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고호하다 Console your shadow

윤세영展 / YOUNSEYOUNG / 尹世榮 / painting   2012_0808 ▶ 2012_0814

윤세영_그림자인 너의 작은 의자 The Shadow, your small chair_130×90cm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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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808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09:30am~06:30pm

갤러리 라이트 gallery LIGHT 서울 종로구 인사동 147번지 미림미술재료백화점 2층 Tel. +82.2.725.0040 www.artmuse.gwangju.go.kr

상처는 어떻게 꽃이 되는가 - 상처의 연금술 ● 윤세영은 손톱으로 비구름을 부르는 화가다. 화가의 손톱 스크래치가 만들어내는 자욱한 빗줄기는「웅크린 그림자 2012」를 신화 속 나르시스로 만든다. 나르시스처럼 그림자 역시 빗물이 고인 물거울을 통해 존재의 심연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신화와 화가가 결별을 하는 지점이 있다. 자기애의 화신으로서 신화 속의 나르시스가 죽음의 파국을 맞고 있는데 반해 윤세영의 나르시스는 다감한 위무의 공간으로 우리를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다. 가령,「웅크린 그림자 2012」의 대척점에 있는 의자를 보라. 현실의 폭력에 의해 절단된 의자는 다시 꽃필 수 없지만 빼앗긴 생명력을 되찾아 분수처럼 솟구쳐 오른다. 지점토를 떼어 붙이는 수고로운 작업을 통해 피어난 저 흰빛은 그림자를 품어주는 물거울을 수원지로 한다는 점에서 변증적 화학변화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 상처의 연금술이라고나 할까. 윤세영의 그림은 하강한 빗줄기를 지점토의 흰빛으로 상승시키는 변증법적 운동을 엔진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물어야 할 것이다. 상처는 어떻게 꽃이 되는지.

윤세영_웅크린 그림자 The Crouching Shadow_162×130cm_2012
윤세영_너의 달 The Shadow, your moon_162×130cm_2012

세이렌의 노래를 들어라 ● 의식의 흐름이 끊어짐과 동시에 시간의 선형적 흐름이 깨어지는 기억의 부재상태를 비릴리오(Paul Virilio)는 '피크놀렙시(pyknolepsy)'라는 말로 설명한 바 있다. 아직까지 불가사의한 병으로 남아 있는 간질현상으로부터 나온 이 개념은 일상의 질서와 경계선을 마구 흩뜨려놓는 무의식적 지향을 포함한다. 화폭 속 빗줄기의 저 삐딱한 사선은 화가의 잠재된 불온성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일상적 질서에 대한 방법적 교란 의지로 읽을 여지가 충분하다. 아무려나, 수직선의 상하와 수평선의 원근을 뒤흔드는 빗줄기는 일종의 카오스 공간을 창조한다. 그 기표가 바로 둥그러스럼한 우물이다. 뤼스 이리가라이(Luce Irigaray)는 동굴의 불완전하고 허상적인 사물인식에서 벗어나 이데아 태양이 비치는 밝은 세상으로 나아가 제대로 사물을 보아야 한다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여성의 몸에 대한 폄하로 보았다. 그 폄하를 바탕으로 초월적 주체를 꿈꾸는 남성 판타지의 극장이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윤세영의 전복적 전언에 따르면 동굴은 벗어나야 할 곳이 아니라 지향해야 할 어떤 시원에 가깝다. 화폭 속의 우물은 오히려 동굴을 더 깊은 지층을 향해 파고들어가는 갱도로 만든다. 이 갱도는 곧잘 바다의 이미지로 연결되는데, 자신의 노래와 꼬리를 거세당하는 조건으로 사람이 되는 인어공주 모티브가 화가의 삶 어느 갈피에도 있었던 것이 아닐까. (아니, 그것은 차라리 본래적 삶을 상실한 채 파편화된 근대를 사는 모든 인간들의 조건이다.)

윤세영_너의 바람 The Shadow, your wish_72×60cm_2012

「그림자인 너의 손톱달 2012」에서 폭풍우 속을 항해하는 배는 언뜻 인어공주 모티브와 유사한 오디세우스의 항해를 연상시킨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오디세우스는 이성의 힘에 의해 세이렌을 굴복시킨 근대시민적 개인의 원형이다. 그에 따르면 인어처럼 반녀반조의 미분화 상태에 있는 신화 속의 세이렌은 자아의 형성을 방해하는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근대사회는 그리하여 합리적 이성에 의해 세이렌을 굴복시키듯이 수많은 주변부들을 타자화 시켜왔다. 그러나 이 기획은 미완으로 그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이렌의 바다로부터 해방된 합리적 자아의 출현이란 것이 무엇보다 돛대에 자신을 결박하는 억압을 대가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이렌은 이성에 의해 자신의 욕망을 억압하는 포박 없이, 즉 자연적인 것에 대한 거세 없이도 타자와의 열린 관계맺음에 성공한다. 이 비동일적 자아의 호출은 이성에 의해 추방당한 자연과 무의식, 수심을 잴 수 없는 내면성의 귀환을 상징한다. 이런 점에서 윤세영은 세이렌적 모성성의 화가다. 모성이 억압되고 배제된 타자들에 대한 공감과 연민을 낳고 있다면, 세이렌적 상상력은 앞으로 화가가 천착할 것으로 기대되는 여성적 자의식에 바탕한 불온한 질문을 잉태하고 있다.

윤세영_아이를 업고 잠든 너의 그림자 The Shadow, sleeping your child pick a back_90×130cm_2012
윤세영_너의 달 항아리 The Shadow, your moon_130×90cm_2012
윤세영_너의 의자 The Shadow, your moon_132×162cm_2012

내면의 아이 ● 회복기의 환자는 죽음이라는 망각의 강으로부터 돌아왔기에 지극히 사소한 장면들까지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감탄할 줄 안다. 보들레르는 이것이 영원한 유년을 살고자 하는 예술가의 정신이라고 했다. 윤세영의 그림 속엔 우리가 결별한 내면의 아이가 있다. 내면의 아이는 우리가 잃어버린 신화이기도 하고, 서둘러 폐기처분한 생명의 가치들이기도 하고, 더러는 도구적 이성의 맹신 하에 추방한 무의식의 영역이기도 하다. 나는 그림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점점 더 나에 가까워져가는 나를 희미하게나마 느낀다. 좋은 그림은 항상 나를 '생각하는 나 자신'으로 되돌아오게 하기 마련. 나는 화면 속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화면 속의 심연은 나를 들여다본다. 어쩌면 이 지극한 응시가 바로 사랑이 아니겠는가. ■ 손택수

* 윤세영의『그림자를 고호하다』전시가 진행되는 동안 작가가 직접 채집한 다양한 빗소리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Vol.20120808b | 윤세영展 / YOUNSEYOUNG / 尹世榮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