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2_0815_수요일_06:00pm
LANDSCAPE of THE SUBCONSCIOUS展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경운동 64-17번지 Tel. +82.2.733.1045 www.grimson.co.kr
이종희의 신(新)-미니멀리즘의 조각 ● 복잡다기하게 전개되는 현대미술의 지형 속에서 작가가 자신만의 특유한 작품 세계를 구축한다는 것은 대단히 힘들다. 자신의 작품 세계가 갖는 특유성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저 남다르다거나 기발하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남다를 뿐만 아니라, 우선 그 나름의 다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일종의 근본 형식을 구축해야 하고, 나아가 그 근본 형식이 적어도 미술사적인 맥락에서 나름의 보편적인 가치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서 이번 전시를 통해 발표되는 작품들을 소재로 삼아 작가 이종희의 작품 세계를 간단하게나마 분석해 보고자 한다. 다만, 전시장 입구에 전시된 '단두대를 장치한 콘크리트 배'는 다른 작품들과 다소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말하자면 일정하게 사회정치적인 함의를 담은 내러티브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분석에서 제외하고, 전시장 실내에 전시된 작품들만을 분석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그의 작업의 기본 방식은 일정한 계획에 따라 거푸집을 만들고 그 속에 다량의 모르타르를 부어넣어 굳게 한 뒤 직육면체로 깔끔하게 잘라내는 것이다. 이 기본 작업만으로도 일정하게 예술사적인 충격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기본 방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번에 전시된 그의 작품에서 정작 중요한 작업 방식은 다량의 모르타르를 부어넣기 전에 거푸집 속에 주로 큰 나무뿌리나 줄기, 또는 도자기를 비롯한 일상용품들, 또는 장난감이나 팬시용품 등을 미리 집은 상태에서 모르타르를 부어넣는다는 것이다. 그 상태에서 양생해서 굳게 한 뒤 직육면체로 깔끔하게 잘라내기 때문에, 결국에는 미리 집어넣은 그것들이 모르타르와 단단하게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고, 아울러 완전히 굳어진 콘크리트를 깔끔하게 직육면체로 잘라낼 때 함께 잘려짐으로써 그 내부의 단면들을 직육면체의 표면에서 속살을 드러내듯이 드러내게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적당히 예상할 수는 있으나 결코 정확하게는 예상할 수 없는 우발적인 형상들이 육중한 직육면체 콘크리트 표면에 아로새겨진다.
이종희의 특유하기 이를 데 없는 이러한 작업 방식에서 우선 돋보이는 것은 다산성을 지닌 근본 형식을 개발했다는 것이다. 그 다산성은 다음과 같은 특징들에서 성립한다. 첫째, 거푸집을 크기와 형태에 있어서 어떻게 달리 하는가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작품의 기본 형태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 둘째, 거푸집 속에 모르타르 대신에 어떤 새로운 재료들을 부어 넣는가에 따라(예컨대 인조 대리석의 원료를 부어넣을 수도 있고 석고의 원료를 부어넣을 수도 있고 이것들을 적당히 섞어 집어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작품의 기본 마티에르를 전혀 색다르게 가져갈 수 있다. 셋째, 거푸집 속에 어떤 내용물들을 어떤 것을 어떻게 배치해서 미리 집어넣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형상들을 구현해 낼 수 있다. 넷째, 완전히 양생된 1차 결과물을 어떻게 잘라내는가에 따라(예컨대 두툼한 직육면체나 정육면체로, 납작한 판으로, 혹은 심지어 'H'를 비롯한 여러 다양한 기하학적인 형태로 잘라낼 수도 있다) 여러 다양한 형태의 작품들을 만들 수 있다. 다섯째, 결국에는 이 여러 특징들을 어떤 비율로 조합해서 작품을 만드는가에 따라 산출되는 최종적인 작품들은 다종다양할 수 있다. 이렇게 강력한 다산성을 띤 작업 방식을 활용한다고 다종다양하게 제작된 작품들 전체를 아우르는 보편적인 근본 형식이 붕괴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강화된다. 말하자면, 다산성을 통해 오히려 이종희 나름의 작업 스타일의 특유성이 더욱 강화된다.
