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2_0814_화요일_05:00pm
김은형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 'Pictures at an Exhibition, Curated by Moussorgsky' 임주연 'Skim'
관람시간 / 10:00pm~06:00pm / 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수송동 46-15번지 Tel. +82.2.734.0440 www.ocimuseum.org
작가 김은형 작업에 대한 매우 주관적인 감상 ●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김은형은 이번 OCI 미술관 전시에서 러시아의 작곡가 무소르그스키가 작곡한 전람회의 그림이라는 음악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작업을 한다. 무소르그스키는 그의 친구인 화가 하르트만이 그린 10개의 드로잉으로부터 음악을 만들어냈다. 작가 김은형은 이 음악을 다시 시각 이미지로 그려낸다. 하르트만이 그린 10개의 그림은 각각 다른 스토리를 가지며 서로의 연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소그르스키는 이 다른 이야기의 그림들을 전시장을 거니며 관찰하는 방법적 시점에서 음악으로 이어 붙여 하나의 완성된 곡으로 만들어냈다. '프롬나드(promenade)'라고 하는 개념을 음악에 도입하여 그것을 전주나 간주의 형식으로 사용하면서 각 열 개의 다른 스토리의 음악을 통일성 있게 연결하는 고리로 사용한다. ● 리얼리즘 음악의 대표적인 곡인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왕벌의 비행'과 같이 무소르그스키는 전람회에 출품된 여러 그림들, 난쟁이, 고성, 병아리, 마녀, 지하의 묘 등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그 이미지들을 관객들이 음악을 통해 연상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작가는 그가 의식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기억 속에서 보고 감응한 느낌 그대로를 음악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각기 다른 에피소드들에 비해 프롬나드 부분은 스토리 표현을 위한 리얼리즘 기반의 멜로디가 아닌 매우 주관적이고 스토리와는 상관없는 음악이다. 그렇다고 다른 에피소드들을 연결 하기위한 형식적인 기능만으로 작곡된 것도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각기 다른 스토리의 그림들을 묘사한 곡들이 의식의 영역에서 나온 것이었다면 프롬나드 부분은 무소르그스키 자신이 지닌 무의식의 영역에서 잠겨있는 하르트만과 관계에서 생성된 이미지들을 표현한 것이다. 즉 프롬나드는 갤러리를 거닐며 각기 다른 그림들을 연결하는 고리로서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친구인 하르트만과의 관계에서 나온 독자적인 창작 가치를 지닌 것이다. 이로써 무소르그스키는 단지 그림 이미지들을 음악화 시킨 것이 아니라 그의 친구 하르트만을 표현한 것이다. 그의 유작전 작업들 몇몇 단면들을 가지고 말이다. 전람회의 그림은 무소르그스키에게는 하르트만에 대한 의미를 인식하며 친구를 잃은 슬픔으로부터 자신을 치유하는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에 대한 기억들을 되새기며 말이다.
김은형은 이번 작업에서 무소르그스키가 표현한 10개의 음악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회화작업으로 묘사한다. 대상을 시각을 활용하여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듣고 청각으로 받아들여 감응하고 이를 다시 시각으로 전환시킨다. 감각과 감각의 전환 과정은 뇌의 인식의 단계에 간극을 만들고 그 사이에 무의식 세계에 있는 주체적인 원초자아가 개입되어 간섭을 일으킨다. 작가는 단일 감각의 반응을 통한 뇌의 인식이 아닌 공감각들을 통한 몸과 마음의 감응을 시도 하려 한다. 의식적이고 논리적인 묘사가 아닌 내면의 무의식적이고 원초적인 주체성을 표현하기 위해 작가는 무소르그스키가 작곡한 음악을 즉흥적이고 순발력 있는 브러쉬스트로크 기법을 사용하여 표현한다. 작가는 음악의 멜로디처럼 계획적이거나 도식적이지 않은 매우 자유로운 선들을 활용하여 흑백의 이미지들을 창출한다. ● 그림을 그린 작가 하르트만, 그림을 음악화한 작곡가 무소르그스키, 다시 그 음악을 그림으로 재창작해낸 김은형 이 세 사람은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고 다른 표현 매체를 사용한 창작자들이다. 하르트만과의 무소르그스키와 관계성에는 음악이 있다. 김은형과 무소르그스키 사이에는 그림이 있다. 김은형은 개인과 타자, 자신과 사회 간의 관계 사이에 존재론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자신의 예술을 활용한다. 단지 관계의 미학이나 음악과 회화의 변환과 융합이라는 새로운 형식적 시도를 넘어서 말이다.
