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wings 1998-2012

박미나展 / PARKMEENA / 朴美娜 / drawing   2012_0830 ▶ 2012_0927 / 월요일 휴관

박미나_1 to 10_self-adhesive vinyl and pen on coloring page_33×25.5cm_199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20302b | 박미나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830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8:00pm / 주말_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두산갤러리 서울 DOOSAN Gallery Seoul 서울 종로구 연지동 270번지 두산아트센터 1층 Tel. +82.2.708.5050 www.doosangallery.com

"어머! 이빨을 드러내지 않는 고양이는 가끔 본 적이 있지만, 고양이는 없고 이빨만 보이다니! 이런 건 난생 처음 보는 일인 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체셔고양이는 형태의 정수만을 남기고 화면 뒤로 사라진다. 이빨을 씨익 드러내는 웃음. 총총 사라진 것은 고양이의 실체다. 이제 고양이라는 정보 없이 고양이의 존재만이 웃음으로 남는다. 이빨은 형상에 기대어 대화하는 모든 대상들을 비웃는 금속성의 웃음을 낸다. 체셔고양이의 이빨은 빈 상태로 자기 존재를 말하는, 자기 디테일을 보이지 않게 하는 둔갑술이다. 박미나의 색칠공부 드로잉은 바로 체셔고양이의 웃음이다. 색칠하기를 권하는 평면 위에 몇 겹의 레이어를 덧입히는 순간 박미나의 새로운 도상이 화면에 펼쳐지고 주어진 밑그림의 완성과는 멀어지는 겉그림이 표면을 덮는다. 작가는 색칠공부 종이가 칠하고 답하라는 대로 도안을 채우지 않는다. 작가 자신이 발견한 시각의 인식 구조와 새로운 의미를 화면 안에 놀이하듯 세운다. 2003년 작 드로잉「Draw a Snowman」에서 눈사람은 작은 동그라미-눈덩이로 한쪽 면은 촘촘하고 또 다른 곳은 벙벙하게 제 존재를 드러낸다. 눈사람의 실체는 비어있고 작은 보석 같은 눈송이만 종이 전체에 흩어져 있다. 내가 본 건 눈사람일까 눈송이일까. ● 나는 지금 박미나의 색칠공부는 체셔고양이의 존재방식과 유사하다고 말하려 한다. 동시에 어쩌면 정반대의 존재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이율배반도 꺼내놓으려 한다. 체셔고양이가 얼굴과 몸통 대신 웃는 이빨이라는 결정체만 남기고 사라진다면, 색칠하고 답하며 학습하는 것을 기대하는 색칠공부 종이에 작가는 결정적인 선을 긋지 않고 다른 색을 칠하며 원래 그림을 지워간다. 밀그림의 정해진 루트가 아니라 숫자·사물·색채를 답과 다르게 조합하는 패턴을 반복하면서 그림의 단일한 회로를 없애는 것이 박미나의 지속되는 시각적 어법이다. 색칠공부 종이에 당면하는 순간 결정해야 하는 질문과 오늘 날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에 관한 질문을 작가는 '색칠공부'에 화답하는 구체적인 사고의 영역으로 끌고 나간다. 때로 뒷면의 이미지가 비치는 이 얇은 레디메이드 종이는 그리기에 관한 오랜 질문의 묵직함을 가뿐하게 휘발시킨다. 진지한 질문을 하는데 색칠공부 종이에 등장하는 꼬마나 동물캐릭터들의 해맑은 눈망울을 보며 하는 까닭에, 박미나의 색칠공부 드로잉은 문답이 아닌 유희처럼 보이는 둔갑술을 발한다. 작가는 체셔고양이의 몸통과 같이 그리기에 관한 폭넓은 질문의 윤곽을 숨긴다. 전체 형상을 설명하듯 늘어놓는 대신에 그림에 응답하는 동작만을 단숨에 축약해낸다. 그리고는 과감하고 호기롭게 화가의 재능과 잽을 날리는 빠른 판단력을 종이 위에 올린다.

