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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913_목요일_05:00pm
공동기획 / 남이랑_오미진_장예빈
주최 / 국민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 주관 / 국민대학교 일반대학원 미술이론전공
관람시간 / 10:00am~05:00pm
국민아트갤러리 KOOKMIN ART GALLERY 서울 성북구 정릉로 77(정릉동 861-1번지) 국민대학교 예술관 2층 Tel. +82.2.910.4065 art.kookmin.ac.kr/site/fine.htm
표류하는 길 속의 숨은 길 찾기 : 홍원석의 회화 작업과 아트택시 프로젝트 김창조 ● 여기 있는 회화 작업들은 최근 것들인가? 홍원석 ● 2011년도에 제주에 체류하던 시기 강정마을 해군기지가 생기면 어떤 상황이 도래 될 것인가에 대한 작업들이다. 김창조 ● 초기 작업으로부터 변화과정을 듣고 싶다. 홍원석 ● 처음에 무얼 해야 되나 고민하다가 제일 잘 알고, 절실한 것이 아버지의 택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년시절, 아버지 퇴근길에 뒤에 많이 탔었는데, 헤드라이트 빛을 비추면 어둠 너머에 아련한 무언가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불빛에 드러나는 대상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그 이면의 어둠속에 또 다른 무엇이 존재할 것 같은 궁금증이 있었다. 유년시절엔 그런 것들이 참 신비로웠다. 김창조 ● 가로등 없는 인적 드문 길들을 헤드라이트를 켜고 달리는 풍경들은 대전지역에 대한 기억에서 비롯된 것인가? 홍원석 ● 충남 논산에서의 일이다. 시골이라서 숲길도 많았고 도심보다는 밤풍경이 더 파란 기억이 있다. 김창조 ● 시대성이나 지역성이 흐릿해져서, 모호하면서도 기시감이 느껴지는 풍경들이었다. 몽환적인 로드무비와 SF영화를 혼합해 놓은 듯한 그 특징적인 장소성이 어디에서 비롯 되었나 궁금했었다. 일단, 유년기에 추억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도 있겠다. 홍원석 ●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그렇게 시작을 했다.
김창조 ● 회화 작업이 변화해간 과정에 대해 더 듣고 싶다. 홍원석 ● 유년시절에는 택시운전사가 꿈이었다. 1960~70년도의 할아버지가 택시기사를 하셨는데 너무 멋있었다. 영웅이었고, 집의 가장이었고, 부유했고. 그 당시 택시운전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었다. 하지만 산업화되면서... 김창조 ● 1982년생이면, 8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에 해당되는 기억들이겠다. 홍원석 ● 그렇다. 할아버지가 포드로 운전했고 아버님은 프린스로 택시를 몰았는데, 많이들 부러워했다. 충남논산에서는 부유하게 잘 사는 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할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장애인이신데, 택시라는 직업에 자부심이 있으셔서 자신의 상황을 인정 안했다. 하지만 누적된 피로로 점점 몸 상태가 안 좋아지셨다. 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택시를 타면서 세계일주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택시기사가 되고 싶었는데 집안 환경도 안 좋아지고 현실에 부딪히면서 모든 게 무너져버렸다. 부모님은 내가 4살 때 이혼 하셨고, 집안이 급격하게 어려워지며 집도 경매로 없어졌다. 할머님과 아버님을 모시고 도대체 무얼 해야 되나? 어떻게 살아야 되나? 고민을 많이 했다. 대학 갈 때쯤 공부도 안했고, 중학생 때 그나마 만화를 끄적거리곤 했는데, 만화과는 당시 인기학과라 수채화를 배워서 미대를 가라고 하더라. 그래서 서양화 준비를 했고, 한남대에 입학했다. 2학년까지 마치고 군대를 갔는데 앰뷸런스 운전병이었는데 응급출동이라든지 야간에 나갈 일이 많았다. 그러면서 빛에 대한 관심과 운전에 대한 경험들이 촘촘히 쌓이면서 많은 생각들을 했다. 그런데 군대에서 제대 할 때쯤 아버지가 심근경색으로 입원을 하셨다. 혼자 사시니까 몸을 못 챙겼던 것이다. 복학하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서 전북 장수-진안간 9공구 도로현장에서 임시직원으로 10개월 동안 막노동을 했다.