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닝 퍼포먼스 / 2012_0912_수요일_07:00pm
퍼포먼스 2012_0915_토요일_06:00pm 2012_0918_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옵시스 아트 OPSIS ART 서울 종로구 소격동 36번지 Tel. +82.2.735.1139 www.opsisart.co.kr
긍정 그리고 초월 - 박유아의 퍼포먼스,「르쌍띠망-효」 ● 박유아의 퍼포먼스「르쌍띠망-효」에 대해 언급하기에 앞서, 돌아보면 별 모난 곳 없이 비교적 평이하고 순탄한 삶을 살아온 내가 사랑과 증오의 극명한 양가(ambivalent)적 감정이 충돌하며 빚어지는 딜레마가 한 인간의 의식을 얼마나 고통스러운 극한으로까지 몰아넣을 수 있는지, 나아가 그 아포리아(aporia)로 인해 형성된 의식의 심연을 헤아려볼 삶의 조건을 갖추지 않았음을 먼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심정으로 상상을 통해 감정이입해 보는 것이 전부일 수밖에 없는 나에게 박유아 퍼포먼스의 절박함이란 애초부터 그저 단순한 유추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단지 그의 퍼포먼스 몸짓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피상적인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의 구체적 몸짓이 발산하는 상징적 메타포들로 인해 내가 가 닿을 수 없었던 어떤 새로운 인식의 세계가 열리는 느낌이 있고, 그로부터 어떤 시원한 감각적 쾌감이 환기되는 까닭은 나와 그의 삶의 조건이 비록 같지 않다하더라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어떤 시대정신을 같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동양화를 전공한 박유아는 그동안 수묵뿐만 아니라 세라믹, 메탈, 섬유 같은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여 조각이나 멀티미디어 설치까지 그 작업의 영역을 확장하여왔다. 내용은 형식을 따르고 혁신적인 기술들은 정서와 사고의 새로운 구조를 낳는다는 마셜 맥루한(Herbert Marshall McLuhan)의 말을 인정하면 미디어의 전환 속에는 분명 그것을 사용하기 전과 후의 다른 의식세계가 존재함을 부인할 수 없다. 동양의 전통적인 기법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 혁신적인 기술들로 이루어진 다양한 매체실험을 하던 그가 몸을 쓰는 퍼포먼스로 미디어의 형태를 바꿨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층위에서 그의 행위를 새롭게 바라보게 해준다.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2차 도구를 사용하는 방식에서 퍼포먼스로의 전환은 마치 기악에서 성악으로 바꾸는 시도처럼 혁명적인 것이다. 몸이 또 다른 도구 즉 페인팅과 같은 아날로그적 2차 도구를 사용하는 것과 그 2차적 행위가 다시 기계적 변주를 거쳐 나오는 뉴미디어의 사용이 다를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 감각을 사용하는 방식의 차이 때문이다. 몸이 외부의 감각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체계라면 아날로그적 2차 도구는 그 감각이 대상화되면서 단순한 감각적 몸짓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감각의 작동 내부에 도구를 다루는 의식이 촉발되는 부분이 생긴다. 이때 도구와 주체사이 감각의 간극이 벌어지지 않는 상태를 몸과 도구의 혼연일체(渾然一體)로 묘사할 수 있다면 도구사용의 최적상태란 도구가 몸처럼 여겨지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의 기계적 변주를 거쳐 나오는 뉴미디어는 아날로그 도구라는 몸 감각의 연장선상에서 제 2의 감각이 반응하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의식화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앞의 미디어와는 전혀 다른 기반 위에 서있다. 그것은 몸 감각과는 다른 기계 자체의 반응범위에 대한 파악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인데, 그 감각을 내 의식의 범위 안에서 제어 할 수 있을 때만 유용하다. 따라서 감각의 사용이 도구를 거쳐 나오는 것과 직접적으로 투사되는 것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벽이 존재하게 된다.