무의식과 의식 사이의 기억들 ● 김은형은 자신의 과거 작업인 Designing egos에서 사적인 기억의 이미지들을 의도적 기술이 아닌 즉흥적 발상에 의존하여 그려냈다. 그는 무의식적 상황에서 자아 내면에 가라앉아 있는 이미지들을 의식의 수면위로 부상시킨다. 이는 무의식 세계의 본질을 엿보고자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많이 사용했던 자동기술 automatism 즉 의식이나 의도가 없이 무의식의 세계를 무의식적 상태로 대할 때 거기서 솟아오르는 이미지의 분류를 그대로 기록하는 방법과 유사하다. 그러나 무의식 세계의 이미지를 끌어내려했던 초현실주의자와 다르게 그가 만들어낸 이미지들은 본능의 영역인 원초자아(무의식의 세계)와 자아 사이에 머물러있는 자신의 기억들을 끌어낸다. 그가 그려낸 흑백의 이미지들은 무념무상의 수행이 아닌 유념유상의 수행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와 세상의 순리와 본질을 이해하려했던 자수화풍의 수행과도 매우 흡사해 보인다. 즉 무념과 유념, 무의식과 의식 경계에서 그려지는 선형적 시간의 흐름 아래서 구성된 내러티브와 비선형적 시간 아래서 파편적으로 구성된 이미지들의 경계에서 모호한 상황의 이미지들을 만들어 낸다. 추상적 이미지와 구상적 이미지가 교차하는 정리되지 않은 혼돈적인 이미지들에 원초자아와 자아의 중간계에 자신의 창작 세계를 삽입시키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기억의 혼돈에서 정리하고 찾고자 하는 것 같다. 순간적으로 긴 획을 그어내는 브러시스트로크는 이러한 경계성의 모호함을 더욱 강화시킨다.
무의식의 기억들을 인식하기 위한 구조적 조형화 ● 무의식과 의식의 중간 영역에서 뽑아진 이미지들은 이차원적 나열에서 다차원적 공간의 형상으로 재구조화된다. 작가는 창작의 순발력에 기인한 무의식적인 평면 드로잉과는 달리 이 조형작업에서는 정교하고 계획적인 공간구성을 시도한다. 조형물들은 예측 가능한 삼차원 구조의 도형으로 구성되지 않고 유기성을 기반으로 비구조적인 형상으로 표현된다. 그리하여 수많은 굴곡이 생기고 다차원적 주름이 생겨난다. 마치 많은 웜홀들을 통해 시간의 제약 없이 기억의 파편들을 연결시키며 시공을 넘나드는 것처럼 김은형의 조각 작업은 삼차원 공간의 x와 y축을 벗어나 공간과 시간을 왜곡하는 중력장과 결합한 듯하다. 다차원적 주름이 형성되고 그 안에서 작가의 기억들은 뒤섞이며 시간과 공간은 뒤얽혀버린다. 이 얽힘은 매우 계획적으로 장면과 장면을 연결시키며 자신의 모호한 사적 기억들을 보다 의식적으로 객관화시킨다. 작가는 뇌에서 이 작업의 형상을 가져왔다고 했다. 인간의 뇌는 무한한 복잡성의 영역이며 하나의 작은 소우주와도 같다. 삼차원적 영역이 아닌 다차원적 시공의 영역인 뇌를 모티브로 자신의 뇌에서 나온 기억들을 다시 물리적으로 구형화 시킨다. 스스로 가진 무한의 복잡성을 이성적 의식 영역에서 구체화시키는 작가는 평면 작업에서 무의식적 드로잉을 나열한 이후 조형 작업에서 논리적인 재구성을 시도하여 기억의 번뇌를 안정화시키고 타인과의 공유를 시도한다.
