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전지(詩箋紙)와 문자향(文字香)

한국고판화의 재해석 ②展   2012_0829 ▶ 2012_0911

강행복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강행복_김상구_김억_오선영_이하나_홍선웅_홍익종

관람시간 / 11:00am~06:3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5번지 4층 Tel. +82.2.722.7760

한국 고판화의 재해석, 『시전지와 문자향』 전시에 비추어 - 물성에 대한 체화된 기억 ● 인간이 세상을 경험한다는 것은 사물의 형식과 물질 속에서 일어난다. 16세기 프랑스 인문주의자 몽테뉴는 출판 인쇄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시기에 책을 통해 '에스프리'(esprit)라고 말하는 문필가의 정신을 촉구했다. 에스프리는 기지와 유머를 동반한 지적 정신으로서 '자아(自我)가 개성적인 글쓰기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몽테뉴는 『수상록essai』속에서 '나 자신을 말하는' 체험은 곧 "문체이며, 그것은 인간이다." 라고 적었다.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호기심이야말로 인문주의를 이끌었던 중심이었으며, 인문주의는 출판물이나 인쇄물 없이 가능하지 않았다. 따라서 개인의 의지와 느낌을 담는 글이나 그림은 일차적인 상징 형식이지만, 이러한 상징 형식을 실어 나르는 물질적인 매체야말로 세계와 개인을 끊임없는 교감으로 이끄는 토대이다. ● 판화는 동양이나 서양을 막론하고 그림에 의한 의사소통의 매체이다. 한 장을 찍기 위해 판을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지가 통용되는 범주, 읽는 방법과 기존의 의미가 전제 될 뿐 아니라, 역으로 새로운 의미가 유포되어 사회적으로 통용되기를 바라는 열망을 담고 있다. 동․서양의 역사에서, 판화는 사회적 변화와 요구에 민감했으며 그러한 징후를 담고 있다. 판화의 자동적인 유포와 확산 때문에, 다수로 제작된 이미지는 단지 개인의 기호로 머물지 않으며, 사회적 효력을 갖는다. 판화의 이러한 특징은 양면적인데, 그림을 통한 소통이 친밀해서 교화를 위해 통일된 의미를 도모하기 쉽고, 다른 한편에서 사회적 도발과 전복을 이끄는 계기가 되기 쉽다. 초상판, 능화판, 문자 없이 괘지를 찍는 괘지판, 지도판 등등, 다양한 목판들은 기능을 위해 통일된 도상법을 지닌다. 판화에 있어서 도상은 글을 읽을 때 필요한 문법처럼 지시, 기호, 표시들이 관계를 이루어 전체의 의미를 형성한다. 따라서 동․서양의 고판화들은 목적을 위한 분명한 주제가 있으며, 주제를 위한 작은 소재들이 나열된 형식들로 통일된 의미를 이룬다. 이와 같은 특징이 지식이나 정보와 연관된 사회적 기능의 관계망 안으로 판화를 소급시켰다.

김상구

실제로 다수의 고판화(古版畵)들이 교육과 기록을 위해 제작되었으나, 시를 적는 종이나 편지지에 목판으로 인쇄된 그림인 시전지판(詩箋紙板)은 예외라고 할 수 있다. 시전지판화는 사적인 개인의 언어생활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종이 소비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독립적인 인쇄 상품으로 기능했다. 『누판고』(정조 20년)의 기록이나 고판화를 설명하는 현대의 자료에 근거 할 때,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조선 전기부터 후기까지 시전지판은 지속적으로 만들어졌다. 목판화를 지닌 인쇄물이라는 점에서 시전지가 수요가 상당히 활발했을 것이라는 추론을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개인을 목적으로 한 용도로 사용되었다는 전제에 비추어서 유교 사회에서 개인의 정체성의 표출과 판화가 생활 미술로 확산된 전거를 지닌다.

