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위로와 위안

변대용展 / BYUNDAEYONG / 卞大龍 / sculpture   2012_0913 ▶ 2012_1013 / 월요일 휴관

변대용_위를 보는 메두사_합성수지, 자동차 도색_240×210×180cm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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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이배 GALLERY LEE&BAE 부산시 해운대구 중2동 1510-1번지 1층 Tel. +82.51.746.2111 www.galleryleebae.com

윤곽을 지닌 진술 ● '당신의 위로와 위안' 앞에는 생략된 문장이 있다. 아마도 '당신의 상처와 아픔' 정도의 어디쯤이 아닐까 싶다. 위로와 위안은 상처와 아픔이라는 선행(先行)이 있어야만 가능한 단어다. ● 상처와 아픔은 사회적이거나 공동의 사건일 수도 있으나 다분히 개인적 경험의 행태(行態)로 무한 생성되기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절대치의 가치를 보증한다. 상처의 경험 시 필요했을 위로라는 구조. 너무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어 굳이 오늘의 예술로 꺼내 말하기 회피하는 이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을 작가는 놀랍게도 구상이라는 구체적 형체로 감정의 동의와 이입을 획득해 낸다. 어쩌면 알 수 없는 애매한 덩어리들로 말하는 편이 더 손쉬웠을 수도 있다. 모두가 잘 아는 형태로 - 부인하기 힘든 구체성으로, 특정인만 아는 전문 지식언어가 아닌 - 너의 경험과 나의 경험을 건드리는 이야기는 더욱 위험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변대용_위를 보는 메두사_합성수지, 자동차 도색_240×210×180cm_2012

#1. 창조된 기록 : 장님과 메두사 - 뱀을 머리카락으로 가진 채 바라보는 모든 이를 돌로 변하게 하는 신화 메두사. 학습 받은 범주에서 손쉽게 판단하는 우리는 그이가 그저 두려운 대상이다. 그이를 미워해서가 아닌 나의 생존을 위해 타당한 외면이라 말하는 우리에게 변대용은 놀라운 사고의 전이를 제시한다. 아무도 눈을 맞춰주지 않는 가장 외로운 존재. 사람들이 다가오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인 머리의 뱀조차 유일한 친구라 생각하는 이. 처절한 외로움이다. 그 외로움을 목격한 변대용은 그이를 위해 극적 상황을 제시한다. 의도가 아닌 태생으로 메두사를 볼 수 없어 돌이 될 걱정 없는 '장애'라는 안전장치를 가진 장님 친구 하나 그이의 눈앞에 놓아 주었다. 그런 장애의 친구를 위해 메두사는 이전의 유일한 친구였고 동반자였던 뱀들을 스스로 거세한다. ● 모두 사실이 아니다. 목격한 모두는 창조된 것, 기록된 역사도 오늘의 현장도 아니다. 변대용은 용감하게 사실이 아닌 것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작가가 유일하게 사실을 전달한 것은 감정뿐이다. 직설적으로 보이는 감정 전달은 실은 꽤나 철학적 근원을 가진 수사학적(修辭學) 기법이다. 감정을 드러낼 때 미리 생각해 놓은 듯 보이는 방식보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듯 보일 때 감정은 더욱 효과적이다. 변대용은 이러한 수사학적 기법을 의도적으로 차용한 것은 아니다. 다만 작가적 직감, 즉 예술적 직감으로 구현해 낸 것. 찰나의 보이지 않는 감정을 구현해 내기 위해 변대용은 구체적 대상의 형태부터 다루기 시작한다. 마치 실존했던 듯 느껴지는 메두사와 장님의 묘사는 조형적으로 적절한 균형을 갖췄다. 비교적 상대적이라 느낄 수 있는 묘사를 통해 대상은 더욱 이야기를 갖추게 된다. 스스로 내재된 내러티브(narrative)를 확보한 메두사와 장님의 묘사는 기술적 방식을 넘어 차례로 곱씹은 사유의 과정까지 녹아있어 낱개의 개체뿐 아니라 상대적 유기성도 획득한다. 이들의 관계성은 긴장감(tention)으로 더욱 견고해지는데, 관계의 적절한 호흡, 그 호흡의 거리. 시선의 위치, 시선의 위치를 결정짓는 눈꺼풀 형태와 각도. 메두사의 잘린 머리카락, 장님의 눈에 투사된 메두사의 색감 등이 그러한 부분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다. 이 모두는 결코 이미 설정하여 진행하기 불가한 미묘한 것들이다. 그 미묘함 그러나 적절한 선택은 바로 오늘의 작가 변대용이 가진 힘이며 예술로서의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화법이다.

