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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919_수요일_05:00pm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경운동 64-17번지 Tel. +82.2.733.1045 www.grimson.co.kr
"우리가 보고 경험하는 것이... 상상 속에서 실제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실제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히 그로부터 분리된다." ■ 윈델 베리
긴장의 도수를 낮추는 수묵담채와생명과 평화가 깃들인 상상의 정원 ● 표현형식의 측면에서 임현경의 회화는 전통적인 한국회화의 현대적 계승으로 이해될 수 있다. 바위와 나무, 땅, 식물, 새를 그리는 묘법과 그것들을 구성하는 방식은 진지하게 학습되고 훈련된 전통의 결과가 아니고선 설명되기 어렵다. 하나의 주제를 여러 폭으로 나누어 그리는 연작 방식과 병풍을 연상케 하는 이미지들의 수평적 조합방식도 한국화의 오랜 전통을 환기하기에 적절한 것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 세계의 더 깊은 곳을 짚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주제와 그것을 표현해내는 다소 현대적으로 개조된 수묵의 기술 등, 형식적 요인들을 확인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 임현경의 정원은 그것이 마치 다양한 품종의 나무들이 우거진 식물원 같아 보일지라도, 마음의 풍경에서 온 것으로서 그 대상은 실존하는 풍경이 아니다. 그가 자신의 정원 안에 그려넣은 것들은 마음, 또는 영혼의 어떤 고백, 지향, 갈망, 그리고 기도의 차원으로 읽어도 무방한 것들이다. 끊이지 않는 물줄기, 솟아오른 바위 틈새에서 자라는 녹색의 식물들, 우거진 숲과 그 위로 한가로이 비행하거나 나뭇가지 위에서 쉬고 있는 새, 사계절의 변화, 느슨하게 흐르는 시간, 촉박하지 않은 안식의 정서…. 느슨한 시적 함축과 절제된 수사, 부드러운 선으로 주조되는 수묵 담채법 역시 이 세계에서 한 번 더 사실을 완화시키고 긴장의 강도를 낮추도록 하는 심인적 기제로 작용한다.
임현경의 정원을 대변하는 두 개의 분명한 표지가 있는데, (예외가 있긴 하지만)정원의 중심부에 위치하는 분수형 펌프와 정원을 가득 채우는 나무가 그것이다. 분수펌프는 정원의 중심부에 존재하는데, 지하의 수맥에서 끊임없이 맑은 물을 끌어올리고 뿜어내는 이 펌프에 의해 정원은 고유한 비옥함을 유지할 수 있다. 펌프로부터 나오는 여러 개의 물줄기는 정원에 연못을 만들기도 하고, 그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내를 만들기도 한다. 이 펌프의 성실한 기능으로 인해 대지는 습하고 식물들은 생명의 녹색을 잃지 않는다. 이 정원을 삶의 터전으로 삼는 모든 생명체들은 척박이나 황폐에 노출되지 않을 것이며, 박탈되거나 소멸되지 않는 성장과 번성을 담보받을 것이다. ● 나무들은 이 정원의 또 하나의 중요한 표지다. 그것들은 비옥한 토양에 뿌리를 내린 채 성장한다. 다양한 농도의 녹색 이파리들은 건강한 생명력의 아이콘이다. 임현경에게 이 습윤한 녹색은 생명의 원리를 목격하는 인식의 성지(聖地)다. 그에게 나무는 "신성하며 거룩한 존재가 현현하는" 특별한 공간으로서 생명의 이상적인 담지체다. 그것-나무-들의 기원은 '작은 씨앗'의 형태로 주어진 생명의 고도 농축으로, 그것은 그 신비로운 생명의 저장방식을 고안하고 허용한 '존재 저 너머', 곧 위대한 조물주로부터의 호출에 다름아닌 것이다.
임현경의 정원은 작고 아담하지만 그 구성은 사뭇 짜임새가 있고 질서정연하다. 정원의 중심에 위치한 분수펌프는 공간과 시간에 질서를 부여하고 주도한다. 이 세계를 이루는 어떤 것도 펌프를 통한 물줄기의 혜택 없인 연명할 수 없다. 중심부는 정원의 식물과 동물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무상으로 공급하고, 그것들-식물과 동물들-은 기꺼이 그 공급에 의존한다. 정원의 이 살아있음의 형식, 곧 연대와 공존의 형태야말로 오늘날 화려해 보이는 거대도시들에서 예외없이 배재되고 누락된 것들이다. 이 정원에는 고층빌딩, 백화점을 가득 채운 재화들, 휘황찬란한 밤의 네온사인과 축제를 찾아 운집하는 군중, 악취를 내는 장식된 사망의 참조들, 빼앗고 군림하는 '늑대의 관계'만이 차고 넘치는 문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평화가 깃들어 있다. ● 앞서 말했듯, 이 세계는 상상에 의해 읽혀지고 인식되어진 풍경이다. 즉, 상상을 '통해' 마주하는, 또는 적어도 현재까지는 상상을 '통해서만' 지각이 가능한 세계다. 하지만 상상은 경험되지 않은 세계로의 통로, 또는 매개에 해당하는 사유 범주의 한 유형으로, 그 자체만으로는 상상되는 세계의 출처에 대한 어떤 정보도 심오성의 여부도 확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상상은 언제나 '무엇의 상상인가'를 동반하며, 그 무엇에 의해 상상의 존재적 질, 곧 깊이와 폭의 심오성이 긴밀하게 영향받기도 하는 것이다. 즉 그 무엇이 무엇인가에 따라, 상상은 존재를 더욱 실제적으로 느끼는데 기여할 수도 있고, 공허한 추상과 관념의 늪지에 처박는데 일조할 수도 있다. 임현경의 상상의 출처는, 자크 엘륄의 표현에 의하자면 실재보다 더 강력한 실체성을 지닌 아직은 현존하지 않는 나라며, 회칠한 무덤 같은 도시의 상한 영혼들이 그 도래를 갈망하는 세계다. 윈델 베리의 말처럼 부단히 상상함으로써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실체성의 선취에 나서야만 하는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암현경이 상상으로 번역해 놓은 세계는 씨앗에 농축된 잠재적 생명력과 그것을 거목(巨木)으로 성장시키는 외부 조건의 상호협력으로 만들어진 조화로운 결과를 확인시켜준다. 