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 Unreal

2012_0811 ▶ 2012_0910

초대일시 / 2012_0811_토요일 05:00pm

참여작가 고선경_김택기_이창훈_최윤정_최원석_천유진_한호

관람시간 / 10:00am~07:00pm

with Space gallery 798 Art District No.4 Jiuxianqiao Road, Chaoyang District, Beijing 100015, China Tel. +86.10.5978.9508

실제와 비실제 사이의 분열과 시각예술의 진화 ● 일반적으로 모든 시각예술은 바라보는 행위에서 비롯된다. 물론, 촉각과 후각 또는 청각으로 느끼는 감각들 역시 우리에게 다양한 상상의 근거 혹은 요소들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시각적 상상력은 말 그대로 많은 부분 시각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시각적 감각은 우리의 육체적, 정신적 활동의 시. 공간을 이루고 있는 "현실"을 기반으로 한다. 'Real/unreal'은 바로 그 현실을 기반하고 있는 우리의 다양한 정신적 활동의 결과가 어쩌면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현실과는 전혀 다르게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을 가정으로 구성된 전시다. 그야말로 이미지에 대한 불신에서 시작되는 가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미지의 불신은 곧 작가들의 표현의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게 된다. 이른바 자신의 감성과 상상력을 극대화 하였을 때, 드러나는 이미지는 결국 자신의 상상력과는 전혀 별개의 이미지가 생성된다. 이는 작가들에게 이미지의 자율적 생산의지라고 하는 새로운 경험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경험이야말로 작가들에게 자기 발전의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의지로 대변된다. ● 실제는 사물이나 대상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 가치를 뜻한다. 그 본질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판단은 정신적인 활동이며 그 정신적 판단기준의 다양함과 주관적 성격 때문에 본질의 의미와 가치는 객관적으로 판단되기가 쉽지 않다. 실제는 많은 사람들의 동의와 공통적 의견을 통해 정해지고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인간의 실제란 무엇인가' 라고 했을 때, 과연 그 본질적 의미를 어떻게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인간에 대한 정의는 지금도 과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등 다양한 방면에서 그 의미와 본질적 가치를 연구하고 있으며, 이는 학문이 시작된 유사이래 지금까지 지속되어 온 인류의 과제이기도 하다. 또한, '신의 실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역시 마찬가지다. 따라서 우리는 감각적으로 대상의 실재는 객관화 할 수 있으나 그 대상의 실제는 직. 간접적 학습이나 지극히 주관적인 정신활동에 의해 판단된다. 또한, 여기가 바로 시각예술이 발생되고 진화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 시각예술은 철저하게 공간에 지배 받는 예술이다. 물론, 퍼포먼스나 영상을 다루고 있는 시각예술은 시간과도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퍼포먼스가 이루어지고 영상이 제작되는 배경으로 공간은 그 작품에 지극히 물리적인 지배력을 가진다. 따라서 시각예술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누구나 쉽게 이해하는 부분이겠지만, 이러한 공간 개념은 모든 대상의 물리적인 존재 가치와 그 실재 파악에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을 포함한 모든 물질들은 공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중력에 비교적 자유로운 공기를 이루고 있는 물질 역시 자신의 존재를 위해 최소한의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이러한 최소한의 공간 점유는 물질이 지닌 성질로 인해 일어나는 다양한 운동, 즉 위치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최소 단위가 되기 때문이다. ● 실재하는 대상의 실제에 대한 판단들을 형상화 하는 공간. 시각예술의 또 다른 설명이다. 그 공간은 작가 개인의 공간일 수 있으며 그 공간을 통해 대상의 실제를 상상하는 관객들의 객관적인 공간이 될 수 도 있다. 이는 또한, 실제와 비 실제의 분열이 이루어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대상의 본질적 의미가 수 없이 많은 판단의 기준에 의해 재해석되는 즉, 단 하나의 객관적 의미로 판단되지 않는 공간으로서 시각예술 내에서 대상의 실제는 작가에 의해 때론 관객에 의해 끊임없이 비 실제화 된다는 것이다. 의미결정의 보루, 혹은 결정된 의미의 끊임없는 해체가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시각예술이 지니고 있는 공간에 관한 본질적인 의미다. ● 본 전시를 이루고 있는 7개의 각각 다른 시각예술의 표현기법과 장르들은 그 표현 방법의 차이만큼 시각예술의 다양한 변화 가능성을 보여준다. 기억과 욕망 그리고 왜곡을 사실적인 기법으로 표현하고 있는 회화, 생성과 소멸의 현장을 투사하는 사진, 빛을 표현하고자 하는 설치, 소통에 관한 다양한 생각들을 표현하고 있는 미디어로 이루어진 본 전시는 표현의 다양함뿐 아니라 그 기법과 장르의 상이함 속에서 작가들이 그리고 있는 대상들의 실제와 비실제의 분열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파악해 보는 것도 감상의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이다.