변대용_장님과 메두사_합성수지, 자동차 도색_95×100c×55m, 140×160×100cm_2012

#2. 기록의 방식 : 선택과 직감 -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할 것 같은 것들을 창조하는 변대용에게는 '선택'이라는 필요충분조건의 순간이 반드시 전제된다. 자신이 갖고 있는 이미지에 대한 사유가 최대한 명료함을 띨 때, 작가는 현상들을 관통해서 실재적 형태에 도달하고 선택적이나 직감적인 색채를 사용한다. 동시에 관계와 손이 멈춰야하는 통제까지 모든 순간의 선택이 발현된다. 이 순간만큼은 예술 작품으로 파악되는 그 자체에 수 없이 반복된 의문이 사라지고 확신이 등장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러한 부분은 묘사에 강한 작가가 그것을 버리고 크기와 색감만으로 완성시킨「임신한 화면조정」이라는 작품이 좋은 예시가 되어 준다. 압도적 크기와 절대적 개념의 상충관계를 일상의 경험에서 포착하여 예술작품으로 승격시킨 동시에 어렵지 않게 웅장하나 조용하게 작가는 말하고 있다. ● 24시간 TV를 시청할 수 있는 지금은 잘 볼 수 없지만 예전엔 정규방송이 끝난 이후 화면조정시간이라는 이름의 방송이 없는 빈 시간이 있었다. 잉여의 시간 같은 이 때 방송국에서 적절한 주파수를 유지하며 저렴한 비용으로 구실을 만든 것이 다양한 색을 분할하여 제공하는 것. 사실 화면조정 시간은 진실된 의미의 화면 조정이 아닌 방영되지 못한 여분의 시간, 버려진 시간을 의미하는 대명사였다. 조금만 유심히 바라보면 그저 불뚝 솟은 반구형의 부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임신한 여인의 배다. 익명이며 소외된 축복받지 못한 임신이다. 굳이 관찰이라는 단어를 들먹이지 않아도 변대용이 말하고자 하는 맥락을 짐작케 한다. 그가 주목한 동시대의 소외를. 예술가로서 그가 할 수 있는 사회적 발언을. 정치적이고 공격성을 띤 웅변이 아닌 소외를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감싸며 낮은 것들의 대한 소중함을 드러낸다. ● 변대용의 작업은 개념보다는 시각이 먼저 보인다. 그러나 작가적 사유나 개념에 주목하는 것은 작가가 일상에서 본다는 것의 의미를 작업으로 수행하는 과정상 겪는 수많은 접근법에는 반드시 그의 선택적 시각과 예술적 직감이 작용하였음을 기술(記述)하고 싶기 때문이다.

변대용_장님과 메두사_합성수지, 자동차 도색_95×100c×55m, 140×160×100cm_2012

#3.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 - '당신의 위로와 위안'에서 변대용이 화두로 던지고 있는 주체는 '당신'이 아닐지도 모른다. 작가에게 '당신'은 곧 '자아'이며 '당신'에게 제공하고픈 위로와 위안은 '작가'가 필요한 그것인지도 모른다. 굳이 이런 진부한 표현이 아니더라도 일상의 어느 순간, 문득, 떠오를 수 있는 생각이고 새삼스러운 문장도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스스로 그러하게 된 자연스러운 생각이다. 이러한 문장은 누군가에겐 바람처럼 스쳐지나가는 일이 될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겐 벗어나기 힘든 운명 같은 단초가 된다. (한자경의『자아의 연구:서광사. 2003』를 참조한 표현이다.) ● 2007년『갈증이 나다』란 제목의 첫 번째 개인전으로 변대용은 이러한 질문을 본격화하기 시작한다. 작가는 '나'를 물으며 동시에 '내'가 속한 사회와의 관계성 속에서 상실된 자아를 발견하곤 진정한 자아 찾기의 방법으로 정보와 인식의 코드가 되어버린 통념을 제거해 나간다. 거세되어진 대상에는 익명의 새로운 얼굴이 부여되고, 그를 통해 타자화(他者化)된 자아(自我)를 발견하려는 것이었다. ● 타자를 통해 자아를 보려했던 변대용의 시선이 자기 자신으로 움직여 새로운 몰입의 국면을 맞는다. 작가가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선행되지 않았다면 고백과 같은 자신의 이야기가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기 고백적 작업을 통해 작가는 결국 자신이 속한 사회와의 소통을 시도한다. ● 변대용은 왜 이렇게 바라보는 것으로의 몰입을 통해 실존과 사회에 관한 본질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가. ● 심리학적으로 보면 예술 활동은 감정표출의 일종이다. 작가는 감정을 고양하고 방출함으로써 자기의 심적 상태를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예술 활동을 기초 지으려 한다고 이리오 히른(Yriö Hirn)은 말하고 있다. 변대용이 관찰의 대상으로부터 인지된 내용을 감정적으로 파악할 때는 그것과 유사한 자신의 감정을 자기 내부로부터 대상에 투사하여 마치 대상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포장한다. 즉, 대상에 대한 감정이입인 것이다. 그러한 변대용의 포장은 익명인들의 얼굴 변화라는 재현의 대립개념일 뿐 아니라 대상에서 오는 인상과 대립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인상이란 외부의 자극에 의해 작가의 마음속에 생기는 효과이고, 표출은 이와 반대로 마음속의 체험 내지 감정을 밖으로 발산하는 작용이다. 변대용은 바로 대상의 인상에 대한 감정이입 표출 수단으로 작업을 만들며, 그것을 통해 본질과 진정성에 대한 고민의 동의를 구하고 있다.

