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2_0912_수요일_05:00pm
참여작가 김온_김을_김지원_김혜련_김홍주_도윤희_문성식 박기원_박소영_박화영_설원기_안규철_우순옥_유근택 유현미_윤재연_이수경_임자혁_정서영_홍승혜_황혜선
관람시간 / 10:00pm~06:00pm / 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수송동 46-15번지 Tel. +82.2.734.0440 www.ocimuseum.org
OCI미술관은 미술사학자 강태희 선생께서 현대미술작품의 감상 형식을 확장하고자 기획한 '책 속의 미술관' 시리즈(Ⅰ)의 마지막 출간물인 『꽃』의 제작 후원과 『순간의 꽃』 전시의 개최를 통해 총체적 성과와 의미를 기리고자 한다. 현대미술이 다양성의 논리로 전개되어 오면서 일부에서는 '작품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미술관의 문턱이 높다'는 등의 지적과 함께 창작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작가와 감상자간의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측면이 있어왔다. '책 속의 미술관'은 작품 이미지와 작가의 텍스트가 책 속에 함께 수록되어 말 그대로 이해를 돕는 친근한 미술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작가와 감상자 모두에게 색다른 방식의 거리 좁히기를 실현한 셈이다. 이는 미술감상 인구의 저변 확대를 고심하고 있는 미술계에도 적잖은 기여와 기꺼운 자극이 되었으리라고 본다. 게다가 한국현대미술의 큰 지류 속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37명의 작가들이 대거 참여한 흔치 않은 시도였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 『순간의 꽃』展은 책 속의 작가 중 전시에 참여 가능한 21명을 초대하여 책 속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미술관 안에서 다시 풀어보고자 마련되었다. 아름답지만 영원하지 않은 '꽃'은 우리 삶의 직접적인 은유이자 성찰의 단초가 되고 이러한 시각은 책 속의 다섯 가지 주제(향, 모래, 공항, 환, 꽃)를 아우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책 속의 주제를 전시의 소주제로 정하고 이 중 한 가지를 작가가 자율적으로 선택하여 자신의 내면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이어가도록 했다. 그 결과 공항이 배제된 네 가지의 소주제로 압축되었고 '꽃'이 압도적이었다. 출품작들은 책으로부터 나오기도 하고 책을 부연하거나 전혀 다른 양상으로 완성되어 신작 36점을 포함한 총 110여 점이 한자리에 모였다. 꽃을 소주제로 한 작가는 김온, 김을, 김지원, 김혜련, 김홍주, 도윤희, 문성식, 박기원, 박소영, 설원기, 안규철, 우순옥, 이수경, 임자혁, 황혜선, 홍승혜(16명)이며, 향을 소주제로 한 작가는 정서영(1명), 모래를 소주제로 한 작가는 유근택(1명), 환을 소주제로 한 작가는 박화영, 유현미, 윤재연(3명)이다. 이들의 조형언어는 드로잉을 기본으로 한 유화, 사진, 판화, 입체, 영상 등의 다양한 장르와 구상, 추상, 개념을 넘나드는 미술 지형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 한편, 이번 전시는 많은 작가가 참여하는 데다 책에서처럼 감상을 돕는 텍스트가 없다는 점을 고려하여 동영상에 작가가 직접 들려주는 작품 제작 의도와 감상 포인트 등을 담아 작가와 작품에 대한 보다 입체적인 교감과 폭넓은 대화의 창을 열어 두었다.
