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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기념회 / 2012_0803_금요일_07:00pm_슈필라움
후원 / 인천문화재단 협찬 / 유네스코 에이포트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유네스코 에이포트 Unesco A.port 인천시 중구 신포동 51-1번지 Tel. +82.32.762.2406 unescoaport.blog.me
신포살롱 Sinposalon 인천시 중구 관동3가 1-1번지 2층 blog.naver.com/sinposalon
슈필라움 Spielraum 인천시 중구 선린동 1-1번지
꼬리표를 뗀 사물-이영욱의 사진전『이 도시가 꿈꾸었던 그 꿈은 무엇인가』에 관하여 - 본다는 것 ●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사물을 사물 그 자체로 보지 못한다. 사물에는 보이지 않는 꼬리표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대단히 신비한 일이지만 우리는 사물의 보이지 않는 꼬리표는 볼 수 있다. 여기에 '본다는 것'의 아이러니가 있다. 본다는 것은 얼마쯤은 보지 않는다는 것을 포함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물을 주목하는 행위는 곧바로 인접한 다른 사물을 지워버리는 필연적 결과를 도출한다. 예컨대 미술관에 설치된 어떤 미술품은 미술관 자체가 하나의 설치물이라는 사실을 종종 잊게 만든다. 어리석은 경비원에 대한 우화: 벽돌공장의 인부가 벽돌을 훔쳐 가는지 감시하던, 자기 직분에 충실한 경비원은 빈 수레만을 끌고 나가는 인부를 매일 보면서 안심한다. 인부가 절도한 물품은 바로 그 빈 수레인데 말이다. 우리가 사물을 볼 때 뭔가를 놓치는 것도 이와 같다. ● 이영욱의 이번 사진전 제목은『이 도시가 꿈꾸었던 그 꿈은 무엇인가』이다. 이 제목을 보면 우리는 '도시'라든가 '꿈'에 자연스레 주목하게 된다. 혹자는 이 제목이 발터 벤야민이 쓴 한 문장을 인용한 것임을 알아채고 이영욱의 사진들과 벤야민의 문예미학과의 관련성을 탐색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의미의 벽돌을 도둑맞을까 우려한 경비원의 시각으로 이번 전시를 관람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반대로 빈 수레를 뚫어져라 감시하면 아무 것도 놓치지 않게 될까. 아니다! 경비원은 인부를 벽돌이나 수레보다 덜 쳐다보게 되고 그가 경멸의 눈초리로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눈치를 못 채게 된다.
보기의 방법론 ● 니체는, 우리가 심연을 볼 때 심연 또한 우리를 본다고 썼다. 그는 부연설명을 생략했다. 심연을 있는 그대로 볼 때만 심연 역시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본다. 꼬리표를 달고 있는 심연은 사이비 심연이며 그때 나는 불교에서 말하는 진아(眞我), 즉 참된 자신일 리가 없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는 성철의 깨달음은 그것이 언어의 외피를 쓰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산이나 물이라는 개념을 벗어던지지 못한다. 산이나 물이라는 개념조차 버리고 산과 물을 바라보는 것, 어떠한 의미도 부여하지 않고 단지 사물 자체를 보는 것, 이것이 곧 내가 우리에게 권하는『이 도시가 꿈꾸었던 그 꿈은 무엇인가』를 보는 방법론이다. ● 누구나 없어진 물건을 찾으려 방안을 뒤져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없어진 물건이 아니라 찾지도 않았던, 그러나 이런 물건이 내 방에 아직도 있었나 혹은 있기나 했었나 하는 물건을 발견할 때가 있다. 없어진 물건을 찾는 노력을 잠시 중단하고 우리는 그 찾지도 않았던 사물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영욱의 사진은 이렇게 우연히 우리 앞에 놓인 사물과 같다. 우리가 무엇인가 찾다가 잠시 중단하고 바라보는, 방심의 사물! 우리가 찾으려 하는, 없어진 물건은 우리가 찾기를 포기하거나 또는 찾기를 잊었을 때 우리 앞에 어느 순간 제 모습을 드러낸다. 따라서 이영욱의 사진을 볼 때 당신이 찾고자 하는 의미를 그 이미지 속에서 경비원의 시선으로 찾아내려고 노력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미지라는 유령 ● 이미지는 침묵으로 존재한다. 이미지는 우리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언제나 우리가 이미지에게 말을 걸어놓고 마치 이미지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고 착각한다. 십수년 전의 인천(정확한 촬영일자와 장소를 모르는 게 전시를 보는 데 더 유익하기 때문에 더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다), 그것도 자유공원과 월미도와 그 근처를 찍은(아이고! 너무 자세한 건 아닌지!) 이영욱의 사진은 우리에게 뭔가를 말해주지 않는다. 그냥 우연히 나타난 사물처럼 우리 앞에 있다. 다시 말하자면 꼬리표를 뗀 사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 사물은 사진으로만 존재할 뿐 이 세상에 없다. 이 사진을 찍은 그 순간의 사물은 이미 사라졌다. 우리가 보는 건 그 사물의 유령일 뿐. 이영욱의 사진을 보고 그 장소를 찾아가서 피사체를 확인해보라. 사진 속의 그 건물이 그대로 있다고 하더라도 그 순간의 사물은 아닌 것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 사진은 물리적 실체로서 한 사물이며 그것을 통해 다른 어떤 것을 지시하거나 표상한다는 점에서 언어이다. 그런 의미에서 햄릿의 죽은 아버지, 즉 햄릿에게 뭔가를 호소하는 유령과 같다. 자신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복수를 요구하는 그 유령은 누구에게나 관찰되지만, 그 유령에게서 죽은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햄릿뿐이다. 예를 들자면 호레이쇼는 유령을 보지만, 그리고 그 유령이 선왕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만 유령의 메시지를 듣지는 못한다. 그러나 유령의 메시지를 수신한 햄릿조차도 나중에는 그 유령이 자신의 아버지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혹시 악마였다면? 아버지의 형상으로 나타나 복수를 명령한 유령이 아버지가 아니라면? 이미지의 본질에 대해서 햄릿이 보고 들은 유령과 그의 목소리만한 비유를 찾기도 어렵다.
