 제외한 그의 아상블라주 대부분은 그릇이나 –작가가 손수 만든-액자, 혹은 돌기와를 배경으로 한다. 장식장 안에 설치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예술 공간과 일상 공간을 경계 지어주는 동시에 일상의 오브제들이 예술 작품이 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시간의 경계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경계의 안은 정착된 과거이며 밖은 흘러가는 현재이다. 한희숙의 작품은 타임 캡슐(time capsule)이 되어 힘든 시절과 행복한 시절 모두를 포함하는 과거를 보관한다. 행복과 불행 모두 한희숙의 현재를 만들어준 소중한 기억들이다. 이제 작품은 기억과 그에 대한 향수를 영원히 보관하는 일기장이 된다. 사실 한희숙의 주된 작업 방법인 아상블라주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오브제들을 집적시키는 아상블라주는 20세기 초반부터 수많은 미술가들이 사용해왔다. 한희숙의 경우 작품에서 풍기는 전반적인 분위기가 초현실주의(surrealism)의 그것을 연상시켜 미니어처의 사용, 유희성, 문학성에서 조셉 코넬(Joseph Cornell)과의 연관성이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희숙은 발견된 오브제들을 상당한 시간과 노동력을 들여 연마(硏磨)한 뒤에 집적시킨다는 점에서 다른 작가들과 차별성을 갖는다. 한희숙은 개념만으로 존재하는 작업보다는 물리적인 시간과 노동력이 필요한 작품을 선호한다. 오랜 시간동안 비바람에 마모된 오브제-조개, 유리조각, 조약돌-들은 작가의 손에서 한 번 더 탁마(琢磨)되고 다듬어져 보석으로 변모된다. ● 평범한 일상에 대한 관심, 공예와 회화를 넘나드는 작업의 성격 때문에 한희숙은 페미니즘(feminism)적인 경향의 작가로 이야기 되기도 한다. 그의 작업에 등장하는 레이스(lace)와 섬유 조각의 콜라주(collage)들이 미리암 샤피로(Miriam Schapiro)가 여성적 공예의 정신을 발전시킨 페마주(femage)를 떠오르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그가 즐겨 사용하는 조개는 일반적으로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에로틱(erotic)한 도상이자 여성적 공간인 바다를 상징한다. 실제로 한희숙은 조개를 즐겨 사용한다는 이유로 애욕(愛慾)의 내용을 다루는 작가로 오해받기도 했다. 한희숙의 화면을 채우는 비정형의 형상들 역시 두 가지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성애적인 에로티시즘(eroticism)을 담아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페미니즘적 견지에서 의도적으로 여성적 에로티시즘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기체적인 열린 형상, 중심을 형성하는 모양, 반복되는 동심원의 형태, 층을 이루는 꽃잎과도 같은 여성적 이미지(female imagery)는 전략적 본질주의자(operational essentialist)들이 가부장제에서 부정적으로 여겨진 여성의 몸을 재평가하기 위해 즐겨 사용한 형상이다. 전자와 후자가 시각적으로 차이가 없는 경우도 있지만 둘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 남성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가 아니라 여성에 의해 만들어진 에로틱한 여성의 이미지-후자-는 전복(顚覆)의 힘을 가지며 여성을 이해하는 새로운 기준을 창조한다. 그러나 한희숙이 조개를 선택한 것은 –그것이 성애적인 것이든 여성의 긍정적 가치를 표현하는 것이든 간에-여성을 주제로 한 에로티시즘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조개는 작가가 좋아하는 이국적인 해안가의 상징물이자 섬세한 세부 형태를 보여주는 미적 오브제일 뿐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한희숙의 태도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것과 동일하다. 자신이 여성이기에 당연히 여성으로서 세상을 보고 여성의 이야기를 담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페미니즘과 연결시킬 수는 있겠으나, 페미니즘적인 작업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지나치게 한정적이다. 한희숙뿐만 아니라 모든 작가들은 누구나 자신의 작업이 한 가지 방향으로만 해석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한 사람의 정체성을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리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다양성을 포용하는 것이야 말로 포스트모더니즘을 경험한 오늘날의 미술이 추구하는 방향이다. ● "포스트모더니즘의 예술가와 작가들은 철학자의 입장에 있다. 그들의 텍스트나 작품은 원칙적으로 기존의 규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그것은 미리 결정되어 버린 논리에 입각하여 평가될 수도 없고 익숙한 범주들을 텍스트와 작품에 적용하는 것으로써 판단될 수도 없다. 