자신과 타자의 동일화 ● 작가의 작품에 출연하는 모든 인물들은 비슷한 모습으로 그려지며 마치 동일 인물인 것 같은 느낌을 보여준다. 인물들은 각기 다른 스토리와 다른 시공에 존재하지만 작업에서는 같은 시간대와 같은 사회의 영역에서 온 동일인물과 같이 표현된다. 작가는 작품에서 보이는 인물들의 동일화 과정을 통해 타자와 자신의 구분을 없애 버린다. 개인과 타자의 관계는 자신과 자신을 반사시켜 나타내는 거울과 같은 의미이며 개인의 정체성은 타자에 의해 평가되고 규정지어진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동일기제를 통한 인간의 집단화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이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규정지을 때보다 타인에 의해 그 가치를 부여 받을 때 더욱더 큰 만족감을 얻는다. 이런 의미에서 작가는 자신과 모든 이들과의 관계를 연결시켜가며 고립된 상실감을 해체하고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타인에 의해 찾으려한다. ● 작가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혼돈적 기억들을 끌어내어 평면 위에 나열하고 펼쳐진 자신의 기억들을 타자와의 관계성 안에서 재조립한다. 자아 영역에서 구체화 된 자신의 기억들은 보다 객관화된 이미지로 정리되어 대중들에게 전해진다. 이러한 작가의 작업과정은 정신과 의사 J.L.모레노가 창시한 심리요법 사이코드라마(심리극)이 취하는 방법과 흡사하다. 일정한 대본이 없고 등장인물인 환자가 생각나는 대로 연기를 하게 하여 그의 억압된 감정과 갈등을 표출한다. 타인이 자기를 보는 것처럼, 객관적으로 자신을 보며 스스로를 통찰하기 위한 수단인 심리극은 사회 적응장애를 치료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이다. 극의 주제가 공적인 문제를 주제로 할 때 소시오드라마(sociodrama)라고 하는데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서 타인과의 관계성을 전제로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키며 사회적 집단 아래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이와 맥이 닿아있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이성적 억압 없이 자신의 내면에 가라앉혀 있는 기억들을 표출하고 그 이미지들을 타인의 시각과 연결시켜 객관화하는 드로잉을 지속적으로 되풀이한다. 이러한 수행적 되새김의 과정을 통해 작가는 사회 안에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며 자신만의 주체적인 미래를 그려 나아가고 있다. ■ 서진석
스치듯 지나가는 시간의 주름 ● 임주연은 지난 10년 동안 '사진의 재현성'과 '영상의 시간성'을 자신의 회화 작품에 적극 끌어들여 왔다. 특히 영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의 개인전 『Extremely Ordinary』(2009년), 『Banalscape』(2010년), 『Return』(2011년) 등에서는 사진의 방법론을 회화에 적극 동원하는 작품에 집중했다. 작가 자신이 내세운 전시 주제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듯이, 임주연의 작품은 지극히 평범한(혹은 따분하거나 시시한, 덧없는) 일상사에서 포착한 자신의 신체를 구상 양식으로 그려낸 것이었다. 이번 개인전은 『Skim』이라는 주제를 내걸었다. 역시나 '스치듯 지나가는' 삶의 한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다.