박미나_Crayon_컬러링 페이지에 수채_33×25.5cm_1998 박미나_Can You Draw_dry rub transfer image on coloring page_33×25.5cm_2011

박미나는 1998년부터 2012년 지금까지 800 여장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양의 드로잉을 제작했다. 어린 아이들의 놀이와 학습을 위해 만들어진 색칠공부 도안을 드로잉의 출발점으로 삼아 그 위에 이미지, 문자, 숫자, 패턴 등을 올리며 레디메이드와 손이 합주하는 독특한 그리기를 계속해왔다. 드로잉의 시작이 색칠공부였다면 엔딩 또한 작가의 색칠공부다. 작가는 색칠공부 도안의 요구와는 다른 형상을 화면 위에 겹쳐놓으며 자신이 세운 규칙에 따라 드로잉을 제작한다. 정교한 질서를 따르지만 예상 불가능한 방향으로 흘러들어가는 지휘 체계마냥, 작가가 색과 형태를 부리는 방식은 예측 불가능하다. 그러나 화면 속 무질서는 무분별함과는 차별화된다. 하나의 시각적 단초를 잡으면 무모할 정도로 이를 반복해 끝까지 밀고 간다. 작가는 이 요상한 방식들을 데리고 작은 노트 위에서 색과 형태를 공부하며 이것이 생산 유통되는 방식을 끈덕지게 실험한다. 작가의 실험은 선택에 따라 결과가 즉각적으로 눈에 보이는, 형태가 결정되는 매우 구체적이고 조건 반사적인 동작이다. 문구용 스티커를 떼어 붙이는 즉시 화면은 순식간에 작은 기호들로 가득 찬다. 포토샵으로 제작한 이미지를 색칠공부 종이에 겹쳐 프린트 하는 순간 이미지들은 작가보다 먼저 자기들의 위치를 결정해버린다. 이 얼마나 빠른 완성 책인가. '생각이 끝나기 전에 그림을 그린다'는 작가의 말처럼, 드로잉은 유동하는 사고를 잡아두기 위한 작가의 묘책이다.

박미나_Why Was Sent_컬러링 페이지에 스티커_33×25.5cm_2011 박미나_House_컬러링 페이지에 스티커_33×25.5cm_2011

작가의 색칠공부 드로잉은 학습용 종이그림과 작가의 선택에서 시작하여 왜 결국 형태의 윤곽을 모두 가리고 태양만 남긴 하나의 흔적이 되었을까. 최근 작가가 선보이는 회색 드로잉은 포토샵 이미지를 중첩시키거나 스티커를 찍는 식의 외부 개입 없이 오로지 연필로 그은 매우 절제되고 규칙적인 선이 화면 전체를 채운다. 지금까지 색칠공부 종이 한 장이 담고 있는 지시문과 이를 구현하는 도안의 상호관계는 작가가 발견한 단서들에 의해 무참히 깨져왔다. 박미나가 오렌지색 크레용을 색칠하라는 종이 위에 푸른색을 채울 때, 선을 찾아 연결해 집을 만들라는 명령에 둥근 원을 집착적으로 반복해 올려놓을 때, 색칠공부 종이는 비로소 작가가 세계에 요하는 색칠공부 드로잉이 되었다. 이렇게 따라하고 정해진 색깔로 면을 칠하라는 도안의 질문에 장난 끼 어린 반응을 내놓던 초기 드로잉은 점점 도안의 질문과 박미나의 개입이 구분되지 않는 복잡한 화면을 만들어냈다. 여기부터는 무엇이 조건(색칠공부 종이)이고 어디부터가 반응인지 알아채기 힘겹다. 작가는 이내 캐릭터에게 알맞은 집을 만들어주거나 아홉 개의 빨간 사과에 색칠하라는 식의, 그림으로써 완성시켜야 할 도안의 구조 자체를 통째로 잊기도 했다. 물론 슥슥 가볍게 여백을 하나의 색으로 칠해 주거나 아주 작은 이미지 하나에만 살짝 옅은 색을 올리는 경우도 틈틈이 있어왔다.