예술 작품 스스로가 규칙과 범주를 찾아낸다. 예술가와 작가들은 미래에 만들어질 규칙을 만들기 위하여 아무런 규칙 없이 작업한다. (Jean-Francois Lyotard. The postmodern condition: a report on knowledge. Translated by Geoff Bennington and Brian Massumi. Minneapolis :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4, p. 81.) 한희숙은 자신이 상업적인 작가로 치부되거나 성애적인 주제를 다루는 작가로 오해되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포스트모더니즘과 페미니즘의 조류를 따르는 작가로 한정되는 것을 조심스러워한다. 그러나 이런 작가도 두 가지 측면에서는 자신의 작업이 명확하게 규정되기를 원한다. 하나는 앞서 살펴보았던 삶 속에 녹아드는 공존의 예술이다. 또 다른 하나는 치유의 기제이자 삶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조력자로서의 예술이다. 인간은 누구나 삶 속에서 불안간과 긴장을 해소하고 억압된 욕구를 승화시키기 위한 대상을 모색한다. 예술가들은 예술적 행위를 통해 그것을 극복한다. 한희숙은 일상 속에서 끝없이 무언가를 만들거나 낭만적인 노스텔지아에 빠지면서 자신을 치유해왔다. 한희숙의 작품에서 각지고 모난 형태를 찾는 것이 쉽지 않은데 그 이유는 심리적 긴장을 유도하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그가 스스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나 갖고 싶은 작품을 제작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작품 하나하나는 일상에 지친 작가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며, 그가 작업에 몰두하는 시간은 자신이 온전히 주인공인 시간이자 자기 자신과 연애하는 시간이다. ● 현대인에게 가장 크게 대두되는 문제는 바로 정체성의 상실이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보편성을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잊고 사회가 이상적으로 삼는 전형적인 모델을 재현한다. 자기 인생에서 주인공이 아닌 조연이 되거나 심지어 단역으로 전락하지만 그것이 안정된 삶을 사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으며 위안한다. 그러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순간부터 우리는 공동체의 삶에서도 주변으로 밀려나게 된다. 나 자신에 대한 인식 없이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보편성과 통일성을 갖는 롤 모델(role model)을 찾는 것보다 개인의 진정한 자아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 한희숙은 보편성 속에서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나르시시즘(narcissism)을 긍정적으로 이용한다. 작가는 모든 현대인들이 나르시시즘적인 태도를 통해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만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결코 병적이고 자폐적인 자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르시시즘이 심해지면 그것은 하나의 정신적 질환이 된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에는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이것 역시 정상은 아니다. 그런데 현실 속 인간은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지기 어렵다. 보편적 삶을 따르는 현대인에게는 허무함과 슬픔만이 남을 뿐이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사실은 삶을 위한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계기를 결코 자아의 외부로부터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아는 이미 내면에 잠재적인 역량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 한희숙은 보편적인 아내와 어머니의 모습을 쫓다가 내면을 상실한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자신의 본연(本然)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를 작품에 표현한다. 자신을 돌이켜 생각하고 자신을 회상하며 자신에게 되돌아간다. 한희숙만이 아니다. 현대인은 모두 자신에게 의식적으로 되돌아가야할 정도로 스스로에게서 멀어졌다. 회상은 그 거리를 뛰어넘어 자기에게 돌아감이다. 그것은 잊어버린 기억을 찾아주는 단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신의 존재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인간성을 찾아준다. 