꽃 ● 꽃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사물이며 짧고 굵은 발화 이후 덧없이 명멸하는 아쉽고도 슬픈 드라마이다. 그래서 가장 소중한 어떤 것으로도, 가장 무상한 어떤 것으로도 읽혀지는 양면성을 지닌다. 그러한 꽃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 또한 꽃 안에서, 일상에서, 꽃 뒤에 감춰진 그림자에서 '꽃'을 찾고 있었다. ● 김홍주는 꽃의 얼굴을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천천히 꼼꼼하게 혹은 빠르고 즉흥적으로 드로잉하여 부드러운 인상, 날카로운 인상 등 다양한 꽃의 캐릭터를 캐리커처하듯 특징적으로 잡아냈다. 또 '꽃'이 들어가는 글자들을 빙 둘러 만든 꽃도 꽃밭 속에 한자리를 차지하여 즐거운 꽃구경에 한 몫을 한다. 산이 산인 것처럼 '꽃은 꽃이다'라고 슬쩍 귀띔해 놓은 문구는 감춰진 이면의 모습을 캐내려는 수사심리를 잠재우고 차라리 명상과 성찰에 가까운 수행 언어로 다가온다. 그런가 하면 설원기의 꽃은 정원에 핀 꽃들의 원색적 동태를 가늠하게 하고 심상에 핀 꽃들의 생생한 표정을 포착하는 등 꽃 그 자체에 집중하게 한다. 또한 흡수성이 없는 바탕 재료를 써서 즉흥적인 붓질과 물성을 최대한 살리는 그의 개성적인 회화 기법은 꽃처럼 생긴 추상 花 안에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다. 여러 명의 작가가 그린 듯 기법이나 표현 형식이 다채롭다. 문성식의 꽃밭 그림은 말 그대로 꽃밭에 파묻혀있는 듯한 감정이입을 야기시킨다. 게다가 사람 손의 혈관과 식물 이파리의 수맥을 나란히 비교 분석한 드로잉은 간결한 구도와 따뜻한 유머로 친근한 느낌을 자아낸다.
박기원은 회사하고 투명한 빛깔, 고결한 자태 등 꽃의 외형적 특징을 기하학적인 색면 추상화로 담아냈다. 오일 물감과 색연필의 거친 질감이 살아있는 그의 드로잉 연작은 최소한의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꽃이 있는 시공간을 더욱 풍성하게 상상하게 하고 꽃과 함께 했던 단상들을 유추하게 하는 묘미가 가득하다. 홍승혜의 꽃도 기하학적인 추상화로 피어났다. 이 땅에서 나고 자라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진달래, 복숭아꽃, 살구꽃이 사각의 그리드 꽃으로 만개했다. 컴퓨터 픽셀을 기본단위로 태어났음에도 이 꽃들은 얇고 투명한 꽃잎의 형상과 볕을 머금은 아스라한 색채를 띠며 객관화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한편 김온은 꽃을 지칭하는 전 세계의 단어들을 모아 시각화한 텍스트 작업을 선보인다. '꽃' 글자로 꽃을 바라보게 하는 독특한 체험이라 하겠다. 전시장을 책 속의 공간으로 설정하고 관람객이 각 페이지 속으로 찾아들어가게 한다는 설정 방식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김지원은 일상 속에서 꽃을 찾는다. 오랫동안 그려왔던 맨드라미와 자신을 상징하는 개를 등장시킨 드로잉에는 그의 유머, 고민, 욕망 등이 뒤섞여 있다. 또한 자신의 개인전이 열린 전시공간의 온습도를 기록한 그래프지는 관람객들이 전시 현장에서 뿜어내는 반응과 감정을 고스란히 채록한다는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일기 쓰듯 자신의 시선과 동선을 기록하고 관찰해나간 그의 작업은 삶의 희노애락 자체가 꽃임을 덤덤히 말하고 있다. 황혜선은 꽃집과 식당을 한 공간에 열고 열심히 살아가는 부부의 모습에서 꽃같은 순간을 발견했다고 한다. 백색 모노톤의 얕은 부조 안에 식탁과 꽃이 부부의 단아한 초상화가 되어 환한 빛을 발한다. 간결하고도 명쾌한 답으로 우리 주변을 둘러보게 하는 힘이 느껴진다. 임자혁의 꽃은 일상이 여행이라고 말하는 듯 명랑하다. 문 밖 세상에서 꽃들이 벌이고 있는 소소한 일상사를 엉뚱하게 조합하여 웃음을 자아낸다. 자연스럽게 인간사가 오버랩되기도 하는 그들의 유쾌한 에피소드는 단편 드라마로도, 옴니버스 영화로도 감상할 수 있는 독특한 구성의 묘를 보여준다. 마스킹 테이프와 콜라주 기법을 활용한 그의 드로잉은 시각만큼이나 재기발랄하고 자유롭다.