박유아가 미디어를 줄곧 확장시켜 온 이면에는 그의 작업에서 감각사용 부분이 감퇴되고 대상을 추상화하는 의식적 부분이 증폭되는 효과가 있어왔던 것인데, 지금 박유아는 이를 다시 역으로 작동시켜 몸의 원초적 감각을 내보이는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박유아 작업에 대한 나의 문제의식은 박유아가 자신이 전달하려는 내용을 표현하기 위해 퍼포먼스라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는 어떤 당위성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으로부터 비롯하고 있는가이다. 내가 아는 한 박유아는 페인팅이란 도구와 분리될 수 없는 감각을 훈련하여왔고 그만큼 그 도구를 잘 다룬다. 그러므로 박유아에게 몸 자체를 '날 것'으로 사용하는 퍼포먼스가 페인팅 같은 도구를 사용하는 것보다 더 생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먼저 거론하는 이유는 잘 훈련된 도구를 버려두고 상대적으로 어색한 몸짓을 이용하는 방식으로의 전환이란, 몸이 가장 원시적이고 일차적인 도구이며 감각의 직접성을 여과 없이 드러내 그만큼 감정의 고조와 몰입이 빠르게 일어나도록 하는 장치로 사용되는 것 이상으로 또 다른 의미의 층이 드러나야 박유아의 퍼포먼스가 정당한 가치를 획득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박유아의 퍼포먼스를 자세히 살펴보면 단순한 퍼포먼스와 구별되는 어떤 속성이 있다. 이것은 박유아의 작업이 페인팅으로 시작하여 뉴미디어로 그리고 그 끝자락에서 다시 가장 원초적 몸으로 돌아온 과정을 다시 역추적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사후적 결론인데, 바로 그가 가장 원초적 몸짓의 퍼포먼스를 가장 진보적 미디어처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가 그의 퍼포먼스를 유통시키는 형식이 비디오나 사진을 쓴다는 기초적 사실에 기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가 구성하는 무대가 상호작용적(interactive)으로 마련되는 '관계적' 매스미디어의 속성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매스미디어의 특성이 "어떤 행위와 그에 대한 반응이 거의 동시에 일어나"며, 그로 인해 "신화적, 통합적"으로 사는 삶을 구현할 수 있는 방식에 있다면, 그의 퍼포먼스 역시 아날로그적 도구의 시대 이전으로 돌아가 어떤 통합적 의식을 구현하는 형식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박유아의 퍼포먼스「르쌍띠망-효」는 분명 인간의 가장 원초적 감각을 몰입의 도구로 사용하는 형식을 지니지만, 행위와 반응의 즉자적 통합이라는 측면에서 감각사용의 동시대성을 구현한다.
퍼포먼스「르쌍띠망-효」는 박유아 자신의 가족사를 통해 2500여 년 이상 동북아시아 사회 도덕률의 전제이며 사회 통합 이데올로기로 작동하였던 '효'에 대한 관념을 해체하여 그 의미를 다시 재구성하는 시도이다. 효란 기본적으로 자신을 길러준 부모에 대해 은혜를 되갚는 자녀의 행위이므로 인류보편의 가치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하나의 사회규범으로 제도화되는 것은 동북아시아 문화권만이 갖는 특수성에 기인한다. 이러한 의식의 결정이 바로『효경(孝經)』의 탄생이다. 효가 '경(Kanon)'이 될 수 있는 까닭은 효로부터 형이상학적 도덕의 근원과 우주의 원리를 설명하려는 시도가 어떠한 체계를 지니고 나타날 수 있었기 때문인데, 효가 단지 개인적 차원의 보답이 아니라 사회적 규범으로 작동하고 움직일 수 없는 원리가 될 때 개인의 자유의지와 상관없이 하나의 거대한 종교(宗敎)가 된다. 효를 종교화하여 자손에게 반드시 조상의 제사를 지내도록 요구하는 것은 실제 유교의 기본 원리이기도 하다. 이렇게 조상은 '신(神)'이 된다. 효가 조상과 자손의 관계에 관한 질서에 작동하는 원리이므로 효의 무대는 가족이다. 전통적 의미에서 가족은 기본적으로 가장을 중심으로 혈연을 통해 이루어진 집단이지만, 혈연적 개체를 정신적 유대로 묶어주는 것은 역시 '사랑'의 힘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자(慈)'라고 하고,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을 '효'라고 구분한다. 