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크리고 가려라 Duck and Cover

김태진展 / KIMTAEJIN / 金泰進 / installation   2012_0824 ▶ 2012_0914 / 주말 휴관

김태진_Duck and Cover Season_단채널 영상_00:08:30_2012

초대일시 / 2012_0824_금요일_05:00pm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 / 아트스페이스 휴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주말 휴관

아트스페이스 휴 Art Space Hue 경기도 파주시 광인사길 68 성지문화사 3층 302호 Tel. +82.31.955.1595 www.artspacehue.com

"뭔가 이상야릇한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너무나도 흔하고, 너무나도 익숙한 경험이다." 지그문트 바우먼(Zygmunt Bauman)이 지금 이곳 도처에 만연한 공포에 관해 쓴 『유동하는 공포』가 시작되는 첫 문장이다. 그저 '이상야릇하고', '흔하고', '익숙할 뿐', 그 어디에도 공포를 연상시키는 두려움이나 무서움과 관련된 말들은 찾아볼 수 없다. 지금 시대의 공포는 그런 모양이다. 심지어 이상야릇하기조차 하다는 것, 김태진 작가의 「웅크리고 가려라 Duck and Cover」 작품에서 말하는 공포 역시도 대체로 이런 느낌과 가까웠다. 1951년 미국 연방정부에서 핵관련 홍보 영상인 동명의 안보교육용 영화를 작업의 주요 모티브로 한 이 작업도 핵과 관련된 현실적인 공포는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이를 둘러싼 흡사 슬랩스틱 코미디 같은 희화된 선정선동의 이데올로기와 그 작동방식에 대해 되묻는 작가는 이를 '계획된 캠프'의 논리와 연동시킨다. 핵과 대중취향의 싸구려 감성학이 묘하게 만나는 지점이다. 핵의 공포야 가늠하기에도 어려울 만치 엄청난 것이겠지만 당대의 상황으로 본다면 분명 그 끔찍한 상상이 충분히 현실화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북이처럼 그저 '웅크리고 가려라' 식으로 대중과의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취하고 있음은 말 그대로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그만큼의 보이지 않는 엄청난 위험에 대한 미 연방정부의 대중을 향한 배려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만큼 알 수 없는 공포 자체를 일상화시키고, 도처에 만연시키기 위한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의 방식으로 고려되었을 것이다. 당시 미국은 소련과의 경쟁을 위해 핵 실험을 해야 했을 터, 이래저래 핵의 실제적인 위험에 대해 대중들이 세세히 알아서도, 알 필요도 없을 것이고, 단지 핵이 폭발하면 어떤 식으로든 대충, 심지어 신문지나 헝겊 쪼가리라도 가리고 피하라 식의 홍보 영상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번 작품은 이러한 아이러니를 놓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와 비근한 우리의 상황과도 은연중에 연결시킨다. 심각함보다는 우스꽝스러움이 더 앞서는 이러한 상황은 비단 역사적인 과거의 남의 나라일 만도 아닌데, 우리 역시 그 옛날, 혹은 지금까지도 북한의 남침과 그에 준하는 상황들에 대비한 민방위 훈련을 통해 이를 반복해서 되풀이하고 있는 실정이니 말이다. 우리의 경우 한낮의 고요한 정적을 가르는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면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 친구들과 이런저런 쑥덕거림으로 전쟁의 공포로부터 잠시잠깐씩 피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이런 식의 훈육 경험이야말로 사실은 공포 자체를 일상에 편재시키고, 현실화시키는 작동방식일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공포가 가진 그 알 수 없는 실체감으로 인해 때로는 이상야릇한 느낌조차 주기도 한다. 작가가 파악했던 것처럼 그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스멀스멀 자아내는 우스꽝스러움 말이다. 이번 작품이 '일상의 도처에 만연하는 공포'를 매개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위 무섭다, 두렵다 식의 공포가 가진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파장이나 효과보다는 공포가 전달되고 소통되는 방식 자체에 대한 작가의 여러 가지 인식이나 단상들이 더 느껴진 것도 이와 연관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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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면에서 작품 속에서의 미국 안보홍보영화인 '웅크리고 가려라'는 이를테면 하나의 알레고리로 작동한다. 