고선경_moving forest_캔버스에 유채_42×91cm_2012

기억이란 우리의 의식 속에 저장되어 있는 과거 경험들의 이미지 혹은 데이터들이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과거라고 하는 시간적 제한이다. 이러한 시간적 제한은 간혹 우리의 기억들을 다른 기억들과 섞어버린다거나 파편화 시킨다. 이는 기억이 객관적으로 그 기억이 형성되었던 그 상황을 그대로 재현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기억의 또 다른 특징은 잊혀 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잊혀지는 것이 사건의 기억 전체가 될 수 있고 때로 부분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잊혀지거나 부분적으로 남아있는 기억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자체 소멸되거나 다른 기억과 합쳐지면서 전혀 새로운 기억을 생성해 내기도 한다. 이러한 기억의 편린들로 자신만의 심리적 공간을 만들고 다시 그 공간에 부유하고 있는 현실의 감정들을 그려 넣음으로써 현실과 기억의 경계를 허물고 있는 고선경은 그 심리적 공간을 매우 섬세하고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현실에 있을 법 하지만 그 구성 자체가 지극히 환상적인 그의 공간에 관객들은 자신만의 기억들을 투사하면서 자신의 경험들을 서로 공유하게 된다. 이 공유는 문득 관객들의 잊혀졌던 기억들을 떠오르게 한다. 현실과 비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이다.

최윤정_Pop Kids #40_캔버스에 유채_150×150cm_2011

진지하고 매우 담백하게 왜곡된 소비사회에 집중하고 있는 최윤정과 인간의 욕망을 물질과 결합시키고 있는 천유진은 경험을 바탕으로 직접적으로 우리의 감성과 상상력을 자극한다. 왜곡된 소비사회는 일반적으로 소비가 중심이 되면서 우리의 인간성 역시 소비활동에 의해 형성되는 기존의 사고 패턴과는 전혀 다른 궤도에 놓여지면서 발생되었다. 최윤정은 이러한 소비사회에서 인간성 대신 자신을 드러낼 다양한 엑세서리들을 평면적으로 표현함으로써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부조리함을 단순하면서도 명쾌하게 그려낸다. 평면화되고 단순화된 인물들은 입으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고 눈은 커다란 안경으로 가려져 있다. 그 안경에는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소비사회가 생산해낸 다양한 이미지들이 반사된다. 반대로 그 이미지에 강제성에 자신의 의지 역시 가닥가닥 갈라진 머리카락처럼 갈라진다. 그의 화면에서 삶의 실제와 비실제가 명확하게 갈라지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반짝이는 사물들에 인간의 다양한 욕망을 치환하여 묘사하고 있는 천유진 역시 대상의 극단적인 묘사로 인간의 욕망 너머에 궁극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인간의 실제에 대한 고민을 풀어내고 있다.

천유진_욕망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12

빛은 우리의 정신적 활동에 직접적으로 활용되어 온 개념이자 실제하고 있는 물질이다. 이성의 상징으로써 인류의 인식 능력의 향상과 문명의 발전 역시 빛으로 설명되어 왔으며, 상징적으로 신이 가장 먼저 창조한 것 역시 빛이었다. 따라서 빛은 절대자나 숭배의 대상으로 우리 인류 역사에 드러나 있다. 이러한 빛은 인간뿐 아니라 자연, 넓게는 지구 전체의 모든 생명이 생성되고 진화해 나가는 가장 원천적인 힘일 것이다. 한호는 자신의 다양한 작품 형식을 통해 이 빛에 대한 연구를 지속해 왔다. 또한, 작가는 물위에 비춰지는 흔들리는 달빛에서 가장 한국적 정서를 찾아 이를 영상을 통해 표현하기도 했으며, 수 십만 장의 한지를 잘라 늘어뜨리고 그 한지를 따라 빛을 흐르게 하는 일종의 환영과 같은 불멸의 빛을 재현하기도 했다. 관객이 다가서면 평면의 작품이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는 우주공간처럼 이미지가 바뀌는 작품을 최근 선보이고 있는 한호는 그의 작품 주제인 빛 그 자체가 실제와 비실제의 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호_Eternal Ligh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LED_110×110cm_2012