문제는 특유하기 이를 데 없는 그만의 작업 방식이 그저 기발하다는 데 그치지 않고 미술사적인 맥락에서 어느 정도의 예술적 가치를 갖는가 하는 것이다. 한창 발돋움하면서 과학기술의 발달과 연동해서 계속 새로운 형식의 작품들을 생산해 내고 있는 미디어 아트를 제외하고 보면,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안출해 낼 수 없다고 할 정도로 현대미술사는 온갖 종류의 실험들을 다 거쳤다고 할 수 있다. 그 와중에 미술사적인 맥락에서 나름의 독보적인 예술적 가치를 구현해 낸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이종희의 이 작품 방식에 대해 대략 다음과 같이 분석해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미니멀리즘의 기본 전략들을 원용하고 있다. 미니멀리즘은 기본적으로 사물 자체를 있는 그대로 간략하게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는 그저 직육면체 나무토막 하나를 단일 작품으로 제시한 칼 안드레의 『헤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미니멀리즘은 아주 '기본 단위'(UNIT)라 부를 수 있는 간명한 기본 형태를 발견하여 이를 적절하게 변형 ․ 배치하는 것을 기본 전략으로 삼는다. 댄 플래빈은 형광등을, 도널드 저드는 알루미늄 혹은 판자로 된 직육면체를, 칼 안드레는 나무토막을, 리처드 세라는 쇠판을 기본 단위로 삼아 변형 ․ 배치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종희는 '잘라낸 콘크리트'를 기본 단위로 삼아 변형 ․ 배치한다. 그럼으로써 기존의 세계적인 미니멀리즘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사물 자체가 지닌 근원적인 위력을 드러내는 쪽으로 치닫는다. 미니멀리즘 작가들이 주로 산업적인 공산품을 기본 재료로 활용하는데, 이종희가 시멘트를 비롯한 공산품을 기본 재료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공통된 특징을 보인다. 굳이 비교하자면, 그가 활용하고 있는 '콘크리트'야말로 현대 자본주의 도시문명을 일으킨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서양의 전통적인 미니멀리즘에 비해 기본 재료의 선택에 있어서 더욱 포괄적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이러한 전통적인 미니멀리즘에 혼종적인 요소를 가미하고 있다. 그것은 앞서 말한 거푸집에 미리 집어넣은 여러 요소들이다. 그런 까닭에 전통적인 미니멀리즘에서 볼 수 없는 여러 다양한 우발적인 문양들이 작품의 표면을 '장식'하고 있다. 이는 한편으로는 자연물(나무의 경우)이나 인공물(장난감이나 팬시용품 및 일반 공산품)을 절단함으로써 도구를 벗어난 사물 자체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혼종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전혀 이질적인 시멘트와 나무의, 또는 시멘트와 장난감 자동차의, 또는 시멘트와 카메라 등의 결합에 의한 절편적인 통일성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셋째, 굳이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특히 나무와 시멘트의 절편적인 결합에 의한 통일성의 구축에서 시멘트는 지평으로서 나무의 속살을 드러내어 고정시키는 기능을 하고 그런 와중에 나무의 속살에서 드러나는 문양이 주된 모티브로 작동하는데, 여기에서 일종의 생태주의적인 경향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들을 전체적으로 보면, 이종희의 작품 세계는 기본적으로 미니멀리즘적인 사물의 기하학적 처리에 입각해 있으면서 그 이후 전개된 미술사적인 흐름,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경향을 가미해 나름대로의 새로운 미니멀리즘을 구축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에 평자는 작가 이종희의 이번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들을 일괄적으로 일컬어 『신(新)-미니멀리즘』이라 부르고자 한다. 이러한 이종희의 작업은 미니멀리즘이 한국에 도입되면서 이른바 '한국적 미니멀리즘'이라고 해서 회화를 중심으로 한 것과는 전혀 궤를 달리한다. 그동안 한국 미술에서 입체적 미니멀리즘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미미했고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렇게 이종희의 작업을 통해 신-미니멀리즘적인 방식으로, 게다가 다산성이 탁월한 근본 형식의 개발을 통해 미니멀리즘적인 미술에서의 '인간을 넘어선 사물 추구의 정신'을 고취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미술사적인 맥락에서 이종희의 작품 세계가 그 특유성을 발휘하면서 성립한다고 해서 작품 그 자체로 예술적인 위력을 발휘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비단 혼종적이어서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생경하게 다가오면서 크게 충격을 준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예술적 감수성을 충분히 자극한다. ■ 조광제
Vol.20120816c | 이종희展 / LEEJONGHEE / 李種熙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