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운전하면서 태국말도 배우고 새로운 경험들이 흥미로웠다. 묵묵히 일하다보니 10개월 동안 천만원을 모았다. 일하는 동안 그림 그리는 일이 너무 하고 싶었다. 당시 시골집에 할머니와 아버지와 임시거주 할 때였는데,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대학에 복학한다 했더니, 눈물 글썽이면서 그냥 이렇게 같이 살면 안되겠냐고 하셨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내 인생을 살고 싶었다. 마음은 아팠지만. 내 삶을 살아 보겠습니다 하고 독립해 나왔다. 복학해서 무엇을 그릴까 하다가 내가 경험했던 것을 그려보자 해서, 앰뷸런스와 택시로 시작이 된 것이다. 김창조 ● 인생사가 다 나온다. 그런 경험 속에서 택시라는 소재가 등장하게 된 것인구나 싶다. 홍원석 ● 말하자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2007년 대학원 재학 중에 중앙미술대전, 송은미술대상전에 응시했는데 당선이 돼서 사람들이 놀랐다. 그렇게 졸업을 하고 서울옥션이라든지 초대개인전을 통해 전시를 했더니, 작품이 팔렸다. 공교롭게도 당시 미술시장이 호황이었다. 통장에 2천만원 3천만원이 찍히는걸 보며 이렇게 그림 그리면서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상상을 했었다. 그런데 2008년도가 되니 미술시장이 다시 확 죽고, 그림이 안 팔렸고 곧 형편이 어려워졌다. 그때 과거 아버지의 몰락이 떠올랐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미술도 똑같구나. 타짜와의 싸움이구나. 내가 새로운 구조를 만든다는 일이 거의 불가능한 것이겠구나 하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택시가 등장하는 회화작업을 언제까지나 계속할 수는 없다는 고민도 했다.
김창조 ●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을 것 같다. 홍원석 ● 그래서 그림을 그릴 때 상상을 많이 했다, 2차원의 평면이지만 이것을 3차원으로 끄집어내서 그림 속의 풍경과 도로를 실제로 돌아다니면 어떨까?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받았던 사랑 아버지에게 받았던 사랑을 어떻게 돌려줄 수 있을까? 2009년도에 청주 미술창작스튜디오에 들어가게 됐다. 그 곳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번번이 도로변을 위험하게 이동하는 장애인들을 보며 아버지도 생각하게 됐다. 아버지도 저런 모습이었을 텐데. 그래서 본격적으로 스튜디오 밖으로 나갔다. 청주 용암동 인근에 있는 장애인 단체에 찾아가서 재미난 '홍기사 프로젝트'라는 예술프로젝트를 하고 싶다고 했다. 김창조 ● 그들을 돕고 싶었던 것인가? 홍원석 ● 도와준다는 건 아니고 동등한 입장에서 접근한 작업이었다. 장애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내려다 보는 것은 편견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최근에서야 장애인 복지혜택을 받기 시작했는데, 예전에 외부사람들이 복지혜택을 권유할때마다 난 장애인이 아니다 그런 혜택은 내가 받을게 아니다 라고 단호하셨다. 나도 아버지가 장애인이라는 생각을 전혀 안했다. 일반인으로 생활 해가는 모습이 좋았다. 홍기사 프로젝트는 호혜적인 나눔, 같이 함으로써의 가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김창조 ● 무얼 같이했나? 홍원석 ● 그때 홍기사 프로젝트에서 프로그램이 있었다. 홍기사 대리운전 프로젝트, 용암동 미술관가기, 기적의 인터뷰-X 등등. 미술관도 가고, 때로는 청주 지역의 장애인시설 관리활동도 함께했다. 같이 서울에 가서 시위도 참가하고. 김창조 ● 프로젝트를 통해 만난 이들과 프로젝트 완료 후 관계는 어떻게 이어지는가? 그리고 프로젝트를 통한 경험한 것들이 회화나 다른 매체로 이어지는 경우에 대해서도 듣고 싶다. 홍원석 ● 지금처럼 광범위하고 정리된 형식의 영상으로 남기는 작업은 아니었지만, 인터뷰 형식의 시도를 해봤고, 사진을 아카이브형식으로 수집해두었다. 회화 작업 내용도 많이 달라졌다. 바깥에서 움직이다보니 너무 신나 몸이 찌릿찌릿 했다. 그래서 오 이거 잘 됐다. 무턱대고 이대로 더 해보자는 마음에 제주도로 중고차를 가지고 떠났다. 다시 돌아올 생각도 않고 주민번호도 제주도민으로 바꿔버리고.