회상은 인간을 무력감과 허무함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한 것이다. 작가는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일을 할 때, 그리고 자신이 살아온 일생을 회상하고 되짚어 볼 때 가장 순수한 주체로서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에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일인 -삶과 예술의 조화를 위한-작업을 지속하며 그 속에서 하루하루를 기억하고 일기를 쓴다. 모든 일기는 그것을 쓰는 주체의 1인칭 시점에서 서술된다. 일기처럼 주관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글도 없다. 예술 역시 개인의 주관적인 행위가 순수하게 인정받는 영역이다. 따라서 한희숙에게 작업과 일기는 동등한 것이며 자기 상실을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제 작가는 불만족스러운 현실로부터 잠시 떨어져 한 발 물러선다. 자신만의 나르시시즘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한희숙이 병적인 나르시시즘 환자와 다른 점은 되돌아갈 길을 알고 있으며 자신이 되돌아가야 함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나르키소스(narcissos)적인 단계를 넘어서 자기 자신에게 내재해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의 층위들과 그 역량들을 발굴해내기 위해 노력한다. 작품은 작가의 본 모습이 숨겨져 있는 퍼즐(puzzle)이며 그의 꿈과 같은 희망의 산물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나르시시즘의 결정체인 작품은 관람자에게 대리 만족을 불러일으키고 연민의 감정 이입을 유도한다. 한희숙의 작품은 우리에게 부드럽고 은밀하게 효력을 발휘한다.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것들을 소망하게 하고, 현실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게 하며, 현실에서 잊고 있었던 것들을 회상하게 이끈다. 작가와 관람자는 마치 모래사장에 흩어진 조각들을 하나씩 찾아 퍼즐을 맞추듯이 자아를 찾아간다. 예술의 퍼즐을 맞추고, 내면의 퍼즐을 맞추고, 인생의 퍼즐을 맞춰나간다. ■ 이문정
『힐링 다이어리』-일상의 탐미를 통한 치유의 일기 ● 바야흐로 '힐링의 시대'다. 이는 개인의 만족을 최우선으로 하는 시대현상에서 비롯한다. 자기 자신의 진정한 행복 찾기에 집중하다 보니 이제 힐링은 삶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자리잡게 된 것 같다. 힐링의 의미를 되짚어 보자면, 요즘 인기리에 방영중인 SBS 프로그램 『힐링캠프』를 떠올리면 쉽게 참고가 된다. 힐링캠프는 초대손님이 자신의 아픔과 좋은 추억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마련한다. 구체적으로는 오롯이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시간, 나쁜 기억과 좋은 기억을 회상하며 울고 웃는 시간, 그것을 통해 자신 인생의 향방을 깨닫게 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을 보듬어 주게 하며, 그렇게 자신을 아꼈을 때 행복해지는 느낌을 찾게 함으로써 힐링의 효과를 증명한다. 이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사실은 사람들은 보통 행복을 자기 외부세계에서 찾고자 하다가 결국 자기내부는 공허해지고 외부와의 소통에도 어려움을 겪으면서 절망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자기 자신과의 교감을 즐길 수 있을 때 타인과의 소통도 즐길 수 있고, 그렇게 쌓인 경험은 결국 자신과 세상에 대한 포용을 가져올 수 있다는 얘기다. 힐링은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혹은 여행이나 산행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 힐링을 가능케하는 요소 중 우리가까이에 항상 있어왔던 또 하나는 바로 예술이다. 시, 음악, 미술은 언제나 주변에 존재하면서 힐링의 역할을 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히 예술은 경제적 행위에 유용하지 않다는 이유로 삶의 여정에 큰 가치가 없는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그러나 생산적 삶을 위해 외부의 물질세계를 채우는 것에만 몰두하다 보면 결국 정신적 피로가 극에 달하면서 삶의 풍요를 느끼는 감성의 기능이 마비된다. 평소에 예술로부터 감성충전을 적절히 해주는 것은 하나의 힐링 행위로서 우리의 영혼이 병들지 않는 길이다. ● 이번 전시는 25년 가까이 시, 소설, 영화, 음악, 미술로 자신의 영혼을 치유해 나가려 부단히 노력했던 한희숙 작가의 예술적 삶을 총망라하여 보여주기 위해 기획되었다. 그녀의 삶을 엿보면 일상의 단편적 순간들을 예술로 승화시킨 시간의 흔적들로 가득한데 이는 힐링의 방법을 찾는 이들에게 특별한 감흥을 제공할 것이다.