직접적인 말하기 방식이라기보다는 다른 것에 빗댄 우회적인 말하기의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전적인 알레고리와도 차이가 있는데, 빗댄 이야기 자체도 얼마간 현실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크레이그 오웬스(Craig Owens)가 말한 '알레고리적 충동(allegorical imperse)', 단순히 덧붙여진 것일 뿐만 아니라 대체하고 보충된 것으로 이전의 의미를 역전시키고 파괴하는 힘을 가진 것들에 가깝다. 애매하고 다의적인 방식으로 혹은 복화술처럼 세상에 대한 이런 저런 사유의 느낌들을 다중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가의 서술방식 또한 선형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을뿐더러 종종 여러 타래의 단상들이 서로 얽히고설킨 채로 자리하면서 주름 짓고 다시 펼쳐지는 식이다. 이를테면 모자이크식 구성인 셈인데, 이번 작품 역시 길지 않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형식들이 서로 이접된 채로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의 주된 정조나 느낌은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인데, 의외성, 아이러니 같은 우스꽝스러운 상황 설정이 그것이다. 어떤 역설에 의해 무언가를 전달한다는 면에서 리오타르의 배리(paralogy)의 논리를 연상시키지만, 불연속적인 이미지로 이어진 영상작업의 특성에서 기인한 효과들이 더 많기 때문에 오히려 작가 특유의 작업방식 자체가 갖는 이야기 구조라 해야 할 것 같다. "이러한 의외성이 상황을 더욱 알 수 없는 아이러니로 몰고 가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극도의 역설에 의해 진리의 단편이 드러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직관과 우연이 작동하는 연결고리를 형성해 보고자 한다.(작가의 글)" 여기서 직관과 우연이 작동하는 연결 고리는 일정한 내러티브 대신 순간순간의 감각적인 이미지들의 이접을 통해 영상을 구성하는 작가 작업의 특성 같은 것들이고, 그렇게 엮어내는 다성적인 이미지들의 연결 속에서도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특정한 상황 논리가 도드라지는 식인데, 그것이 지금 시대의 현실적인 공포와 연결되어 있는 뜻밖의 우스꽝스러움, 블랙 코미디 같은 세상의 풍경이 아닐까 싶다. 영상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상황극 같은 설정을 통해 작가는 이 시대를 빗댄 어떤 화두를 전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무겁지만 한없이 가벼운 희화로 가득 찬 세상이고, 두려운 공포마저도 슬랩스틱 같은 코미디로 번역되는 이 시대의 아이러니 같은 풍경들 말이다. 작가의 말처럼 그런 지금 세상은 참으로 언캐니(uncanny)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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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시는 오늘날의 일상 속에 잠재해 있는 심각함과 과도함, 그리고 우스꽝스러움의 사이를 오가며 진행된 작업으로 이루어진다"(작가의 글) 불연속적인 영상의 논리는 그런 면에서 서로 이질적인 것이 그런대로 맞물려 있는 이 세상의 풍경과 그럴듯하게 어울린다. 작가는 이런 식의 몽타주적인 이미지들의 불연속적인 배치를 통해 아이러니와 의외성으로 가득한 현실의 논리 속을 향해 나아간다. 하나의 영상 안에도 서로 다른 형식의 여러 영상들이 서로 이접된 채로 맞물려 있어야 했던 이유도 이와 연관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미 상영된 오래된 영상을 축으로 하여, 새롭게 연출한 상황극을 덧붙이고, 다시 애니메이션 영상 등을 교차시키기도 한다. 장면이 바뀌는 지점에서는 화면의 색상이 경계경보 영상처럼 바뀌기도 하는 식으로 자유롭게 이미지들을 구성하는 것이다. 의문스러운 장면들도 간간히 심드렁한 채로 삽입되어 있는데, 이러한 우연하고 의도적인 영상들의 연결들을 통해, 작가는 미처 말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모순적인 세상의 논리에 다가가려 한다. 의미는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차라리 임시로 정박된 것임을 강변이라도 하듯 어떤 완결된 이야기가 아닌, 그 단편들이 엮어진 헐거운 틈새 사이사이로 간간히 세상에 대한 어떤 단상들을, 사유들을 중첩하는 식이다. 