김창조 ● 제주도 방송에서 촬영한 영상을 봤다. 다소 낯설지만, 경계할 만큼은 아닌, 주민들의 생활 속에 그럭저럭 잘 섞여 들어간 모습이 보였다. 참여자들을 위한 프로젝트 홍보 내용이 어땠는지, 참여자들이 프로젝트의 의미를 얼마나 파악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예컨대, 평범한 문화여행으로 보였는지, 좋은 곳과 나쁜 곳을 돌아보는 프로그램 같은 것은 어떻게 명시되어 있었는지 등에 대해 말이다. 또한 제주도에서 주민들의 호응이 예술적 측면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기도 했는가? 홍원석 ● 예술에 대한 호기심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청주에서는 중증장애를 지닌 한 분이 평소 입으로 시를 상당한 양으로 쓰곤 했는데, 그 창작물과내 전시와 함께 같이 발표하기도 했다. 제주도에서는 아트택시로 문화여행을 가면서 좋은 곳과 나쁜 곳을 두루 체험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아이들을 위해서 무료축구관람을 위해 제주 유나이티드 관계자의 티켓 후원을 받아 내기도 했다. 축구장과는 거리가 먼 지역이어서 호응이 좋았다. 중, 장년층의 경우에는 내가 추천하는 여행 장소에 가기도 하고, 승객들이 원하는 장소로 가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제주도에서 문제가 되는, 예를 들어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공사현장에 들려 중립적 입장으로 그들에게 지금 벌어지는 현재 상황에 대해 스스로 판단할 기회를 주기도 했다. 당시 강정마을 일들이 언론적으로 크게 보도되지 않았고 지금보다 훨씬 무관심한 상태였는데, 공사는 너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가시리 레지던시 관계자들은 나의 투어 코스에 강정 마을이 들어가 있는 것을 싫어했다. 결국 한 달을 앞두고 나가라는 공문을 받았다. 김창조 ● 그 뒤의 일정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홍원석 ● 제주도에서 마지막 결과물과 기록들을 서귀포의 갤러리 "하루"에서 전시를 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가시리에서 안하고 왜 서귀포에서 하냐, 주최 측과 연락 없이 왜 언론에 전시한다는 보도 자료가 먼저 나왔냐, 판매수입을 왜 강정마을에 기부 하냐 등 난리가 났다. 나는 언론 등을 통해 제주에서 나름 주목을 받았던 상황이었고, 가시리 쪽 마을 분들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결국 퇴출 통보를 받고 침울한 시기에 마침 큐레이터 한 분이 문화체험을 신청 해와서, 내가 추천하는 장소와 강정마을 등지를 돌아봤다. 그걸 인연으로 후에 경북영천 마을미술프로젝트로부터 보다 예술적으로 진화한 아트택시를 보여 달라는 부탁과 함께 입주 제안을 받게 됐다. 김창조 ● 당시 제주도에서 프로젝트를 더 지속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은 없었나? 홍원석 ● 좀 충격이 컸다. 나름 내 돈과 시간을 들여 열심히 프로젝트를 수행했는데 결국 그 공동체에서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니 실망스러웠다. 도대체 이게 뭐하는 건가? 결국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아야 되나? 하는 회의가 들었다.
김창조 ● 작업의 정치적 표현에 대한 주최 측의 직간접적 간섭이라든가, 주최 측 입장에서 성과로 기록될 수 있는 계량적 측면에 대한 강제라든가, 그런 것들은 비단 가시리만의 문제랄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 시스템의 관행에 대해 자기한계를 미리 긋고 별 잡음 없이 수행 되는 작업들에 비해, 제주 프로젝트에서는 시스템과의 충돌들이 드러나서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프로젝트들이 커뮤니티 아트라든가 공공미술 등 미술 담론 내에서 어떤 의미나 전망을 갖는지에 대한 생각들은 없었나? 홍원석 ● 당시 그런 생각들은 별로 없었고, 단지 내 경험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느껴진 것들을 나만의 감수성,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에 집중해 있었다. 그런데 제주도 프로젝트에 대해 기대치 못했던 미술계의 관심들이 있었고, 그런 관심들을 계기로 영천 가상리 마을 미술프로젝트 등에도 참여하게 되었고, 대전시립미술관 창작센터의 프로젝트 리뷰, 경기문화재단 주최의 커뮤니티와 아트라는 콜로키움 등에서 내 프로젝트에 대해 여러 사람들과 논할 수 있었다. 그런 경험들을 통해 내 프로젝트들이 진지한 예술 작업으로 사유될 수 있는 것이구나, 내 다른 작업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또 하나의 작업이 될 수 있구나 생각 하게 됐다.
