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안개 Black Fog 展

정용국展 / JEONGYONGKOOK / 鄭容國 / painting   2012_0811 ▶ 2012_0909 / 월요일 휴관

정용국_검은 안개_한지에 수묵_27×34.5cm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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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811_토요일_06:00pm

기획 / 이대범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스페이스 오뉴월 Space O'NewWall 서울 성북구 성북동 51-2번지 Tel. 070.4401.6741 www.onewwall.com

roundabout ● 『A tree』(2007)에는 거대한 나무가 등장한다. 유사하지만 차이를 지닌 나뭇잎이 쌓여 나무를 이룬다. 나뭇잎의 개별적 특성은 먹의 번짐과 통제에 의해서 규정된다. 그리고 그 아래에 한 남자가 서 있다. 그의 신체는 나무의 몸체를 이룬다. 나뭇잎은 그의 몸에서 시작한다. 나 없이는 존재 할 수 없는 나무, 그리고 나의 몸을 통하지 않고는 생성되지 않는 나뭇잎. 나에게 이 작업은 정용국 작가의 '솔직한' 자화상처럼 보인다. 자신의 삶에서 격리된 먹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다부진 결심을 이 그림에서 읽을 수 있다. 먹, 신체, 삶, 태도가 조우하고 충돌하는 지점에 대한 반성과 모색의 과정을 엿 볼 수 있다. 자신에게 있어 먹을 정의하고 먹의 뿌리를 파헤치고자 했던 『A tree』가 출품된 『Organic garden』(2007, 인천신세계갤러리) 개인전 이후 작업에 변화가 있다면 무엇인가? 정용국 ● 『Organic garden』전은 현재 작업의 원형에 해당한다. 나에게 수묵화 작업은 처음부터 현실적인 내 삶의 태도가 발화 된 것이고자 했다. 그런 의미에서 『A tree』는 나에게 반성이자, 다짐 같은 것이었다.

정용국_검은 안개_한지에 수묵_34.5×27cm_2012

roundabout ● 다른 작가들의 경우 자의건 타의건 '동양화'를 벗어나야 하는 그 무엇으로 인식했다면, 그간의 작업을 보면 오히려 동양화에 접근하고자 한다. 이러한 맥락의 선배를 찾아보면, 동양화의 시대적 유용성에 새 길을 연 것은 아무래도 90년대 중반 이후 유근택과 박병춘이 아닐가. 그리고 그들의 작업은 학교에서 말하는 동양화와는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정용국 ● 굉장한 차이가 있다. 학교에서 배운 그림은 두 가지 결이 있다. 서세옥 선생님을 중심으로 하는 수묵 추상과 아주 전통적인 작업이 있었다. 실제로 컨템포러리 아트라고 불릴 만한 작업은 없었다. 그래서 내 세대에게 유근택과 박병춘은 의미가 있다. 그들의 작업을 보면서 저런 방식으로도 작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정용국_검은 안개_한지에 수묵_34.5×27cm_2012

roundabout ● 이후 작가들은 동양화가 현대미술과 어떤 관계를 설정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기저에는 동양화라는 장르가 현대미술에서 '이방인'처럼 인식되기 때문에 빠른 시기에 이방인의 낯섬을 떨치려 했다. 현대미술에서 동양화가 장르로서 낙후되었다는 판단 아래 다른 소위 현대적이라 불리는 미디어를 사용해 이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미디어 자체가 현대성을 담보한다는 편협한 사고에 기인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작업을 봤을 때 어떤 생각을 했는가? 정용국 ● 사실 미디어의 변화를 통해 현대성을 획득하고자 했던 1990년대 이후 동양화의 흐름을 보면서, 그들의 방식이 매체를 바꾼다면 과연 유의미한 것인가를 생각해봤다. 서양화의 주요 미디어를 사용해 그 그림을 그린다면 그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결론은 아니다. 결국 매체가 아니라 재료와 대상의 관계, 즉 태도의 문제이다.