그렇기에 현실의 공간과 그것에 다가가려 하는 작가의 사유의 공간, 작업의 공간은 약간의 시차를 두고 서로 겹쳐 있는 형국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작업의 말미에 등장하는 벽면 위의 'SEASON'이란 텍스트에 영상을 겹쳐 투사하려는 장면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계절, 철, 혹은 상영기간을 의미하는 SEASON은 작가의 말처럼 베르그손적 의미에서의 시간성을 의미하기 위한 설정이라 할 수 있는데 분절화 되고 공간화 된 시간이 아닌, 흐르고 지나가는 연속적인 의미의 시간, 지속의 시간을 말한다. 작가가 담아내려 한 작품의 시간성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결국 분절되고 포획할 수 있는 시간성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져 무언가 되어가고 있는, 지속적이고 살아있는 시간이고, 삶이 존재하는 형식으로서의 시간, 과학적인 인과관계가 아닌 창조적으로 지속되는 생명적 과정을 가리킨다. 작가 역시도 자신의 작업이 단지 이미지가 서로 접합되어 인위적인 생성된 시간성이 아닌 더 본원의 의미를 드러낼 수 있는 방편으로서의 이미지의 지속된 흐름, 시간성을 드러내길 원했던 것이 아닐까 되물어보게 되는 대목이다. 영상 작업의 경우 시간성의 차원이 작업의 존재론적인 위상을 드러내는 것이라 했을 때 이는 꽤나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런 면에서 작업 말미에 나오는 평범한 골목가의 일상의 창문 같은 설정도 비교적 명료한 의미로 다가오는데, 앞서 말한 핵 공포의 우스꽝스러운 현실조차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로 교차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 창살 너머로 쉽게 들어오는 빛처럼 공포란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우리 내 현실에서 쉽게 잡을 수도 있는 촉각적인 감각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다시 소년탐정 김전일의 만화에 나오는 창문이 산산조각 나는 이미지와 겹쳐지면서 어떤 연결성을 획득한다. 강박적인 이야기의 전달이 아니라 자유롭게 흐르는 단상들과 이미지들을 우연하게 접합시켜 영상을 만들어가는 면모들이 도드라지는 지점들이다. 어떤 인과관계에 따른 논리의 전개가 아니라 작업 전체에서 이러한 의미의 사건들과 일련의 이미지들이 불연속적으로 교차되면서 세상에 대한 작가적인 사유를 드러낸다. 특히 마지막 부분의 만화의 그것을 재현하여 만든 설정극의 한 장면은 그 과도한 데코레이션과 권선징악적인 포즈로 인해 짙은 인상을 남긴다. 희화적인 미국 홍보 영상이 그랬던 것처럼 작가 역시도 이를 빗대가면서, 심드렁하고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영상들을 이어가면서 의사-캠프(pseudo-camp)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만연한 일상의 공포라는 무거운 화두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풍경들이 그런 것처럼 작가 역시 그러한 상황들이 자아내는 부조리함과 어처구니없음에 같은 방식으로 화답하고 있는 것이다. 계획된 캠프에 맞선 작가의 의도된 캠프인 셈이고, 그런 면에서 반복을 통한 강조의 논법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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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종종 의미심장한 장면들을 절점처럼 배치하고 있어 그 가벼움의 실체가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음을 증거 하는데, 3D로 제작한 애니메이션의 경우가 그렇다. 이 이미지는 전시에서 실제 입체물로도 구현되어 영상 속의 현실적인 비현실이 다시 또 다른 현실일 수 있음을 이어간다. 낯설고 생경한 장면이긴 하지만 컨테이너 밑에 짓눌린 인간들의 군상이나 그 컨테이너의 열려진 공간 속으로 연결된 푸른 하늘 이미지는 어떤 명료한 의미들을 함축한다. 짓눌려 있는 인간 군상들의 겹쳐진 모습은 앞서 반복된 정형화 된 몸짓인 '웅크리고, 가려라'라는 포즈의 정치학을 이미지화시킨 것처럼 보이고 그 위를 짓누르고 있는 열려진 컨테이너 역시 자연 속에 자리하는 인위적인 구조물들을 의미화 시킨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열려진 컨테이너 사이로 비춰진 하늘에서 무언가 섬광이 대지로 떨어지는 장면이다. 여기서 '웅크리고 가려라' 홍보 영상에서 반복되었던 문구인 번쩍이는 섬광이란 단어가 중첩된다. 미 연방정부의 홍보영상에서는 경고도 없이 터지는 핵폭탄의 첫 순간을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번쩍이는 섬광이라 말하는데, 이는 가시화될 수 없는 핵의 실체 혹은 그 공포를 대신하는 이미지일 것이다. 번쩍이는 섬광은 차라리 볼 수 없는 것에 가까운 것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폴 비릴리오(Paul Virilio)가 말한 피크노렙시(picnolepsie)를 떠올리게 된다. 전혀 의식할 수 없는 짧은 시간 동안 일시적으로 의식의 흐름이 중단되는 현상을 의미하는 피크노렙시는 이를테면 정확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광경이나 상황을 목도했을 때의 혼란스러운 의식의 경험, 그 전율과 충격을 말한다. 