한희숙의 작업은 회화뿐 아니라 그릇 또는 돌기와에 미니어처를 콜라주 하거나, 나무로 조각이나 가구를 만들어 페인팅과 오브제 콜라주(object collage)를 하는 등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다. 결과물의 형태는 다르지만 모두 버려진 물건에서 시작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희숙은 우리나라의 안면도, 남해부터 그리스의 산토리니(Santorini), 이집트의 나일강과 룩소르(Luxor)등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지의 해안과 마을을 돌아다니며 조개나 전복껍데기, 산호, 깨진 유리조각, 호스 등 버려진 물건들을 수집해왔다. 그의 수집품에는 희귀한 자개나 수정, 돌, 종이, 천, 미니어처 등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유럽의 엔틱 시장에서 선택되어 온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 해안가에서 수집한 물건들은 모두 세상에 하나뿐이며, 오랜세월 동안 세찬바람과 바닷물결, 모래의 쓸림을 이겨낸 화석과도 같은 것이다. 작가는 그 재료를 다시 마모시키거나 염색하기도 하고 새로 칠을 입혀서 재탄생 시킨 후 전혀 물성이 다른 개별 매체들을 한 화면에 조합 한다. 세월의 흔적과 작가의 손때가 함께 묻어나는 오브제들은 작가 내면의 이야기가 덧입혀 지면서 상상력을 자극하는 묘한 매력의 물질로 변모된다. 조개껍데기를 비롯한 오브제들은 그녀의 추억, 향수, 아픔, 판타지를 담는 그릇으로서 의미를 품게 되는데 이로 인해 희소성이 극대화되고, 볼 때마다 아련한 추억이 되살아나게 함으로 영원성을 부여 받는다. 한희숙은 연상작용으로 작품 창작을 이끌어 가고, 작품 앞에서 느끼게 되는 감성 또한 연상에 의해 이루어지도록 한다. 그녀는 평소 시나 소설을 읽거나 영화나 음악을 감상한 후 생겨나는 감성 - 욕망, 향수, 현실의 처절함, 꿈에 대한 판타지 - 을 작품화 시켜왔다. 감성이라는 비물질적 요소를 시각화한다는 것은 추상적 형상으로 나타나게 되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가슴에 품고 표현한 추상이기에 작품들은 분명 어떤 연상작용을 일으키고, 정서적으로 공감하게끔 한다. ● 회화에 오브제가 콜라주 되어있는 작품을 보면 그 어떤 요소도 정형화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떠도는 듯, 부유하는 듯, 몽환적인 듯, 중첩되는 듯한 비정형의 추상이다. 이는 삶의 잔상(殘像)을 끊임없이 시적 은유(詩的 隱喩)로 옮겨내고자 하는 의지에서 연유한다. 시의 은유성은 시시각각 변하는 비정형적인 인간 내면의 풍경을 담아내기에 좋은 수단이다. 시에서 사용된 단어나 문장은 읽는 이의 연상작용에 따라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듯 그녀가 그림으로 쓴 시에 등장하는 오브제나 표면처리, 구성방식은 여러갈래로 연상을 뻗어나갈 수 있게 만든다. 여러색이 겹치면서 생성되는 색감과 마티에르는 기억이 중첩되면서 번져나가는 그리움의 깊이라던가 상상이 넘나들며 생겨나는 감정변화의 굴곡같은 것을 전달한다.