우순옥은 꽃의 뒷모습에 주목한다. 화려한 영광의 실체는 기실 덧없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공공연한 진리를 '꽃과 빛의 화환', '결국 낙엽처럼 떨어질 모든 것' 이라는 단순명료한 텍스트로 환기시킨다. 기교스럽지도 소란스럽지도 않은 그의 미니멀한 글씨 그림은 우리 삶이 어느 쪽에 가치를 두고 대비해야 하는가를 꼭 짚어 알아듣게 '말'해준다. 김을의 시선 또한 꽃이 지나간 자리에 머문다. 지난 겨울, 어렵사리 아름답고 매혹적인 홍매화를 눈에 담아 완성한 드로잉은 수수한 홍매화 나무로 귀결되었다. 다 그린 홍매화 그림을 꼬깃꼬깃 구겨서 열매처럼 나뭇가지에 매단 결과 홍매화에 현혹됨은 무효화되고 시듦에 대한 걱정과 슬픔 또한 휘발되었다. 반면 쓰임을 다한 뒤 외면당한 일상의 붉은 사물들은 이번 전시를 기회로 구제되어 예술의 영역에서 홍매화로 거듭나 영생을 부여받는다. 타 장르를 주저 없이 취하는 그의 드로잉 방식에서 삶에 밀착된 통찰이 역설을 거듭하며 온전히 살아난다. 도윤희는 꽃 너머의 꽃과 환을 본다. '아름다운 것은 볼수록 의심스럽다'라는 시선은 현상적 아름다움이 허상일 수 있기에 그 너머의 차원에 존재하는 진짜 꽃을 찾아오려는 시도이다. 다른 차원과 통하는 그만의 언어는 그래서 늘 시적인 상상이 묻어나며 간과했던 근원과 본질을 돌아보게 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연필, 물감, 바니쉬를 겹겹이 쌓아가는 고행 속에서 그는 경계 너머에 있을 진짜의 꽃, 혹은 환을 불러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안규철의 꽃은 뒤틀기와 거리두기의 변주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과녁을 비껴간 화살들, 같은 듯 다른 동종의 토끼 오브제들을 손수 만든 뒤 그는 현대사회의 과도한 성공 지향적 가치관, 서로 다른 시간과 경험을 배려하지 않는 불균형적 사회구조에 냉소를 날린다. 이를 위해 그는 사물에 생각을 입히고 그것을 뒤집어 말하면서 진정 가치 있는 꽃같은 삶, 그것을 지탱하는 제대로 된 꽃같은 사회를 갈망한다.
박소영에게 꽃은 치유의 시작이다. 소용을 다하고 버려진 일상의 사물들은 그의 손을 거치며 모양과 기능, 역할이 달라진 새로운 생명체로 탈바꿈된다. 정해진 틀을 깨고 나온 사물은 하나의 의식처럼 꽃잎이나 이파리를 새 피부로 이식받으며 또 다른 생명활동을 시작한다. 이는 결국 현대인의 해체된 삶, 분열된 자아에 대한 치유와 화해의 은유이며 진정한 꽃으로 거듭나려는 고군분투의 의지일 것이다. 이수경의 꽃 드로잉 또한 치유를 부르는 수행 과정 속에서 탄생되었다. 그가 몇 년 전부터 시작했다는 만다라 치료법은 원 안에 그림을 채워나가며 마음의 짐과 정서적 불안을 완화시키는 심리치료 기술의 하나이다. '매일 드로잉'이라는 제목으로 하루하루 완성된 드로잉 속에 꽃이 등장하면서 그는 새살이 돋아났고 이제 그러한 체험은 자신의 예술세계의 일부가 되었다. 김혜련의 꽃은 위안의 언어이다. 넓게는 민족 분단의 아픔이나 시대의 고통, 좁게는 개인의 상처에 이르기까지 그는 인간에게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위무하기 위해 꽃을 그린다. 병풍 속의 '나'는 눈물처럼 흘러내는 물감을 매달고 상처의 흔적인 양 흩어져 있는 꽃들을 한 켠에서 지켜본다. 그렇게 꽃은 슬픔과 상처로 다가왔지만, 결국 위로의 말과 치유의 노래가 되어 온전한 모습의 자화상과 마주한다.