변대용_유기견과 유기인_합성수지, 자동차 도색_900×400×300cm 이내 설치_2012

윤곽을 지닌 진술 ● 결국 변대용이 작업에 임하는 방식은 다른 시각예술창조자와 같이 어떠한 사물과 사람을 보고 실질적인 상황이나 실제를 인지하는 대신 응시와 몰입을 통해 자신만의 시각적 정황을 만들어 나가면서 그것들을 먼저 인지하는데서 비롯되어 진다. ● 흔히 '보다'라는 표현은 유사한 언어군(見, 觀, 看 등)을 형성하면서 미묘한 차이로 관계와 대상을 규정짓거나 인지와 인식의 차이를 보여준다. 그 가운데서 응시라는 단어는 대상에 대한 즉물적이거나 표면적인 현상만을 선인지하는 것이 아닌 시간이라는 행간을 빌어 관찰자에게 충분한 사유의 개입이 가능하게 하는 용어이다. 대상에 대한 이러한 행위는 단지 일방적인 관찰로 포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관조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응시함으로써 대상에 대한 속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이후 작가적 사유의 자연스럽게 도출시킬 수 있는 시간적, 정신적 공간을 마련해 준다. (로버트S.넬슨의『새로운 미술사를 위한 비평용어31』을 참조한 표현이다.)

변대용_임신한 화면조정_포맥스, 합성수지, 자동차 도색_250×350×50cm_2012
변대용_밤_포맥스, 합성수지, 자동차 도색_400×250×230cm 이내 설치_2012

또한 변대용의 응시는 일시적인 행위가 아닌 반복적이며 지속적이어서 몰입의 지점에 가깝게 보여진다. 동양철학에서 천리(天理)를 깨닫기 위해 깊은 사유의 지속을 요구했던 것처럼 그는 자신이 바라보기 시작한 대상들에 대한 몰입의 응시과정을 통해 작가적 철학과 작품을 완성시켜 나아간다. ● 몰입의 시간을 통해 얻어진 이미지에 대한 단상을 예민하고 섬세한 조각으로 완성시켜 나아가는 것, 그 행위 자체는 노동이다. 동시에 동어반복의 양상을 띠고 있는 익명인들의 변화와 얼굴의 눈 주위의 변리(辨理)를 이용하여 변화시키는 작업은 작가적 어법의 특징이기도 하려니와 사고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유기적 수련의 결과로도 읽혀진다. 이러한 과정 중에 발휘 되는 예술적 영감이라는 부분은 강한 견인력을 가지고 작가를 열중의 상태로 끌어넣는다. 그렇기 때문에 만만치 않은 작업의 방법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전시를 수행해내는 괴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열중의 적절한 수단으로 변대용이 선택한 방법은 형상 조각이고, 이는 표현목적을 유효하게 달성하는 적절한 진술이 된다. 이 진술은 합리적, 목적적인 동시에 의식적 숙련을 요하는 윤곽을 지닌 능력이기도 하다. 이렇게 마련된 방식 안에서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의 불편이나 우울을 타파해 판타지 세계로 이끄는 것이 아니다. 확인해 봐도 여전히 의문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조각이라는 윤곽을 지닌 진술로 드러낸다. 외면했던 현실에 대한 각성과 같은 이 시나리오는 변대용의 작업이 우리에게 던지는 사회나 공동체에 관한 물음인 동시에 본질에 대한 고찰의 요구이기도 하다. 산꼭대기로 올려도, 올려도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치열하나 묵묵하게 옮기는 시지프의 신화(Le Mythe de Sisyphe-Albert Camus) 같은 변대용식 사유는 진리라는 가치에 대한 그만의 접근방식인 조각으로 다시 우리에게 진지한 말을 걸어오고 있다. ■ 김최은영

Vol.20120914h | 변대용展 / BYUNDAEYONG / 卞大龍 / sculpture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