한희숙 작품의 주제는 자신이 일상에서 받은 감동- 반가움, 그리움, 기쁨, 슬픔, 부끄러움, 초라함 등-을 어떻게 은유적 이미지로 표현할 수 있는가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 은유적 표현은 자신과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픈 "삶에 대한 미적 충동" 에서 비롯된다. 보통 결혼한 여성에게는 매일 반복되는 가사노동과 자유롭게 일상을 떠날 수 없는 환경이 주어진다. 한희숙은 자신의 지적 욕구와 경험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힘든 환경에서 현실과 욕구의 괴리감이 커질 때 생겨오는 불행의 감정을 일상을 탐미하는 작품으로 해소, 치유함으로써 긍정적 상황으로 나아가게 한다. 버려진 것, 사라져 버릴 일상의 순간을 아름다운 기억으로 승화시키면서 자신의 삶을 서정적인 낭만으로 채우고자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쌀을 뜨는 그릇, 요리하는 도마, 쟁반 등 자칫 단순 가사노동의 무기력함을 느끼게 할 수 있는 하찮은 물건들을 감상에 젖게 하는 작품으로 재생시키는 작업에서 잘 나타난다. 담는다는 의미에서 그릇 종류의 오브제는 그녀의 어떤 감성이든 담아낼 수 있는 유용한 일기장이다. 그녀의 그릇 안에는 집, 가족, 사랑, 자연, 문학 등이 아기자기한 미니어처 형태로 담겨있어 어린 시절에 관한 향수나 아직 경험하지 못한 삶에 대한 동경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행위는 작가로 하여금 일상사물에 대한 새로운 의미부여 내지 날것의 생명력, 노동에서 오는 여성만의 강인함과 같은 존재의 긍정성을 발견하는 성취감을 맛보게 한다. 특히, 여성 특유의 섬세함이 빛을 발하도록 만든다는 점이 자기만족과 보람을 안겨준다. 작가의 내면적 발상들은 단지 나르시시즘적 만족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잊고있던 기억, 꿈, 상상의 세계를 어렴풋이 끄집어 내어 삶의 아름다운 의미를 되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 한희숙의 작업은 마치 일상의 일기를 쓰는 것과 같다. 바깥 세상의 이슈를 논하기 보다는 자신의 일상적 감정에 충실하며 이를 작품으로 기록하고 유희하는 시간이 사소한 행복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작가에게는 늘 일상이 예술이 되고 예술이 일상이 되는 과정이 존재의 외로움을 달램과 동시에 삶의 긍정을 유지하게 하는 동력이다. 작품을 이루는 방식과 내용은 실제 작가의 라이프스타일에도 연결되어 있다. 그녀의 집은 가구나 벽, 거울, 액자, 소품들이 작품의 컨셉과 조화를 이루도록 손수 제작한 것들로 채워져 있고, 작가자신도 본인의 외관을 작품의 일부에서 빠져 나온 듯하게 표현하는 것을 즐기곤 해서 삶 전체가 예술적으로 어우러진 느낌을 준다. 이는 몽상, 회상을 통해 일상을 탐미하는 행위, 예술과 삶의 교감이 일종의 치유법으로 작용하는 실례를 보여주는 것 같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러한 의미를 전달하고자 한희숙 작가의 작업과 삶에서 엿볼 수 있는 인상적인 모습을 최대한 공유할 수 있도록 연출해 보았다.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힐링은 바로 자신의 향수, 판타지를 끌어내고 이를 긍정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아닐까. 타임캡슐처럼 현재와 과거, 미래를 넘나들고, 삶과 예술이 교차하며 가능해지는 한희숙 법 치유의 놀이는 힐링의 시대에 소중하고도 유용한 영감이 되리라 기대한다. 그녀는 오늘도 주저하지 않고 달콤한 꿈을 음미한다. ■ 신민
Vol.20120918j | 한희숙展 / HANHEESOOK / 韓熙淑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