향 ● 정서영은 향으로 꽃을 말한다. '태양, 구름, 바람, 독수리'가 있는 창공, '스테고사우르스가 여든 아홉 그루 소철나무를 짓이겨' 놓은 어떤 장소, '우주를 날아갈 때는 코를 빼놓고' 가는 행위. 작가는 이 모든 것을 글씨로 그린 뒤, 그 글씨의 단서가 되는 후각으로 다시 글씨의 상황을 상상하게 하는 전위적인 성향의 텍스트 작업을 선보인다.
모래 ● 유근택은 하나의 모래알에서 꽃을 보았다. 그는 오래 전, 사막 한 가운데에서 바위도 시간도 모래알처럼 흩어져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경험했다고 한다. 우리 앞의 아름다운 그 어떤 것이 허망하게 소멸될 때, 그는 사라지는 최소 단위인 '모래알'처럼 아련해진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늘 자신이 딛고 있는 현실로부터 시작하는 그의 이야기는 이번에 목판 부조와 목판화 속에서 펼쳐진다. 자신과 지인들의 얼굴을 조각칼의 운율대로 개성 있게 완성한 뒤 그는 파내고 남은 나무 파편들에서 모래알을 떠올렸다. 그 모래알 틈에서 사라지지 않고 남은 목판 속 얼굴들은 그래서 현실의 꽃이 되었고, 모래알은 생명의 씨앗으로 회귀되었다.
환 ● 유현미는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인간의 오랜 욕망을 회화처럼 보이는 사진 속에 투영했다. 장생불사(長生不死)를 기원하는 10가지 상징물이 현대판 「십장생」 연작에 담겨져 있다. 작가는 동양의 신선사상에서 모티프를 가져와 실내 공간에 오브제들을 설치하고 회칠과 채색을 거쳐 사물의 회화적 질감을 얻은 다음 최종적으로 사진을 통해 최초의 의도를 담아낸다. 이렇게 고된 공정을 거쳐 이상적 삶을 향한 희구가 완성되면, 현실 속에서 꽃을 찾고자 하는 절실한 기도가 시작될 것이다. 윤재연은 영화의 프레임 속에서 꽃을 꿈꾼다. 그의 프레임 속 세상은 액자를 통해 우리의 현실과 마주한다. 서로의 현실 중 어느 쪽이 '환'인지 모호하다. 다만 상대의 현실을 통해 자신의 현실을 깨닫고 돌아보게 된다. 작가는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현실을 벗어난 프레임 속의 '환영'을 통해 결국 현실을 극복하고자 한다. 꽃은 두 현실의 경계인 '환'의 지점에서 개화하고 서로에게 꽃이 되어 비춰진다.
박화영은 깨진 유리 용기에 부분적으로 붉은 색 안료를 덧입혀 절단된 신체, 아이러니컬한 웃음소리를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잔혹성, 심미성이 교차하는 붉은 색과 불온전함을 드러내는 깨진 투명용기는 파멸과 소생의 역설, 존재의 환영을 말한다. ● '순간의 꽃'은 우리 삶을 지탱하는 모든 것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그래서 꽃도, 향도, 모래도, 환도 '순간의 꽃'일 수 있으며 그것들을 내면 어딘가에 품고 있는 우리 자신도 '꽃'일 수 있으리라. ■ 최정주
『순간의 꽃』 전시는 4년여에 걸쳐 진행되어온 '책속의 미술관' 시리즈의 결실 중의 하나이다. 그간 이 시리즈를 거쳐 간 여러 작가들의 작업이 책을 떠나 열린 전시공간으로 나오게 된 사건이자, 우여곡절의 세월을 이어 온 작업의 성과를 돌아보고 자축하는 뿌듯한 잔치의 한 마당이기도 하다. ● '책속의 미술관' 프로젝트는 2008년 어느 날 우연한 만남의 자리에서 탄생했다. 오랜 기획의 결과도, 필생의 사업도 아니었지만 시공간의 제약 없이 언제든 펼쳐볼 수 있는 작고 향기로운 책의 존재에 대한 열망은 기실 오래된 것이었다. 작가들의 몸과 가장 밀접한 매체인 드로잉이 그들의 숙고와 성찰의 산물인 글과 함께 제시되는 책자에 대한 이런 기대가 결실을 맺어 이듬해에 첫 번째 책 『향』이 출간되었다. 당시의 기획의 변은 "펼칠 때 갈피마다 서로 다른 향기와 노트로 발향하는 작고 진귀한 책. 