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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10:00pm / 일,공휴일 휴관
카페 드 유중, 유중아트센터 1층 서울 서초구 방배동 851-4번지 Tel. +82.2.599.7709 www.ujungartcenter.com
소녀시대의 현실과 진실 ● 홍수정의 다양한 작품들에 공통적인 것은 얽히고설킨 꽃잎의 연쇄이다. 아주 작은 꽃이어서 그런지 멀리서 보면 머리카락 같은 선으로 보이기도 한다. 꽃잎들은 다양한 도상들과 어우러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인간, 사물, 자연 사이를 종횡무진 헤집으면서 풀기 힘든 서사의 연결고리를 이어간다. 서른을 잔치의 끝남으로 정의한 최영미 시인의 말처럼, 꽃은 무엇보다도 막 20대를 벗어난 작가에게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을 일깨우는 소재이다. 홍수정에게 꽃은 '활짝 피어날 때가 있으면, 시들어버릴 때도 있는 것'의 상징이다. 영원한 청년기를 구가할 수 있는 예술은 개인에게 어쩔 수 없이 밀어 닥치는 자연적 숙명을 인간의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편일지도 모른다. 작가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작업을 계속해서 할 수 있는 삶은 무엇보다도 젊음의 연장에 해당된다. 예술가들이 보다 젊게 사는 이유는 그들이 현실보다는 상상 속에 살기 때문은 아닐까. 세필로 그려지는 깨알 같은 꽃잎의 연쇄는 현실의 어떤 차원을 삭감한 색 면과 형태 속에서 꿈틀대며, 이리저리 뒤엉키면서 꿈과 무의식, 그리고 상상의 가교가 된다. ●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증식하며 덩어리지는 꽃잎은 현실과 진실 속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명확히 언어화할 수 없는 욕망의 몸통을 이룬다. 얼굴 없는 이 몸통은 익명적이다. 홍수정의 작품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소녀 캐릭터는 소녀 일반을 말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어머니나 할머니의 소녀시절도 포함되는 보편적인 여성의 생애주기 및 마음의 상태와 관련된다. 홍수정의 작품 속 소녀의 얼굴은 공백이며, 단순화된 형태를 채우는 것은 색 면이다. 빈 공백에 간간히 찍힌 점들조차도 자연적 명암법과는 거리가 있다. 점들은 파동을 이루는 선과 대조되는 입자를 이루며 인물의 물리적 상태를 은유한다. 그녀들의 익명성을 강조하는 것은 순수한 소녀 일반을 상징하는 하얀 원피스, 그리고 두건이나 마스크 같은 의상 소품이다. 소녀 내부와 외부를 채우는 것은 식물성이다. 꽃잎의 연쇄는 물론이고, 소녀와 또는 단독으로 자주 나타나는 야채(파프리카, 브로콜리, 버섯 등), 그리고 소녀를 에워싸는 환경인 숲이 그렇다. 작품에 따라 강약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부드러운 파스텔 톤의 색감 역시 소녀의 세계와 어울린다. 상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소녀들은 대부분 혼자 논다. ● 블루, 그린, 레드 계열로 같은 크기로 그려진 작품 「혼자 놀기 시리즈」는 숲 한가운데 난 길 위에 서서 다양한 포즈를 취한 소녀의 모습들을 보여준다. 소녀의 발은 땅에 깊숙이 박혀있고 소녀를 숲과 연결시켜주는 선의 흐름은 동시에 소녀의 감정상태를 드러낸다. 선들은 눈 코 입이 없는 소녀의 상태를 표현해주는 것이다. 풀이나 나무처럼 뿌리박힌 발은 소녀가 그곳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한다. 모성적 공간인 숲은 보호이자 유폐의 상징이다. 때로 소녀는 나무 위에 올라앉아 세상을 바라본다. 소녀가 처녀로 좀 더 성숙되자 화면에는 죽음의 기미가 드리운다. 봉오리 진 꽃보다 활짝 핀 꽃이 쇠락에 좀 더 가까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필리아」 시리즈는 미술사에 등장한 오필리아의 도상을 번안하면서 절정의 아름다움에서 죽어가는 여인을 보여준다. 시간의 흐름처럼 보이는 물살에 정처 없이 떠내려가는 오필리아의 머리나 양손에서 굽이치는 선의 흐름은 비극적 파토스와 멜랑콜리를 더욱 강조한다.