이번 개인전에서도 이전의 작품 방법론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그 제작 과정은 다음과 같다. (1)사적인 공간에서 자신의 몸을 감쌌던 외피(옷)를 벗는다. (2)그 탈의(脫衣) 장면을 카메라 셀프타이머를 이용해 연속적으로 찍는다. (3)그렇게 찍은 여러 사진 중 일부를 선택하여 캔버스에 확대해서 그린다. 임주연의 작품 제작 은 결코 새롭거나 대단한 발상이 아니다. 문제는 이 평범한 발상을 비범한 작품으로 끌어올리는 조형 능력일 텐데, 임주연 작품의 비평에서 터치해야 할 핵심도 바로 이 대목이다. 임주연에게 사진은 아이디어 스케치 혹은 밑그림 역할을 맡고 있다. 더 큰 의미로 작품의 기초 설계요, 뼈대 구성이라 해도 좋다. 그의 작품은 자신의 신체 움직임의 한 찰나를 정지된 이미지로 붙잡은 사진에서 출발한다. 그리하여 임주연은 사진 촬영을 통해 몇 가지 흥미로운 형상을 얻어낸다.
첫째, 사진을 찍은 결과는 찰나의 정지 이미지이지만, 신체와 옷의 형상이 천태만상이다. 옷을 벗는 동작에도 긴장과 이완, 에너지의 강약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얼굴이나 팔 다리, 다른 신체 부위가 적극 개입되는 격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조용히 단추를 여미는 정도의 온순한 동작도 있다. 둘째, 그 사진이 마냥 정적으로만 보이지도 않는다. 신체 움직임의 앞과 뒤에는 언제나 유동적인 시간이 안착할 여백 혹은 틈이 있다. 그래서 옷을 벗는(혹은 입는) 동작과 바로 그 다음 동작, 그리고 그 다음의 시간과 상황 전개를 예감해 보는 즐거움이 크다. 실제로 작가는 인물 형상의 연속성을 확연히 드러내는 2면 혹은 3면의 연작 회화를 제작하기도 한다. 셋째, 미리 구도를 고려하지 않고 찍은 사진이어서 오히려 파격의 프레임이 탄생한다. 대체로 옷을 벗는 행위에 집중되어 있어 목 위의 얼굴 부위는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 '얼굴 없는 신체'가 묘한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카메라의 눈은 시간의 흐름을 시각화하는, 예컨대 형상이 빠르게 휙 소리를 내면서 스쳐 지나가듯 흐릿한 이미지를 담는다.
사실상 작품의 골격은 이 사진에서 결정된다. 그 다음 과정으로 임주연은 캔버스에 사진을 크대 확대해서 그린다. 그렇다고 사진 원본을 그대로 베끼지는 않는다. 그렇게 했다면, 아마도 그의 작품은 숨이 착 가라 앉은 포토리얼리즘 수준에 머무르고 말았을 것이다. 이 단계에서 마침내 회화 기법의 미덕이 적극 동원된다. 임주연은 카메라의 눈으로 포착한 이미지에 적극 기대면서도 손의 표현, 요컨대 수공(手工)의 특성을 결코 잃거나 잊지 않는다. 엉뚱하게 잘려나간 화면의 프레임, 느닷없이 절단된 신체 부위의 야성, 과감한 클로즈업의 임팩트, 미끄러지며 꿈틀대는 붓 자국, 우연인 듯 뚝뚝 흘러내리는 물감의 얼굴, 흐릿한 색채의 알 수 없는 불안, 옷 주름의 팽팽한 긴장….