김창조 ● 2010년 청주, 2011년 제주도, 영천. 그리고 2012년 창동스튜디오에 이르는 최근 3년간의 프로젝트와 기존의 회화 작업 사이의 관계 설정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다. 홍원석 ● 회화 작품이 독립된 조형언어로서 미학적으로 소비된다면, 아트택시 프로젝트는 현장에서 예측 못한 다양한 내러티브를 구축해낸다. 프로젝트 종료 이후에도 다양한 컨텍스트로 독해될 수 있는 현장의 '사건성'이 남게 되는 것이다. 김창조 ● 택시운전을 매개로 직접 마을과 공동체 속에 개입해 들어가, 커뮤니티와의 관계 자체를 내용으로 하는 프로젝트의 특수성이 작업실 내의 개인작업인 회화작업과 교차점을 형성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해가는 지점이 궁금하다. 홍원석 ● 나는 바깥에서 움직일수록 이것을 더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강해진다. 그래서 빨리 작업실에 들어가서 그림으로 담아내고 싶어진다. 김창조 ● 점차 지역주민들의 삶 속에 녹아 들어가 그 일부가 되었다기보다는 현장에서 프로젝트의 예술적 측면이 부각되는 것 같다. 창동에서의 활동을 보면 승객들이 특이한 문화적 체험으로 생각하거나, 지역을 무대로 한 하나의 새로운 예술적 프로젝트라는 의식을 갖고 참여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소통의 방식과 내용이 달라질 수 밖에 없는 변화이다. 현장에서 프로젝트가 어떻게 이해되길 바라는가? 홍원석 ● 글쎄, 답은 잘 모르겠다. 그냥 내 관심을 끄는 문제들 우리가 함께 겪고 있는 문제들로부터 시작했는데, 경험을 통해 점점 사회정치적 관점으로 넓혀가면서 대중의 인식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공동체성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질문하거나 건드리게 됐다. 시골에서는 사건으로서의 예술이라 한다면, 서울에서는 이벤트로서의 예술이라 할만한, 그런 차이들이 생기는 것 같다. 아무튼 선 체험 후 창작이라는 말이 있듯이 나는 현장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내 시각에서 바라보고 그 경험을 작업의 내용으로 할 뿐이다. 프로젝트에 함께했던 분들은 내 진심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프로젝트의 시작은 어떤 기금에 의존한 것이 아닌, 자발적인 마음의 움직임이었다. 요즘 서울 창동에서의 결과물을 가지고 설치, 회화, 영상, 협업을 통해 전시를 준비 중인데, 이런 작업들이 어떤 모습으로 보여질지는 모르겠다. 보는 사람의 몫이 아닐까? 김창조 ● 프로젝트 결과물들을 보여주는 매체와 그 형식들도 궁금하지만, 창동에서 어떤 체험 영역이나, 인식이 확장되는 순간들이 있었는지 듣고 싶다. 예상치 못한 돌발적 계기를 통했거나, 혹은 점진적으로 축적됐거나 말이다. 홍원석 ● 반 반 일 것이다. 내 프로젝트는 어느 시점에서 결국 사라지겠지만, 프로젝트 내에서 만났던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는 남을 것이다. 어찌 보면 착한 예술의 모습으로 보이겠지만,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그 분들의 초상권과(허락을 받지만) 대화 중 아이디어를 뺏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창조 ● 공동체를 대상으로 하는 프로젝트의 경우 그 수행 과정에서 삶과 예술 사이의 거리에 대해 질문들, 어찌 보면 오래된 질문들을 새롭게 던지게 된다. 프로젝트가 삶 속으로 완전 용해되어, 이를테면 홍작가의 아트택시가 일반 택시를 그저 무료로 이용하는 것과 구별되지 않는 지점에 이르는 상황을 가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반대 쪽 극단으로 당신의 아트 택시가 지닌 예술적, 미적 태도와 지향이 공동체 내에서 완전히 이해되고 수용되는 상황을 가정할 수 있을 텐데, 전자를 윤리학 내로 용해되어 자취를 감춘 미학이라 한다면, 후자는 윤리로부터 자율성을 획득한 미학이 될 것이다. 이런 고민들을 피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홍원석 ● 접점이 있는 것 같다. 내 경험한 것을 통해 내 목소리를 내는 것이 삶과 예술의 접점이라고 본다. 사실 아트택시란 것도 보통 중고차에 아트택시라는 이름을, 예술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것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미학과 윤리학은 구별된다고 느꼈다. 내가 수행하는 행위에 대한 예술적 책임은 있지만, 그래도 모든 사람들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건 아니잖나. 