그것은 소박한 그림과 이야기로 인생과 미술의 향을 불러내는 조향사들의 작업 노트 같은 것이자 순간의 탈주를 향한 소중한 티켓들"로 프로젝트의 성격을 규정했다. ● '향기로운 책'들이 모두 순조롭게 탄생한 것은 물론 아니지만 2010년에 『모래』와 『공항』이, 이듬해에 영화감독이 참여한 『환(幻)』이, 그리고 올 2012년에 시리즈의 마무리가 되는 『꽃』 까지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어찌 보면 무모했던 시도가 크고 작은 에피소드를 만들면서 4년이나 지속된 것은 온전히 작가들의 조건없는 참여와 후원자와 출판사의 너그러운 지원의 덕분이다. 또한 다섯 번째 책을 상재하고 그간의 대장정을 되돌아보는 전시를 열게 된 것은 책 작업을 전시장으로 되돌려보는 뜻 깊은 시도가 아닐 수 없다. ● 책을 지탱해 온 다섯 개의 테마는 처음부터 계획되지는 않았지만 맥락을 이어간 것들이다. 향기로운 책을 자처했기에 '향'을 첫 테마로 정했고, 다음에는 향에 대립되는 고통이나 질곡의 의미로 '모래'를, 이어서 향과 모래로 이루어진 삶에서 일탈하는 관문으로서 '공항'을, 다음으로는 실재를 극복하는 장치인 '환'을, 마지막으로는 그 자체로 아름답고 좋은 꽃의 존재와 의미를 환기해본 것이다. 각각의 기획의 변이 이런 흐름을 드러내준다. 향 ● 향수는 어쩌면 대상의 부재가 전제되는 가장 대표적인 기호이다. 그것은 붙잡을 수 없고 규정 불가능한 모호하면서 오묘한 '실존'이자, 순간의 시공을 점령했다 덧없이 사라지는 물질/비물질이며, 더없이 치명적이면서도 증발을 통해 자기부정을 완성하는 매혹의 유사(類似)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향수와 미술을 함께 이야기 하는 것은 물론 이 둘이 닮은 데가 많기 때문만은 아니다. 미술이 언제인가부터 더 이상 향기롭지도, 매혹적이지도 않게 되었을 때, 미술이 더 이상 주문을 걸지도, 치명적이지도 않게 되었을 때, 그리고 미술이 향수만큼도 우리를 도취하고 흥분시키지 못할 때 우리가 꿈꾸게 되는 것은 트레일이 긴 향에 대한 기억과 열망이기 때문이다. 모래 ● 나의 첫 번째 사막은 북아프리카였다. 사막은 드넓었으나 정갈한 모래언덕은 간데없고 생각보다 흔한 오아시스들과 아직 채 모래로 변하지 않은 크고 작은 돌멩이들로 이루어진 메마른 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내가 지천으로 만난 것은 죽은 생명의 잔재와 마른 흙먼지들이었다. 지질학적으로 말하면 나는 그곳에 너무 일찍, 아니면 너무 늦게 도착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눈앞에서 공간과 시간의 관계를 그처럼 분명하게 또 '우주적'으로 통찰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그 순간 내 몸이 잠시 물질을 벗고 짧고 흐릿한 섬광으로 변했다고 믿기로 했다. 공항 ● 우리나라에 고속도로가 생기고 난 후 많은 사람들이 즐겨 휴게소를 찾았습니다. 어디를 향해 떠나갈 일이 없는 사람들이 그곳을 목적으로 달려가고는 한 것입니다. 휴게소가 아직 우리에게 한 가닥 향수로 기억된다면 공항은 이제 훨씬 보편적인 조계(租界)가 되었습니다. 유목이라는 말이 가망 없이 진부해진 지금이지만 여행할 권리를 포기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공항은 국경을 넘어서 다른 시공으로 우리를 데려가주는 가장 확실한 관문입니다. 인위적으로 시차를 경험하고 노독을 겪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경계이기도 합니다. 세상이 좁아지고 공항을 제집 드나들듯 하는 사람이 많아진 지금에도 이 시차는 우리 몸에 한동안 거역할 수 없는 흔적을 남깁니다. "공간에 의한 시간의 이상한 오염, 장거리 이동이 시간과 공간을 전복시키는 변질" 생각하면 이런 혼돈의 경험 없이 일생을 사는 일은 얼마나 큰 고역 일까 싶습니다. 