같은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자'와 '효'는 서로 다른 층위에 있다. '자'가 자식에 대한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인 반면,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인 '효'는 사회적 강제성이 부여되어야 할 만큼 보편적이 될 수 없는 어떤 소이연이 처음부터 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자'라는 글자는 작은 들풀처럼 무성하게 일어나는 마음의 상형이며, '효'는 아이가 노인을 업고 있는 모습의 상형이다. 따라서 '자'와 '효'의 관계란 항상 짝사랑만 하는 비대칭적 구성일 수밖에 없다. '효'가 당위가 아니라 의무로 여겨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박유아는 당위가 아닌 의무로써의 '효'의 관념적 무게를 니체의 '르쌍띠망'의 사고방식을 대입하여 해체하려는 시도를 한다. 니체가 말하는 '르쌍띠망'이란 인간은 마치 신의 무한한 사랑에 대해 인간의 유한한 사랑으로 되갚을 수 없는 부채의식을 지니게 되므로, 그 되갚을 수 없는 부채의식으로 인해 채무자는 항상 자책과 원한의 감정을 지니게 된다는 사고방식이다. 즉 자신의 처지가 지금 이렇게 밖에 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일종의 심리학적 반동을 의미한다. 니체는 원한은 상처받은 고통을 치료하고 피해 의식의 탈주를 제동하는 능력, 망각의 능력이 결여된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책임을 외부의 대상에게 전가하고, 그 무능력을 보상하기 위해서 외부의 대상을 비난하려는 의식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전개해 나가는 진정한 반응체계 행위의 보상이 거부되는 '르쌍띠망'은 가상적인 복수를 통해서만 스스로를 보상받는다. 따라서 '르쌍띠망'이란 정신적이고 상상적이며 상징적이 될 수밖에 없으며, '르쌍띠망'적인 인간은 정직하지도 않고, 순박하지도 않으며, 자신에 대해 솔직하지도 않고, 진지하지도 않은 인간의 나약한 본성과 심리상태를 지닌다. 이러한 유형의 인간은 자신에 대한 신뢰와 개방성을 지닌 고귀한 인간과 반대로 정신이 숨을 곳을 찾고, 뒷문을 사랑하며, 침묵할 줄 알고, 굴종할 줄 아는 기회주의적인 인간이 된다. 이처럼 '르쌍띠망'과 '효'의 관념은 본래 서로 별개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박유아에게 있어 이 두 관념은 서로에게 서로를 해체하고 재인식되는 도구로 사용된다. 박유아에게 있어서 "르쌍띠망-효"의 관계는 종속구조와 동시에 병렬 도치(倒置)적 구조로 구성된 이중적 의미체계로 짜여있다. 자신이 '르쌍띠망'적 인간이 될 수밖에 없었던 조건으로써 제시되는 의무로써의 '효'의 관념은 종속적이다. 박유아의 내면적 상처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사랑의 폭력성에 있었고, 그것은 받은 사랑을 되갚아야 할 때 선택의 여지없이 어떤 숭고한 당위 앞에 자발적 규제와 일방적 자신의 희생을 강요받은 것에 있다. 여기에서 박유아 가족사가 지닌 특수성을 이해해야 이러한 "르쌍띠망-효"의 구조가 박유아의 내면에 어떻게 동시에 작동할 수 있는지 수긍할 여지가 생긴다. 박유아의 아버지가 박태준회장이라는 단순한 사실은 한국의 현실에서 엄연히 낳아준 부모가 있으므로 '효'의 그물망 속에서 "내 인생이 나의 것"일 수 없는 사회의 암묵적 질서가 더 이상 추상적인 것이 될 수 없게 한다.
"어린 시절부터 내 현실의 아버지는 다분히 상징적이고 상상적인 아버지였다. 나의 아버지이기 보다는 한국 산업의 아버지였고 국가 경제의 아버지였으며 조국 근대화의 아버지였다. 물려받은 디엔에이는 내 아버지로부터였지만, 내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국가와 산업으로 향했고, 그 아버지의 현실적 자식으로서 나와 내 형제 자매들은 그 아버지가 베풀어 주는 무조건적인 사랑에 누가되지 않도록 숨을 죽이며 살아왔다. 조국과 경제에 헌신한 아버지가 정치와 사회에서 곤란과 흠집이 생겨날 때마다 나도 고통을 겪고 상처를 입었다. 생겨난 상처들이 내 무의식에 흡착하면서 나는 더욱 더 숨을 죽이며 살아야 했다. 나에게 효도란 오로지 아버지와 가족들에게 누가 되지 않는 것이었고, 아버지의 고난을 가족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의 고백처럼 아버지가 나만의 혹은 내 가족만의 아버지가 아니게 될 때 어떤 국가적 명제 앞에 더 이상 나의 욕망을 드러낼 기회조차 상실하게 되는 것이고, 여기에서 '나'의 은밀한 익명성의 사적 영역은 사라진다. 