정용국_검은 안개_한지에 수묵_34.5×27cm_2012

roundabout ● 그 말은 '매체적인 접근'이 아니라 '태도적인 접근'에 방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동양화가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매체의 단독성이 아니라 동양화에 접근하는 '태도'가 이 시대에 유의미하기 때문이다. 정용국 ● 당시 동료들과 이야기해보면, 동양화라는 매체는 시각적으로 굉장히 취약하여, 다른 미디어 작품들과 함께 전시를 하면, 다른 작품들의 시각적 효과 때문에 그림 자체가 보이지 않을 정도라고 했다. 동양화 작업들만 묶어 두면 볼 수 있지만 말이다. 디테일이 보이지 않을 정도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발생한 또 다른 질문은 서양화와 같은 것을 그릴 경우 취약한 매체를 선택했다면 그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닐가. 그렇다면 동양화 매체를 가지고 그릴 수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닐까. 즉 다른 것을 그려야지 같은 것을 그리고 약하다고 불평불만을 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생각했다.

정용국_검은 안개_한지에 수묵_34.5×27cm_2012

roundabout ● 서양화의 시각에서 선택한 소재들을 동양화적 재료로 그린다면,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동양화적 시각에 맞는 소재나 주제의 선택이 절실 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지. 그리고 소재나 주제의 선택을 위해서는 동양화 매체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태도'에 대한 고찰, 재료에 대한 숙고가 전제 되어야 한다. 정용국 ● 많은 작가들이 장지에 수묵 채색이라고 표기하지만, 대부분 과슈나 아크릴을 사용한다. 동양화의 채색 방법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의 경우 이와는 다르게 매체가 가진 고유성을 어떤 방식으로 건 찾고자 했다.

정용국_검은 안개_한지에 수묵_34.5×27cm_2012

roundabout ● 최근 동양화 작업에서 '먹'이라는 매체의 고민이 반영된 작업이 있을까. 먹의 특성을 드러내거나 먹의 특성을 거스르는 작업이 있을까. 정용국 작가의 작업이 유의미성은 '먹에 대한 고민'을 지속하기 때문이다. 정용국 ● 첫 개인전부터 먹을 고민을 했다. 동양화에서 수묵은 포장된 측면이 많다. 예를 들어 '수묵 정신'이라는 용어롤 사용한다. 이는 수묵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남송 문인화에서도 사용되던 용어이다. '수묵 정신'에 대해서 대학 내내 배웠다. 먹에 어떤 정신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정신'은 먹에 부가적으로 (그러나 과잉적으로) 덧 붙인 그 무언가이다. 이것을 제거하면 먹의 물질적인 측면만 남는다. 이를 가지고 놀 수는 없을까? 그때 먹은 어떤 효력을 발휘할까? 이 지점이 궁금했다. 전통 화론을 보면, 묵수어천(墨受於天, 먹은 하늘로부터 받는다)이 있다. 그리고 필조어인(筆操於人, 붓은 사람에 따른다) 이 있다. 즉 붓을 다루는 것이 개인의 훈련된 능력에 기인한다면, 먹은 하늘로 부터 이미 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공부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정신의 맥락이 나온 듯하다. 먹을 잘 다루기 위해서는 정신적 수련을 해야하고, 붓을 잘 다루기위해서는 생활 체험, 경험, 훈련을 해야 한다. 결국 먹은 감각에 관한 것이다. 애매모호한 먹의 정신, 기 등을 걷어내면 감각만 남는다. 감각은 몸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면서 몸의 반응을 가장 예민하게 수용하는 것이 먹이다. 이후 개인전에서 먹이 물질적으로 가진 가장 예민한 지점을 어떻게 포착할지를 고민했다.

정용국_검은 안개_한지에 수묵_34.5×27cm_2012

"하나인 듯 하지만, 둘이다. 평소처럼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뒤에 종이가 한 장 더 있었다. 그림자에 대한 그림자가 탄생했다. 여기에는 나의 통제를 받던 것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발화한다. 이 이미지는 통제와 탈주, 그 둘의 만남이다."('작가와의 인터뷰' 일부) ■

Vol.20120812b | 정용국展 / JEONGYONGKOOK / 鄭容國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