환(幻) ● 비록 워홀의 관점과는 다르다 할지라도 우리가 영화에 매혹되고 그에 열광하는 것은 바로 이 '섬광' 때문이다. 그것은 실재보다 더욱 선명한 실재가 되어 눈앞에서 명멸하기에 가뭇없이 스러지는 이미지에도 우리는 환호하고 탄식하는 것일게다. 우리가 '천국보다 낯선' 이 가상의 세계에 몰입하는 것은 출몰하는 이미지처럼 우리의 삶도 섬광으로 스러질 것이라는 엄연한 사실 외에도 이 빛이 우리 모두의 욕망과 좌절을 투사하는 너그러운 매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실의 초라한 일상을 상극하는 이미지의 삶에 적극 동참하는 까닭은 모두가 '시네마 파라디소'의 열혈주민이기 때문이다. 현세적인 물욕과 성취욕의 화신이었던 '비지니스 아티스트' 워홀은 말년에 자신의 묘비명이 공백으로 남아있기를 희망하면서도 다음 한마디를 택했다. 미혹(迷惑). 미혹은 곧 환(幻)의 다른 이름이다. 꽃 ● 출근길에 일주일에 한번 고만고만한 꽃들을 실은 봉고차를 만난다. 상품으로 포장되지 않은 소박한 꽃들 주변으로 사람들이 오며 가며 공간이 채워지고 나 역시 그 한가한 풍경의 일부가 되곤 한다. 꽃 때문에 특별해지는 일주일 중의 그날. 꽃은 찰나의 삶이자 순간의 아름다움이다. 좋은 것은 만나기 어렵고 오래 지속되지 않기에 우리는 아마도 가장 좋은 것을 꽃에 비유해왔을 것이다. 덧없고 단명하지만 꽃은 단지 연약하기만 한 대상에 그치지는 않는다. 그 순진무구한 아름다움이 살아내는 찰나가 우리 존재를 비추는 번개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전시를 계획하면서 이 테마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제목으로 '꽃'이 우선 고려되었다. 다수의 작가들이 꽃의 아름다움과 단명함, 그리고 그 생명이 우리들 삶에 던지는 의미에 천착하는 작업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에서 꽃을 "순간 속의 무궁"으로 갈무리한 고은의 시집의 제목을 빌리기로 했는데 그것은 향으로 시작했기에 꽃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좋고, 더 나아가 향도, 꽃도 순간이며 그 안의 모래, 공항, 환 모두 '순간의 꽃'으로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순간에 대해 언급한다. 나도 누구도 매순간의 엄연한 기운과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존재 자체가 변화 미분(微分)의 순간을 이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들이 사물이나 현상 그리고 나 자신의 심성의 운율에 끊임없이 닿아오면서 어떤 해답을 지향한다. 그럴 때의 직관은 그것이면 더 바랄 나위 없는 순진무구이다....순간 속의 무궁! 하나의 직관은 꽃과 꽃을 보는 눈 사이의 일회적인 실체를 구현하는 것 같아서" (고은, 『순간의 꽃』) ● 그간 '책속의 미술관'에 이름을 올린 작가들은 연 37명에 달한다. 전시 구성과 개별 작업에 대한 것은 공동기획자인 최정주 큐레이터가 따로 상술하겠지만 전시는 책과 연결되면서도 또 다른 모습들로 '책속의 미술관' 시리즈에 익숙한 독자들께는 책과 전시의 차이를 느껴볼 수 있는 즐거운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 마지막으로 『꽃』 출간에 더해 소중한 전시의 기회를 마련해주신 OCI 미술관의 김경자 관장님과 최정주 큐레이터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최후의 감사는 물론 책으로, 전시로 소중한 작업을 내주신 우리 모든 '꽃 같은' 작가들께 향한다. ■ 강태희
Vol.20120912d | 순간의 꽃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