나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 외부로 끊임없이 나의 보잘 것 없고 변변찮음을 드러내는 신호로 읽힐 때, 그러한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며, 그 억압은 내면의 의식을 항상 어떤 극한의 상황으로 내모는 역할극을 강요하게 된다. 박유아의 '르쌍띠망'의 근원은 태양 같은 아버지로 인해 자신 삶의 사적 영역이 볕 아래로 모두 환하게 드러나는 상황에 기인한다. '효'에 대한 이러한 자각 역시 내면이 형성되어야 가능하다. 내면의 형성이란 외면이 구분되기 때문이고 그의 내면을 작동하는 동력이 '르쌍띠망'이라면, 그 '르쌍띠망'을 형성한 하나하나의 요소는 어찌할 수 없는 역사적 소명 앞에 선 근대한국의 현실이다. 결국 모든 부득이함의 근원은 동서의 충돌과 그로부터 파생된 서구화의 과정 속에서 구성된 것이다. 이 지점에서 '르쌍띠망'이 지닌 병렬 도치적 구조의 이중적 의미체계가 드러난다. '효'를 '효'의 내부에서만 보면 '효'의 본원을 탐색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효'의 확장이 '충(忠)'이고, '가(家)'의 외연이 '국(國)'이 되는 논리적 구조 속에서 효의 관념은 마치 공기처럼 작동하는 무의식의 층위에 있는 것이므로 효에 대한 관념이 의식의 표층으로 떠오르기 위해서는 '효' 관념 밖으로 나와야 하는 효에 대한 대상화가 필요하다. '효'의 전통에서 나와 그 전통을 바라보는 시도가 가능한 시점에서야 비로소 효를 '사랑'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그 사랑의 발화점과 탄착점에 대한 근원적 반성이 일어나게 된다. 즉 이 모든 것이 동양에 대한 서양의 관점이 확보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박유아의 퍼포먼스는 가족 구성원의 식사장면으로 구성된다. 식구들이 한자리에서 식사를 한다. 식사는 생명을 지닌 존재의 가장 중요한 일이다. 식사가 가족의 위계가 일차적으로 생명의 영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기능적으로 구성된 일면이 있다면 그 일은 가족간의 사랑의 본질이 가장 원초적으로 드러나는 현장중의 하나이다. 아버지, 어머니, 언니, 여동생들과 남동생이 붉은 빛의 초상화로 가상으로 식탁 위에 걸리고, 박유아만 그 초상화들과 대화하며 웃고 울고 밥을 먹는다. 먹는 것(식탁은 욕망의 메타포다. 먹는 것은 단순히 음식을 먹는 행위만을 상징하지 않는다.)을 앞에 두고 위계질서는 갈등과 모순을 증폭시킨다. 가족들과의 소통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들은 가상이다. 어쩌면 현실도 가상과 같은 단절의 연속인지 모른다. 그 소통의 불가능성 속에서 박유아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소통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절망을 몸짓을 한다. 주위에 설치된 거울은 자폐적 효과를 강화시키며 같은 이미지를 반사하는 장치로 작동된다. 모순과 갈등의 극점에서 박유아는 모든 판을 엎고(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깨트리는 방식으로 보여준다) 기존의 자아를 부정하며 빛 속에서 스스로를 산화시킨다(밝은 빛 속에서 모습이 순간 사라지는 장치를 이용한 것이다). 당위에 바탕을 둔 '효'가 아니라 인간적 개인의 자각에 의한 사랑에 바탕을 둔 '효'의 재구성은 기존 '효'의 관념에 대해 판을 엎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여기에서 순간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시원함이 있지만, 전체를 되짚어보면 판을 깨고 나오는 그 감각적 시원함 뒤에 어찌할 수 없는 인간관계의 부득이함이 내재되어 있고, 그 부득이함을 깨닫는 순간 우리에게 '효'가 어떻게 재구성되어야 하는지 스스로 질의하게 하는 여운이 있다. 박유아 퍼포먼스의 이러한 힘은 스스로가 사적 영역을 확보해서가 아니라 공적영역을 더욱 밝은 곳으로 끄집어내어 뚫고 나가는 의지에서 나온다. 행성이 아니라 스스로 항성 같은 존재가 됨으로써 빛을 발하는 방식으로 문제와 맞서 문제를 소멸하는 것이며, 이 역시 태양의 느낌을 지닌 그의 성정(性情)과도 부합한다. ■ 김백균
Vol.20120912i | 박유아展 / PARKYOOAH / 朴裕雅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