김억
오선영

시전지판은 책판과 그림판의 혼합적인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판의 도상은 선비들의 문방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군자, 문방사우, 문방기물을 소재로 하였는데, 조선 전기 문인화의 지적인 단아함과 후기에 성행한 민화의 경쾌함을 지니고 있다. 시전지에 쓰인 한지는 식물섬유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나뭇결이 생기고 대체로 지면이 거칠다. 종이의 원료인 닥이나 마를 갈지 않고 두들겨서 직접 체에 걸러서 만들었기 때문에 두껍고, 대신 매우 질긴 장점을 가지고 있다. 색에 있어서 검은 먹이 아니라 남색이나 붉은색의 다색 목판으로 찍혔는데, 주로 먹색으로 고판화가 찍힌 경우를 볼 때,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적인 용도로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색채를 지닌 시전지는 개인적인 취향과 선호를 허용했다. 조선 전기에 시전지는 사대부 계층을 중심으로 성행했고,. 궁중에서는 이것을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고유한 표시들 나타나는 '어전지'라고 불렀다. 시전지의 도상은 가첩이나 족보와 함께 서양의 귀족 가문을 나타내는 문장에 버금가며, 일종의 친족 관계로 신분과 정체를 노출하는 자기 현시라고도 할 수 있다.

이하나
홍선웅

시전지 판화는 유교나 불교를 기반으로 한 교화용 판화나 기록을 위한 판화들의 섬세함을 일탈한 표현이 특징인데, 이점은 그림이 단지 지식과 관념의 상징이 아니라, 후기 민화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물에 대한 감각적 접촉과 개인의 정서 표현에 보다 밀착했다는 것을 말한다. 심리적으로 사대부 문인들의 세계관을 강조하는 관념적인 시조와 그림들은 역설적으로 개인의 감정 표출과 충돌 할 수 있으며, 육성이나 청각적 이미지를 일으키는 시가나 편지와 같은 정서적이고 사적인 언어사용 속에서, 자의식적인 경향은 강화 될 수 있다. 수기로 쓰는 글에 대해 인쇄된 그림이 주는 효과는 표준적이고 통일된 문자들이 주는 반복된 느낌에 대한 어떤 역반응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 사군자, 문방사우와 기물과 같은 형상들이 무겁고 진지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마치 경쾌하고 기지 넘치는 스케치와 같이 그 형태들이 어떤 리듬과 속도감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목판 인쇄가 주는 인상적인 미감은 개인의 정체가 심리화 된 판면의 깊이와 그것의 흔적을 현상적으로 유비(analogy)한다.

홍익종

애석하게도 고판화의 그래픽적인 특징들을 발견함에 있어서, 우리의 신체와 심리에 미치는 인지(cognition)적 효력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는데, 인쇄된 그림이 주는 선명한 효과는 망각으로 인한 흐릿한 정체를 지각적으로 상기시키며, 강렬한 촉지적 시각이 역으로 운동성을 비롯한 신체의 다른 감각 정보를 재생한다. 목판 위에 파인 선들은 손을 비롯한 신체의 움직임에 의한 것이며, 나무의 물성이 지닌 마찰력과 관계한다. 목판의 표면과 조각끌이 부딪히면서 일어나는 마찰력은 우리의 몸이 작용하는 힘과 물성이 가진 저항의 강도이다. 따라서 인쇄된 형상은 신체의 작동과 어우러진 사물의 물성이자, 형상이란 그것의 흔적이다. 생활 속에서 친숙한 사물들의 형상을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으로 몸의 운동성을 통해 기억하며, 반대로 어떤 물리적 흔적은 신체가 경험적으로 반복했기 때문에 몸적 반응을 일으킨다. ● 시전지 판화를 비롯해서 고판화에 대한 기존의 해석들은 판화의 사회적 목적과 기능에 주목했다. 1995년 서울 판화 미술제 특별전 『한국의 고․ 근대 판화전』 에서 고판화에 대한 관심 속에 "생활 속에 응용된 판화"는 생활에 필요한 용도로서 판화의 기능을 말한다. 그것의 원리는 무엇일까? 왜 인쇄된 목판화의 그래픽적 미감은 우리 에게 친근하고 강렬한 걸까? 이번 전시에서 작품을 통해 고판화를 해석하는 중요한 관점은 질감과 물성이다. 보이는 것은 지식과 의미 이전에 신체의 작동과 현상을 내포하고 있다. 생활 속에서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체화된 몸의 작동과 기억을 지속적으로 확인 할 수 있는 가시성!. 목판화의 긴 생명력은 가장 친근한 물성으로 오랜 기간 접촉했던 나무에 대한 체화된 기억의 층위와 함께 있는지 모른다. ■ 심희정

Vol.20120828e | 시전지(詩箋紙)와 문자향(文字香)-한국고판화의 재해석 ②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