내 예술적 표현의 방법들이 전략적이지도 않다. 직접 부딪히며 얻어지는 것을, 내 목소리를 통해, 내 표현 방식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각 개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삶을 통해 전해지는 진리들은 무엇인가. 평범한 것들 속에 감춰진 가장 소중한 것들. 우리라는 큰 틀 속에서 개별적인 경험들이 합쳐지고, 다시 예술이라는 그물을 통해 깊고 다양한 질문들을 길어 올리는 것이다. 김창조 ● 현장에서의 생생한 사건성이란 것이 그럴 듯한 명분이나, 당위성에 딱 들어맞는 결과물로 정리될 수 있을까? 외려 그 빗나감, 어긋남에 대한 사유를 통해 다양한 의미들이 생성되지 않을까? 홍원석 ● 프로젝트 같은 경우 그것에 대한 결과물에 대한 기대치들이 있다. 그 예술적 장치가 무엇이고, 사회적 관계들, 이슈들이 어떻게 그럴 듯한 수위에서 사유 되었는가 같은 것들. 나는 이것들을 하나하나 예술로 실험해보는 단계인데, 한꺼번에 많은 부분들을 원하는 것 같았다. 계속 시행착오를 겪으며 내 목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에 있는데, 너무 잘 짜여진 틀에 의해 한쪽 방향으로만 몰고 가는 그런 강제들. 나의 예술에 대한 진정성은 이런 긴 과정들을 통해 내가 도달한 지점에서 판단할 수 있다고 본다. 김창조 ● 앞으로 기대가 된다. 자기 개인사적 깊이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고, 자동차라는 이동하는 공간을 무대로 선택한 점도 흥미롭다. 개인을 공동체로부터 이탈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장치를 통해 공동체에 대해 질문하는 역설적 방식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궁금하다. 현장에서 작가의 명랑한 태도도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만남과 대화의 다양한 층위에 대해 다소 평면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질적으로 상이한 승객의 유형들, 대화가 형성되는 접점의 상이한 수준들, 층위들에 대한 고민과 해석들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 홍작가의 택시 프로젝트를 제약 없이 지원해준다면 어떤 형태로 운영해보고 싶은가? 홍원석 ● 이상적인 운영에 대해서는 관심 없다. 사실 운전하는 거 되게 싫어한다. 나아가 자동차도 싫다. 종종 오해받듯이 자동차 매니아도 아니고, 난 단지 차 안의 작은 공간 속에서 사람과 사람사이의 만남들이 중요하다. 굳이 차가 없더라도. 김창조 ● 작가가 누리게 되는 특권적 자유와 책임 사이에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필요한 균형감각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싶다. 홍원석 ● 미리 정해진 것이 없는 자유로운 만남이었다. 어쩌면 미리 공부하고 계획된 일로 진행했다면, 어떤 편향이 생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는 일종의 규칙 같은 것들을 발견하고, 연구 하면서, 처음 만남 사람들의 단단히 묶인 마음의 끈을 풀어가기도 한다. 때론, 진부한 대화 속에서 중요한 부분을 포착하게도 된다. 특수한 공동체에 대해 정해진 질문을 던지고 만났더라면, 기대한 답이 나올 수는 있었겠지만, 그런 뻔한 것들의 한계를 피하고 싶었다. 김창조 ● 만남의 폭, 대화의 폭을 넓히는 것이 작가의 능력이 아닐까 싶다. 다소 돌발적이고, 위태롭고, 불쾌한 상황들도, 새로운 이해와 관점에 의해 새로운 계기들로 이어질 수 있을텐데, 사실 홍작가의 프로젝트에서 그런 지점들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했다. 홍원석 ● 나로서는 조심스러운 부분이었다. 강정마을이라든지 희망버스라든지 특수한 지역에 상주하면서 그 이슈를 이용했다면, 돌발적이고 자극적인 이야기를 담을 수 있었겠지만, 피했다. 내 이야기로부터 시작을 한 거고, 강정마을에 가더라도 내 관점에서 체험하고 질문을 던지는 방법을 원했다. 예술이란 질문을 만드는 것이지 해결사로서의 역할은 아니라고 본다. 김창조 ● 그런 조심스러움은 이해한다. 나 역시 어떤 특정 정치적 입장들 사이의 불편함이나 돌발적 갈등들을 말했던 것은 아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오히려 집단의 이해관계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는, 다소 막막하더라도 그들 사이에서 길을 찾아가는 그런 모습들이 좋아 보인다. 