임주연은 이제 캔버스 위에서 '회화의 잔치'를 펼친다. 우선 사진 작업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그 일체의 회화적 행위는 단순히 형태를 만들고 색을 칠한다기보다는 카메라에 찍힌 정지된 과거 자신의 한 순간을 다시 현재화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사진으로는 이미 완결된 시간, 갇힌 시간을 회화의 힘으로 활짝 해방시키는 작업이 아닌가 싶다. 자신의 몸으로 자신의 몸을 그려대는 이 현재화 작업을 통해 임주연은 회화 공간을 '진행형'의 영원한 미완의 시간으로 끊임없이 밀어 넣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의 회화는 더 이상 미래라는 시간이 탈각된 박제된 버전이 아니라 꿈틀대는 살아있는 생명으로 우리 앞에 가쁜 숨을 내쉬고 있다. 그 숨결의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이야말로 회화의 진정한 매력이요 또한 회화의 존재 이유가 아닐까? 우리가 미술의 그 어떤 장르보다 회화를 갈망하는 이유 중 하나는 수공 작업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인간의 손이 효용을 점차 상실해 가는 테크놀로지 사회에서, 회화는 첫걸음에서부터 마지막 완성까지 작가 스스로의 신체 작용이 지배하는 예술이다. 이 점에서 회화는 장르의 고유성을 확보하고 있다. 회화에 대한 갈망은 근원적으로 사물에 대한 애정, 즉 페티시즘(fetishism)에 기인한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라캉은 페티시즘의 근원을 인간이 어머니의 자궁에서 분리된 이후의 끊임없는 상실감, 무의식의 기아감에서 찾지 않았던가. 바로 이 수공의 특성이 캔버스 화면과 충돌하며 부싯돌 같은 섬광이 일어나는 지점에서, 임주연의 작품은 "나는 회화다!"라고 당당하게 외친다. 그리하여 사진으로는 온전히 걷잡을 수 없었던 사물에 대한 애정을 회화라는 손으로 따뜻하게 애무하는 것이 아닐까?
신체, 붓과 물감이 서로 거친 호흡을 주고받으며 일궈내는 화면 위의 수많은 질료의 이랑은 시간의 주름을 직조해 간다. 그 촉각의 감성으로 불러내는 페티시즘이야말로 사진이나 영상의 평면(superflat)과는 질적으로 다른 회화 표면의 감동이 아닌가. 이렇듯 임주연은 회화와 뉴미디어의 조형적 순환을 자연스럽게 포용하면서도 회화의 독립성과 고유성을 지켜가고 있다. 달리 말하면, 회화가 회화여야 함을 부르짖으면서도 시각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임주연의 작품은 '사진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회화'라고 해야 할까? ● 임주연의 최근 작업은 신체 동작보다는 옷의 형상 자체를 더욱 부각시키는 변화를 보인다. 신체의 일정 부위가 대형 화면에 크게 클로즈업되어, 이전 작업에서 보이던 인물의 동작은 크게 약화되었다. 얼핏 보면 인간의 신체와 무관한 미시세계의 한 부분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추상표현주의 회화의 역동적인 필치와 구성을 대하는 느낌이다. 신체 움직임이 빚어내는 미묘한 옷의 표정은 또 다른 알레고리적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임주연은 왜 하필 옷을 그릴까? 옷은 몸을 감싸는 '제2의 피부'다. 옷은 사회적 문화적 정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공적 언어다. 또 누군가가 말했다. "옷은 가장 작고 사적인 은밀한 공간이다." 그러니까 옷은 '나(주체)'와 '타자(세계)'가 만나는 경계다. 옷은 주체의 마지막 껍질이요, 타자와 소통하는 최초의 장소다. 임주연은 자신의 은밀한 방에서 옷을 벗는다. 타자의 공적인 시선에 머물러 있던 '보이는 나'에서 속옷과 속살까지를 드러내 보이는 '보는 나'의 사적인 세계로의 노정이다. 그리고 '보는 자(촬영자)'와 '보이는 자(피사체)'와의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고, 다시 이 양자를 선택하고 번역하는 또 하나의 '해석자(작가)'를 통해 진정한 나를 찾는 여정이 이어진다. 임주연의 옷은 나와 세계와의 유무형의 경계, 혹은 '스치듯 지나가는' 그 경계의 애매모호한 시간의 겹을 파고든다. 옷은 인간 실존의 다른 이름이다. ■ 김복기
Vol.20120814b | 2012 OCI YOUNG CREATIVES-김은형_임주연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