반면 떠내려가지 않고 우뚝 서있는 오필리아의 경우 매우 강인한 인상이다. 폭포처럼 아래로 굽이쳐 흐르는 머리다발은 그녀의 치명적 매력과 욕망을 감추지 않는다. 선들은 형태의 외곽을 파열시키며 죽음의 이미지를 덧씌우기도 하고, 꼬리를 무는 사고의 흐름과 꼬임을 표현하기도 한다. 요부(femme fatal)에게 빠지지 않는 이 매혹적이고도 불길한 머리칼은 다른 희생자를 요구함 없이 자족적으로 소박한 욕망을 채운다. 전형적인 요부는 자신의 욕망의 촉수를 길게 뽑아내서 상대를 칭칭 감아 무력화시킨다. 요부에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이중적 사고가 투사되어 있다. 홍수정의 작품에서 두건이나 망토, 헐렁한 옷차림의 인물은 소녀라기보다는 중성적인 느낌을 준다. 이점은 미성숙한 소녀에게서조차 기어코 기묘한 성적 매력을 찾아내곤 하는 남성 작가들의 시선과는 차이점이 있다. 가령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저자인 루이스 캐롤이 작품의 실제 모델인 앨리스 뿐 아니라, 손수 찍은 수백 장의 소녀 사진들에는 남성이 미성숙한 여자에게 품는 로망 같은 것이 발견된다. 순수한 소녀에 대한 로망에는 남성의 욕망이 내재되어 있다. 가령 거기에는 여성을 비천함(창녀)과 숭고함(성모, 또는 천사)의 길 사이에서 명확히 진로를 아직 확정짓지 못한 존재의 애매함과 이러한 불확실함으로부터 비롯된 매력이 포함된다. ● 무엇보다도 여자가 소녀로 남아있는 시간은 너무도 짧은 것이어서, 그들의 물신적 매력은 더욱 빛을 발한다. 사진이나 그림은 이 짧은 순간을 영원한 현재로 고정시키곤 한다. 홍수정의 작품을 보면, 여성이 보는 소녀의 모습 또한 환상적이긴 하지만, 잠재적인 성적 대상이라는 느낌은 없다. 한국의 현실 속에서 소녀는 너무 일찍 세태에 눈을 뜨거나, 반대로 책임 있는 성인이 되기 위해 소요되는 기간이 무한정 늘어나 있어, 순수한 소녀의 모습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난감하다. 홍수정의 작품에서 풍기는 동화적인 느낌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단순한 환영이나 허구와 달리, 상상은 현실과 관련되어 있다. 감각과 지성 사이에 연결고리를 만드는 상상은 가짜라고도 진짜라고도 할 수 없는 세계를 이룬다. 이렇게 연출된 상상의 세계 속에서 소녀는 작가의 대역이 되어 세상에 대한 체험과 느낌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 홍수정의 작품에서 줄줄이 이어지는 꽃잎은 이리저리 파동 치면서 자연과 인간을 이어준다. 그 자연에는 보이는 것 뿐 아니라 무의식이나 꿈, 욕망의 흐름이 포함된다. 상상은 현실의 어떤 차원은 축소하고 어떤 차원은 증폭한다. 어떤 것은 묶어주고 어떤 것은 풀어준다. 일련의 규칙 속에서 펼쳐지는 가변성과 풍부함은 예술과 놀이를 근접시킨다. 타인의 접근이 차단된 숲 같은데서 혼자 놀고 있는 소녀는 다소간 종잇장 같은 창백함을 지니지만, 음식물이 함께 등장하는 또 다른 작품 군에는 보다 현실적인 면모를 갖춘다. 작품 「오필리아」의 신화적 인물조차도 현대적인 웰빙 식단을 앞에 두고 있다. 먹기란 타자를 동화하는 것으로, 이러한 동화작용은 식인종들의 식사부터 종교적인 성찬식에 걸친다. 홍수정의 작품 속 음식물은 거의 식물성이다. 푸른 파프리카나 붉은 버섯 등은 현실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은유적 대상이다. 인간의 상징 속에서 음식은 성별(gender)이 부여되는데, '근육질의 남자와 섬유질의 여자' 같은 일상적 표현에서 보이듯이, 이러한 분류에서 식물성은 여성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작가는 여성의 먹는 욕망을 인정하되, 육식 위주의 타자 착취적 지향을 벗어나고자 한다.