박미나_Cloudy_컬러링 페이지에 연필_33×25.5cm_2012 박미나_Color Me Gray_컬러링 페이지에 색연필_33×25.5cm_2012

2011년과 2012년 그린 근작의 드로잉에서 박미나는 여러 문구 브랜드에서 생산한 흑색 연필을 이용해 화면 전체를 회색 톤으로 잠재운다.「At the Beach」부터「The Sun」 에 이르는 27점은 해의 얼굴만 텅 빈 칸으로 남겨놓고 나머지 공간을 모두 연필로 칠해놓은 작업으로, 색의 명멸을 조건 짓는 빛의 차원으로 넘어간다. 하얗게 비어있는 도안만이 화면의 유일한 도상이 되는 드로잉은 아이러니컬하면서 유머러스하다. '해(sun)'가 떠 있는 그림과 '흑색' 연필이라는 두 조건은 가장 단순화한 형태만 남는 무채색의 질서를 택했다. ● 박미나가 출발점으로 삼은 색칠공부는 예의 동시대 도상의 수집·탐구를 통해 축적된다. 백지에서 시작하는 그림이 아닌 까닭에 박미나의 모든 드로잉은 시작에서부터 당대 시각문화의 산물들을 채집한 기록물로 기능한다. 작가가 모은 색칠공부 도안은 당대 대중문화가 보편적으로 획득한 아이콘의 무분별한 과잉이 허락된 무대다. 세상에 있는 온갖 사물과 장치들을 손가락으로 떼어내고 붙여낼 수 있을 만큼 아주 작은 크기로 축소해놓은 스티커는 현실에 만연한 기호와 상품 소비 방식을 보여준다. 조증상태의 하트 기호와 꽃무늬 스티커가 화면을 도배하는가 하면, 도안을 망치려는 듯이 깨알 같은 글자들이 다닥다닥 색칠 공부를 채우고 비어있는 말풍선이 허공을 떠다닌다.

박미나_Find the Star_컬러링 페이지에 스티커_33×25.5cm_2012 박미나_Same Shape_컬러링 페이지에 스티커_33×25.5cm_2012

더욱 흥미로운 것은 레디메이드 계열 간의 긴장관계다. 특히 스티커를 색칠공부 화면에 적극적으로 끌어온 색칠공부는 미완성 레디메이드인 색칠공부와 수용자가 그저 뜯어서 붙이기만 하는 초간단 완성용 레디메이드 스티커와의 다른 층위로 이뤄진 독특한 레디메이드-그림이 된다. 스티커는 패턴과 표정을 살짝 변주하면서 자동차의 종류, 집의 형태와 크기, 화난 표정에서부터 환희의 표정까지 세계에 존재하는 이미지의 층위를 어디로든지 이동시키는 사물이다. 색칠공부 종이가 색을 칠하기를 바라마지 않는 수용자의 반응을 기다리는 형태라면, 스티커는 더 이상의 색도 형태가 필요 없는 완성된 상태의 인공물이다. 예를 들어「Her Garden」(2007) 에는 헬로 키티가 꽃동산 가운데 제 정원을 상상하며 앉아있는데, 작가는 색을 칠하는 대신 웃는 얼굴이 찍힌 꽃무늬 스티커를 도안 곳곳에 붙여놓는다. 꽃밭을 만들고 있던 키티는 스티커 덕분에 꽃으로 만개한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작가는 키티의 도안을 완성시켜준 것일까. 아니면 색칠할 필요 없이 스티커 한 방이면 끝난다는 걸 보여주는 것일까. 예쁜 밑그림 꽃이 있고 또 예쁜 꽃이 있으면? 나무가 있고 또 나무 스티커가 있으면 어떻게 될까? 꽃 도상의 반복은 오히려 밑그림을 교란시킨다.