이 상호인정과 협력, 조화야말로 역사와 사회를 위기와 파국으로 내모는 현대적 사유체계와 그 소산이자 매개체이기도 한 현 문명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가치들이다. 이 차이는 궁극적으로 존재론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임현경에게 존재는 그 피조성(被造性)과 유한성(有限性)으로 인해 외부의 지지와 부양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서, 스스로 권력을 취해나감으로써만 완전에 가까워져가는 이른바 니체적 존재와는 전적으로 무관한 존재다. ● 임현경의 정원에선 그러므로 어느 존재도 자신의 권력을 축적하기 위해 타자를 경쟁이나 적대관계로 설정할 필요를 갖지 않는다. 여기서 생명과 삶은 오히려 그것과 반대되는 관계, 즉 서로의 존재로부터 발견되는 의미가 아니고선 더 이상 보완이 불가능한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존재적 성취는 외부로 내뻗는 도움의 손길을 통해서만 다가온다는 것이 이 정원의 사유요 삶의 양식인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이 정원은 망실된 현대성이 자기반성 안에서 구원을 모색하는 공간이자, 퇴락한 독존적 자아가 치유의 가능성과 마주하는 시간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꺾이고 부러진 내상(內傷)들,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는 치유의 요인들이 공공연하게 고백되어도 무방하다. 존재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며, 실존은 그것을 확인하는 존재론적 과정이다. 이는 존재와 실존을 상충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이 시대의 지배적인 담론과 그 궤변적 전망들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임현경이 선호하는 연작 방식은 이런 맥락에서 다시 읽혀져야 할 요인 가운데 하나다. 이 연작방식에서 하나의 회화는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에 도달하는 충분한 조건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전체는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각각의 회화들로선 결코 성취해낼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각각의 회화는 자신과 이웃하는 회화들과 긴밀하게 결부됨으로써만, 그 궁극의 의미를 발생시키는 쓸모있는 것이 된다. 완성은 자신의 개체성을 넘고, 열림과 협력의 결과인 맥락의 공유를 허용할 때만 제한적으로 담보된다. 이 연작방식은 근대미학의 고상해 보였던 선언에 의해 이미 폐기된 것으로 간주되었던 형식, 즉 '하나의 회화에 하나의 아우라(aura)'라는 도식에 대한 상징적 이의제기로 독해될 수 있다. 자신과 이웃하는 타자적 질서, 곧 환경조건이나 역사적 맥락과의 상관성에 열려있는 미완과 비결정상태로서의 회화와 조각에 대한 상징적 복권의 선언으로서 말이다. ● 제단화(祭壇畫, altarpiece) 형식의 차용은 여러 개의 회화를 하나로 구성하는 연작방식의 탈(脫), 또는 반(反) 모던니즘적 맥락을 한층 더 공고히 하는 요인이다. 제단화의 전형적인 형식은 핵심적인 내용을 그린 중앙패널과 그것을 중심으로 문처럼 개폐가 가능한 양 쪽의 둘, 또는 그 이상의 날개 패널들로 구성되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역할과 내용이다. 성스러운 기독교회의 예배에서 그 공간적인 중심이 되는 제단 뒤를 보호하는 것이 제단화의 주된 기능이라는 점, 따라서 그 내용이 지역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주로 교회의 수호성인, 사도들, 교회의 박사들, 성경 속의 여러 사건이라는 점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무엇보다 제단화가 목적지향의 미학이 낳은 소산이라는 사실이다.
이 목적지향의 미학이야말로 오늘날 그 한계를 여과없이 노정하고 있는 '예술을 위한 예술'의 궤변, '순수예술'이라는 그럴싸한 수사, 칸트 미학의 뒤틀린 무사무욕성의 맹점을 단번에 관통하는 강력한 선언적 제스춰가 아닐 수 없다. 이 비전은 모던(modern) 미학에서 포스트모던(post-modern) 미학으로, 포스트 모던 미학에서 다시 모던 미학으로 -얼터(alter) 모던이나 관계의 모던 등은 일종의 수사학적 차원 이상이 아니다-지난 세기 내내 이어져 온 짧지 않은 갈팡질팡, 또는 횡설수설과 여정에 일침을 놓는다. 앞서 언급했듯, 동시대 주류미학에 대한 이 소박해 보이는 반성은 앞뒤맥락 없는 거친 객기와는 전혀 무관하다. 그것은 존재와 삶의 철학, 그리고 그의 기도를 이끄는 신앙의 기반 위에서 성실하게 경작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수묵담채가 조율해내는 정적의 분위기는 이 작은 정원을 감싸고도는 나지막한 울림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녹색의 나뭇잎들은 인생은 결코 불안정하고 변덕스러운 자아를 유일한 지도삼아 떠나는 목적없는 여행이 아니라고 속삭인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냇물은 존재라는 명칭을 단지 저주와 같은 익명성에 붙여진 가난한 색인으로 만들지 말 것을 귀뜸해준다. '마음의 정원'으로 이름붙여진 작은 제안에서 너무 멀리 나아온 것일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 심상용
Vol.20120918h | 임현경展 / LIMHYUNKYUNG / 林鉉景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