먹는 것에 내재된 욕망은, 특히 그 대상(희생물)이 동물성일 때 여성과의 중첩은 불가피하다. 페미니즘의 일파가 육식에 대해 비판적인 이유는, 가부장적 지배 문화 속에서 여성과 동물이 희생되는 타자라는 점에서 한 묶음이 되기 때문이다. 홍수정의 작품에서 사랑스러운 소녀는 사랑의 주체이기 보다는 대상이다. 하얀 옷을 입은 소녀는 아무것도 씌여지지 않는 백지 같은 청순함을 가진다. 그러나 소녀에게도 시간이 엄습할 것이고, 반드시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무엇인가 이 공백을 채울 것이라는 생각은, 소녀가 주인공인 상상의 풍경을 멜랑콜리로 물들인다. 무엇보다는 소녀가 소녀일 때는 소녀임을 인식하기 힘들다. 소녀는 마치 사랑처럼 지나간 후에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홍수정의 작품에서 소녀의 세계를 지배하는 시간성 자체가 멜랑콜리하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우울과 멜랑콜리를 정신분석학적으로 탐구한 『검은 태양』에서 멜랑콜리 환자의 독특한 시간성을 묘사한다.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멜랑콜리 환자의 기이하고도 느린, 혹은 주의 산만한 언어가 그로 하여금 중심을 잃은 시간성 속에서 살아가게 한다. ● 그 시간성은 흘러가지 않고 선과 후라는 개념이 그 시간성을 지배하지 못하며, 한 과거로부터 어떤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게 하지도 않는다. 멜랑콜리 환자의 기억은 이상야릇하다. 모든 것이 지나가버리지만 그는 그 지나가버린 것에 충실하고 거기에 못 박혀 있다. 거기에는 가능한 변동도 미래도 없다. 비대해진 과장된 과거가 심적 연속성의 모든 차원을 점령하고 있다. 향수병은 되찾아야할 장소라기보다는 시간이다. 점차 삭제되어 가는 시간 속에 거주하는 우울증 환자는 필연적으로 상상계의 주인이다. 소녀는 이 상상계로부터 상징의 세계로 나아갈 것이다. 그것이 지배 사회의 요구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적 해석에서 아이가 상상에서 상징으로의 이동하는 것은 어머니로 부터 분리이자 아버지와의 동일시를 의미한다. 어머니나 할머니에게도 해당되는 소녀를 말하는 홍수정의 작품에는 분리의 슬픔이 배어있다. 『검은 태양』은 대상과의 분리가 우울증적 국면을 작동시킨다고 말한다. 어머니를 잃으면서 그리고 부정에 의지하면서 소녀는 어머니를 기호로 이미지로 단어로서 다시 찾는 것이다. 소녀가 어른이 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은 우울하다. ● 이 우울증, 즉 모든 부재하는 사물을 표상하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분리의 슬픔을 격어내야만 상징적 활동이 가능하다. 작가는 소녀로부터의 분리의 시간을 감내함과 동시에, 작품이 사회와 소통하기 위해 한 발을 담가야만 하는 상징계로의 진입을 시도한다. 그러나 소녀는 현실을 부정하고 부인하며, 이미 상실했을지도 모르는 것에 집착한다. 멜랑콜리에 대한 크리스테바의 해석은, 홍수정의 작품에서 소녀들이 상상의 세계 속에서 자유롭게 놀기보다는 현실의 충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숨어드는 느낌을 설명해준다. 정신분석학에서 상상계라는 무대를 지배하는 중요한 세트는 바로 거울이다. 자기가 꾸민 무대에서 혼자 노는 소녀는 거울의 방에 갇혀있다. 소녀의 무대인 숲은 나무들로 이루어진 수직적 구조의 반복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상호반영성 역시 창살 같은 유폐를 연상시킨다. 반대로 소녀는 날개 같은 의상을 탁 트인 평원 같은 공간에 가득 펼치면서 자유롭게 숨쉬기도 한다. 그러나 숲이 가지는 무한 반사의 이미지는 이 전시의 대작 「me me me」처럼 분신과 분열이라는 주제와 분리불가능하다. 이 작품은 긴 화면을 따라 여섯 개의 얼굴이 겹쳐져 있는 모습인데, 얼굴 표면 아래에서 삐져나온 선들은 머리카락이랑 중첩된다.