박미나_Circle Them_컬러링 페이지에 펜_33×25.5cm_2012 박미나_Love B_컬러링 페이지에 수채_33×25.5cm_2011

대량생산된 값싼 색칠공부 드로잉들은 작가에 의해 왜 살아남았을까. 대학원 시절 어떤 작업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는 한 학기동안 잠시 페인팅을 멈추고 다양한 딴 짓하기에 몰두했고 색칠공부를 다시 꺼내든 것도 처음에는 딴 짓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작가에게 색칠공부는 그리기의 재주를 섣불리 발사하지 않고 대중이 소비하는 이미지의 틀 안에서 다시 한 번 그리기의 대상과 칠하기를 심사숙고 하는 '선택하기'의 학습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색칠공부를 빙자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습득하는 어린아이들의 눈을 복기함으로써 사회 구조를 뭣 모르는 아이처럼 한꺼번에 질문하는, 허락된 유예의 시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눈동자를 하고 '해피'와 '언해피' 상태를 표출하는 아동용 캐릭터들은 현실이 그들에게 어떻게 다가올 지 아직 알 길 없는 아이들에게는 한 발 앞서 세상의 인식 체계를 습득한 선구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미나의 드로잉 안에서 캐릭터들은 다시 다 세상을 배운다. 어린이에게 말을 거는 눈의 역할을 하는 관습적 부호들은 제 감정을 전달하는데 실패한다. 박미나의 드로잉은 기존 인식과 습득의 체계에서 달아나면서도, 여전히 그림의 구조에 관한 한 배우는 그림이다. ● 이제 그리기의 문제가 남았다. 공산품 물감 수집에서부터 색깔의 계열연구와 딩벳 연작 등 이미지를 조사, 수집, 제작하는 회화적 계열화는 박미나의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방대한 색칠 공부 드로잉에서 작가는 숫자 개념과 언어, 사물의 여러 형태를 반복적으로 등장시키지만 '그리기'에 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작업들이 있다. 이 드로잉은 회화사에 관한 장난스런 코멘트로 읽힐 수 있다. 2006년도에 제작한 드로잉「Painting Red」와「Painting Blue」는 곰돌이 푸가 여백에만 한 가지 색을 칠하고 있는 그림이다. 푸가 들고 있는 붓에는 붉은 물감이 묻어있는데 물감이 향한 대상은 색이 아직 하나도 묻어있지 않고 작가가 여백을 채울 때 사용한 재료는 빨간 볼펜과 파란 볼펜이다. 작가의 몇 드로잉은 레디메이드 그림 앞에서 화가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흥미롭게 자기-풍자하는 작업으로 보인다. 초기 드로잉인「Pollock」(1999) 또한 잭슨 폴록의 기법을 작은 화면에 가득채운 흥미로운 작업이다. 2006년도에 그린「Painter Ⅰ」과「Painter Ⅱ」에서도 모두 왼손으로 붓을 쥐고 그림을 그리는 캐릭터가 있고 작가는 화면 전체에 수채물감을 흩뿌리듯 공간 전체에 흔적을 남겼다. 유아용 캐릭터 곰돌이 푸는 별안간 추상표현주의와 모노크롬을 다룰 줄 아는 성인용 화가의 제스처를 모방하는 셈이 된다. ● 2002년도에 작가는 유일무이한 드로잉 자화상 하나를 그렸다. 수백 개의 드로잉 중에서 딱 하나 자화상이라 이름 붙은 색칠공부 드로잉에는 검은 얼굴 형태가 등장한다. 작가가 선택한 자화상의 장소는 거울이다. 거울은 색칠공부 드로잉 속에서 등을 보이는 캐릭터를 수용자가 똑같이 따라 그려야 하는 공간이지만 작가는 그 안에 싸인펜으로 거울에서 튕겨 나온 어린아이의 낚서 같은 그래픽 형상을 자신의 얼굴로 담아낸다.

박미나_Close_컬러링 페이지에 잉크젯 프린트_33×25.5cm_2012 박미나_Hard_컬러링 페이지에 잉크젯 프린트_33×25.5cm_2012

색칠공부를 통한 화가의 색칠공부라니! 인습적인 정보체계와 감각습득으로부터 한발 떨어져 세상을 들여다보는 작가는 드로잉을 통한 '스터디'를 멈추지 않는다. 일견 당연하고 투명해 보이면서 어떤 성인도 애용하지 않는 색칠공부의 방안을 작가는 15년 남짓한 시간을 지속해왔다. 그동안 나는 작가가 마치 제 자신이 색칠공부가 된 것처럼 느끼지 않을까 궁금하다. 그리기의 시간을 수집하려는 의지는 누구도 아직 완결하지 못 한 무모한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혹시 이 드로잉들은 귀여움을 가장한 대서사시일까.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삼백 여 점에 가까운 드로잉의 군집도 아찔한데 다 모인 날이 가능하다면, 전시장 조명을 낮게 켜놓아도 좋을 것 같다. 제각각 다른 장에서 뜯겨져 나온 색칠공부는 제각각 다른 세계에 대한 응답이며 날마다 다른 날의 그림이기에, 얼마나 많은 해 아래에서 그려졌을 텐가. ■ 현시원

Vol.20120830g | 박미나展 / PARKMEENA / 朴美娜 / draw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