단지 그 길 위의 만남들 역시 실은 위태로운 줄 위에 간신히 놓여 있는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자 했다. 그런 것을 다 끌어 안고 간다는 것은 물론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홍원석 ● 기댈 언덕이 너무 없다. 주위를 보면, 그림을 함께 그렸던 동기들, 주변의 작가들도 하나 둘 사라지고 있다. 결국 부자가 되거나 교수가 되거나, 아니면 줄을 잘 타거나. 젊은 작가들은 어떻게 살아야 될까? 어떤 모습을 보고 배워야하는지. 이건 모가 아니면 도가 되는 게임처럼 보인다. 김창조 ● 처음엔 도가 나오고 다음에 개, 걸, 윷, 모로 이어지는 게 좋지 않나? 시장의 등락에 따라 오르락 내리락 하는 삶이 불안해 보일 수도 있지만, 역사에 부침에 따라서 하루아침에 나락에 떨어지고 마는 수많은 근대사의 개인의 역사를 돌아보면, 사실 지금의 삶이 딱히 더 불안한 것도 아니다. 단지, 이 시대는 유난히 겁에 질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기를 보호하기에 급급한 이 시대의 침묵의 표정들과 그 질감들을 잡아내는 시도는 어려울 뿐만 아니라, 무모한 일이기도 하다. 누가 겁에 질린 스스로의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겠는가. 그래도, 이런 불안한 삶 속에서 작가는 한 가지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작업을 통해 삶의 연속성을, 거리를, 여유를 확보할 수 있다는 특권 말이다. * 다음 인터뷰는 2012년 6월 1일부터 6월29일까지, 휴+네트워크 창작스튜디오 1:1 작가 멘토링 프로그램에서 진행된 김창조(큐레이터)-홍원석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국민아트갤러리 청년작가 공모전은 국민대학교 예술대학 내의 국민아트갤러리에서 동시대미술을 이끌어 나갈 젊고 참신한 작가를 발굴하여 개인전 개최를 지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A Taxi Driver展은 청년작가 홍원석이 향후 더욱 성숙된 작가로서 나아가는 길에 한 과정이 되고자 한다. 소통의 매개체를 '아트택시'로 삼으며 사람들과 계속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홍원석 작가의 작업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며 본 전시가 그의 작업을 더욱 발전시키며 한걸음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되기를 희망한다. ■ 국민대학교 일반대학원 미술이론전공
Art와 Taxi가 만났다. 이 두 가지는 어쩌면 작가가 성장하고, 현재의 삶을 구축해 나가기까지 아주 많은, 혹은 대부분을 차지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작가가 자동차로 작업을 하게 된 이유는 필연적이라고도 하겠다. 지금은 그 스스로도 운전대를 잡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지만 작가는 가끔 할아버지, 아버지의 택시가 그립다. 그렇다. 작가의 아버지는 자동차가, 운전이 생계 수단이었다. 택시는 삶을 일구어 나갈 수 있는, 의식주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직장이자 직업이다. 유년기 아버지의 택시를 타고 다녔고, 아버지의 택시에서 지나쳐 가는 풍경들은 어린 작가가 보기엔 너무나도 큰 세상으로 여겨졌고, 지금은 그때 그 감정이 고스란히 자라나 작업으로까지 옮아지게 되었다. ● 우리에게도 차로 지나치는 풍경은 언제나 익숙하다. 이번 전시에서는 어쩌면 누군가는 매일 보는 차창 밖 풍경을 생소한 공간에서 맞닥뜨리게 된다. 분명 이러한 풍경들은 익숙하지만 다른 공간에서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하게 된다.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이 상반되는 두 가지를 시각적으로, 공간적으로 충족할 수 있는 전시이다. 거기에 현대 사회 도시의 소시민들, 다양한 연령대의 주민들과의 소통도 이루어진다. 작가는 다른 이들과의 소통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우리는 소통하는 것들을 보며 작가의 작품과 소통을 하게 되는 것이다. Art Taxi는 도시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시점을 보여줌과 더불어 작가의 유년기를 떠올리게 하며, 사람들과 만나는 소통의 장이 된다. ■ 장예빈
Vol.20120914d | 홍원석展 / HONGWONSEOK / 洪原錫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