관계의 소통과 사고의 흐름에 대한 관심을 표현해 오고 있는 이창훈은 본 전시에서 소통의 부재에 따른 대상 본질에 대한 오해와 그에 따라 발생하는 고정관념들이 우리의 사고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건물에 원래 있어야 할 창문이나 출입문, 말하자면 외부와 연결되는 모든 통로들을 없애버린 그의 미디어 작업을 통해 작가는 소통의 단절이 우리의 일반적 사고에 얼마나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는지를 실험한다. 관객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창과 출입문이 사라진 건물들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바라보다가 사라진 창문들을 발견하면서 깨닫는다. 과연 우리의 삶에 있어서 소통은 언제 어떠한 이유로 저렇게 자연스럽게 사라져 버렸으며 얼마나 우리의 삶을 그 소통 없이 오래 동안 유지해 왔었는지를 반문하게 된다. 무섭게 자리잡은 고정관념에 의해 넘나듦의 사고는 사라지고 자신이 유지하고자 하는 견고한 공간만이 내가 세상에 전하고 싶은 전부가 되어버린 답답함과 공유하지 못하는 타자의 삶들에 대한 두려움이 동시에 엄습해 온다. 모든 것이 공유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공유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시대다.

이창훈_Babel Street_97×130cm_2008

조각의 실제는 덩어리다. 물론, 기존의 다양한 표현방법의 변화로 인해 조각은 덩어리가 그 본질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매우 위험할 수 있다. 하지만, 조각은 재료가 지닌 성질에 매우 민감한 시각예술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김택기는 조각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변화와 함께 공간과의 직접적인 연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그는 스테인레스로 만들어진 가느다란 철사들을 가지고 공간에 드로잉한다. 덩어리가 아닌 선으로 이루어지는 조각이다. 마치 낙서장에 아무런 의도 없이 그어버린 선들이 제 스스로 형태를 만들어 내듯이 작가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수없이 많은 선들로 이루어진 선 덩어리들을 놓는다. 작가는 적어도 자신의 조각이 공간을 점유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과 섞이길 희망한다. 빈 공간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공기들이 자신의 조각을 피해서 흐르는 것이 아니라 통과해서 즉, 공기를 품고 있는 조각을 상상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공기를 품은 그의 조각은 정의와 선을 위한 싸움으로 늘 피곤했던 태권브이의 화려한 외출과 편안한 휴식을 그리고 있다.

김택기_외출-립스틱_스테인리스스틸, 우레탄 도색_32×40×17cm_2012

생성의 에너지와 소멸의 에너지를 항상 같은 지점에서 찾아왔던 사진작가 최원석은 음습한 런던의 한 도시에 자리잡은 카니발의 화려함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는 화려함으로 표현되기 보다는 전혀 다른 에너지의 공존으로 표현하는 것이 훨씬 그의 작품에 다가설 수 있는 표현이 될 것이다. 마치 미지의 세계로 이어지는 듯한 통로라도 발견 한 듯이 그의 시선은 무심하면서도 매우 흥분한 듯 보인다. 사실 작가는 자신이 원하는 색과 이미지가 만들어질 때까지 끊임없이 자신의 뷰포인트를 지킨다. 일종에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이미지를 대상에 투사하는 작업이다. 거기엔 그 어떤 기계적인 장치도 필요치 않는다. 오직 작가의 감각과 그의 또 다른 눈! 카메라만의 승부사다. 기계적 치환장치가 철저하게 작가의 주관적 판단에 움직여지는 그 순간까지 작가는 수 천 번의 카메라의 렌즈를 열고 닫는다. 우리가 눈 깜박임을 인지하지 못한 채 대상의 실재를 바라보듯이, 그 존재의 완벽한 멈춤을 신뢰하듯이 카메라가 대상에 작가의 사고를 완벽하게 투사하는 객관화 장치가 되는 순간까지 작가는 기다리는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따라서 최원석에 있어 실제와 비실제의 경계는 카메라에 의해 투사된 대상과 그렇지 않은 대상의 경계 그것이다.

최원석_Playground #04_디지털 C 프린트_93×120cm_2008

우리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믿음은 곧 우리는 언제 어디에든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발전될 수 있다. 만약 우리의 의식이 에너지로 치환될 수 있다면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각예술이 그려내고 있는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진 공간들 역시 우리의 경험과 기억들이 공유되는 실재적 공간으로 발전될 수 있으며 그 공간을 통해 에너지화 된 우리의 의식들이 서로 소통되고 섞이고 상상하고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다. ■ 임대식

Vol.20120811b | Real / Unreal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