영상 이미지들의 빠른 속도감 속에서 경험케 되는 일시적인 단절과 부재의 경험 말이다. 어쩌면 이번 작업에서 다루고 있는 핵 공포의 보이지 않는 위험이 만들어갈 수 있는 가시성도 이러한 피크노렙시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이는 차라리 볼 수 없는 것, 그저 막연하게 '번쩍이는 섬광' 정도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그런 이미지들이 아닐까 싶고, 어떻게 표현이 되어도 그 공포는 직접적으로 가시화될 수 없는 것들이기에 작가의 작업 역시도 여러 가지 우회를 통해 지금 시대의 공포가 가진 일상적 현존의 어처구니없음이나 그렇게 쉬운 존재감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던 공포의 편재성을 드러내려 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공포가 가장 무서울 때는 그것이 불분명할 때, 위치가 불확정할 때, 형태가 불확실할 때, 포착이 불가능할 때, 이리저리 유동하며 종적도 원인도 불가해할 때다. 어떤 규칙성도 합리적 이유도 없는 공포, 그 낌새가 여기저기서 선뜻선뜻 나타나지만, 결코 통째로 드러나지 않는 공포야 말로 가장 무시무시하다. (지그문트 바우먼, 유동하는 공포, 함규진 옮김, 산책자, 2009, p.11-12)" 공포는 그렇게 가시화될 수 없기에 더 두려운 것이다. 보이지 않는 위험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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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처에 공포로 가득 찬 세상이라 해도 그 작동방식은 시대를 달리해서 변화하기 마련이다. 서슬 푸른 시대의 칼날 같은 공포의 시대가 있는가 하면, 이번 영상에서 포착한 것처럼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되풀이 되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희화적인 공포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공포조차도 난데없이, 그리고 종종 희화적인 몸짓으로 되풀이 되는 이 시대야 말로 심리적인 두려움의 유무에 앞서 이미 슬픈 시대는 아닐지 되물어보게 된다. 이러한 미시적이고 일상적인 공포가 가능한 것도 공포 자체가 두렵지 않은 방식으로 변환되어 전파됐기 때문일 것이다. 미 연방정부가 제작한 '웅크리고 가려라'라는 영상물이 '계획된 캠프'와 같은 스타일로 만들어지게 된 맥락 말이다. 반공시대와 공안정국을 되풀이해야 했던 우리 내 삶 역시도 지금 입장에서 보면 그저 어처구니없는 시절이었겠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꽤나 슬픈 시대적인 무게감에 짓눌린 시대였기도 했다. 실체도 모를, 하지만 세상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수도 있는 핵 위협 앞에서 그저 거북이처럼 웅크리라는 말도 안 되는 메시지를 담은 영상이 국가 단위로 제작되어 배포되는 시절을 우리는 살아왔던 것이다. 어쩌면 지금 시대에는 이 보다 더한 코미디가 또 다른 이데올로기로 그 화려한 외피를 통해 작동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주마등처럼 여러 상이한 이미지들로 얼기설기 엮어진 작가의 영상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우스꽝스러운 이미지들에 앞서 지금 시대를 향한 작가의 자못 진지한 시선이 던져지고 있다는 면에서 어떤 무게감이 느껴진다. 어쩌면 핵이나 전쟁 같은 공포에 앞서 그런 거대한 이미지들 사이로 가려진 일상의 미시적인 위험이나 공포야 말로 우리를 알게 모르게 조이는 진짜 두려움일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런 미시적인 두려움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 그 보이지 않은 위험들을 어떤 식으로든 가시화시키는 것이야 말로 우리의 어깨를 슬며시 짓누르는 이 시대의 이상스러운 공포에 대한 대응이 아닐까 반문해보게 된다. 이번 작품이 자리하고 있는 아슬아슬하지만 진정성 있는 위상이라 할 수 있는데, 그렇게 거창하고 요란하지 않게, 때로는 어처구니없는 몸짓이나 미시적인 감각들로 이 시대의 온갖 무게들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게 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문득 일상의 한 복판 속에서 이 거대한 역사의 틈바구니들이 작동시키는 수많은 미시적인 위험과 공포에 우리가 노출되어 있음을 순간적으로 자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 민병직

Vol.20120825e | 김태진展 / KIMTAEJIN / 金泰進 / installation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