낯선 낯익음 ● 이번 전시에 제출된 이영욱의 사진은 일정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지만 관람자는 자유롭게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아마 그때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영욱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전시된 작품들을 찍은 사람의 마음으로 들어가서, 그때 사진을 찍었던 작가의 생각이 무엇일지 더듬을 확률이 높다. 마치 햄릿이 죽은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듯이. 물론 관람자가 어떤 이미지를 보고 스스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가든지 그것은 텍스트를 향유하는 자유에 속한다. 이 자유는 결국 어떤 텍스트를 두고 우리가 각자 다른 이야기를 나누는 장을 성립시킨다. 그러므로 담론의 마당에서 가장 훌륭한 역할을 하는 텍스트는 팔색조 같은 매력을 갖고 있으면서 스스로는 침묵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영욱의『이 도시가 꿈꾸었던 그 꿈은 무엇인가』는 어떤 매력을 갖고 있는가? ● 우리는 무엇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어떤 범주에 쉽게 집어넣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더니즘의 창작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낯설게 하기'는 바로 이러한 '앎의 관습성'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이 '낯설게 하기'의 반복과 남발은 곧 '낯선 것'과 '낯익은 것'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었고 이에 따라 모더니즘은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이영욱의 사진은 이 흐릿한 경계에 위치한다. 그의 사진 속의 풍경들, 사물과 인간의 배치, 그 결과로서 남는 이미지는 낯설지도 않고 낯익지도 않다. 말하자면 낯선 낯익음. 이것은 낯익은 낯섦과는 전혀 다르다. 낯익은 낯섦은 텍스트의 타락이다. 그에 비해 낯선 낯익음은 알고 있으나 알 수 없는, 기지의 미지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꿈에서 본 모르는 사람의 얼굴과 같다. 분명히 꿈속에서는 아는 사람이었는데 깨어나 생각해보면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의 얼굴.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앎과 알지 못함의 중간 지대에서 서성대는 이미지를 바라보는 괴로운 즐거움이 이영욱의 사진을 볼 때 발생한다.
나만의, 나만의, 나만의 ● 우리는 남에게 절대로 설명할 수 없는, 설명을 한다 해도 남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어떤 매혹의 느낌을 가질 때가 있다. 사람들은 그런 경우 대부분 안타까워 한다. 나와 똑같은 느낌을 상대도 가졌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그러나 비밀이 없으면 행복도 없듯이 자기만의 느낌을 갖지 못하는 것은 큰 불행이다. ● 모두에게 똑같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하려고 얼마나 많은 매스 미디어가 부단히 우리에게 수많은 신호를 보내는가. 그런 신호를 우리는 하루에도 얼마나 많이(그것도 강제적으로!) 수신하는가. 사진은 수없이 복제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스 미디어의 성격을 갖지만 사진가는 그런 매스 미디어적 속성에 저항하는 사진을 찍음으로써 이 세계의 다양성에 기여한다. '너'와 '나'의 차이에 대해서 즐겁게 이야기할 때 너와 나는 비로소 '우리'가 될 수 있다. ● 부디 이영욱의『이 도시가 꿈꾸었던 그 꿈은 무엇인가』을 통해서 당신이 당신만의 그 무엇을 간직하게 되기를 기원한다. ■ 한재연
Vol.20120803e | 이영욱展 / LEEYOUNGWOOK / 李榮旭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