몸 안팎을 가로지르는 선들은 감정 상태와 육체 상태의 교차지대를 드러낸다. 자신의 반영인 분신은 나르시스의 신화가 알려주듯 죽음과 근접한다. 작가는 아름다움의 정점에서 불현 듯 불길한 기운을 풍기는 오필리아라는 주제를 여러 점 그렸다. 오필리아를 죽음의 세계로 잠기게 하는 것은 나르시스를 같은 운명으로 이끌었던 수면이다. 작품 속 수면은 그것을 바라보는 자를 심연 깊숙이 빨아들일 듯 어지럽게 일렁거린다. 홍수정의 작품 속에 호출된 나르시스는 사랑의 상상계를 지배하는 신화 중 하나이다. 혼자만의 세상에는 자기애가 내재되어 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사랑의 역사』의 한 장에서 자기애를 다룬다. 저자는 우리가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 대상 없는 사랑의 현기증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과 마주하게 된다고 말한다. 나르시스와 그의 분신 사이에 에로틱한 결합을 방해하는 것은 얕은 수면이다. 나르시스는 그가 사실상 기호들의 세계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온통 꽃에 둘러싸인 채 떠내려가는 오필리아는 나르시스적 공간의 축축하고 감추어진 마비상태와 식물적 도취에 잠겨 있다. ● 거울 속에 비친 상은 자아의 내면이라는 것으로 이끌어간다. 그것은 동시에 자기성애적 성찰이다. 크리스테바는 나르시스의 신화에서 자기 반영을 이끌었던 그 샘물을 모성적 육체와 연결시킨다. 모성적 육체의 상징으로서의 샘물은 사람을 집어삼키고 생명을 잃게 한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그가 물속의 다른 사람이 바로 자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을 때, 그는 하나의 심적 공간을 구축한다. 말하자면 그는 주체가 된 것이다. 그것은 반영의 주체인 동시에 죽음의 주체이다. 그는 사랑을 하되 자신을 사랑한다. 말하자면 그는 능동적이고 수동적이며, 주체이자 대상이다. 나르시스의 대상은 심적 공간이다. 그것은 표상 그 자체이고 환몽이다. 그러나 나르시스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죽는다. 홍수정의 작품은 나르시스 신화와 연결된 반영이론의 주요 요소들 중 하나를 강조한다. 홍수정의 작품에서 소녀는, 타자가 자신의 반영이든 아니든 간에 그 타자를 사랑하는 이에게 비로소 생성되는 자아를 말한다. 이 내면의 공간 속에서 예술 또한 번성할 것이다. ■ 이선영
당신의 꿈이 뭐냐고 물음을 던졌을 때, 타자들은 잠시나마 상상하고 생각한다. 과연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간절히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나의 생각에 이끌려 그려지는 작품 속의 꽃잎은 상상 속의 로망에서 시작되어 하나씩 퍼져나간다. 꽃은 만발했을 때, 그윽한 향기로움과 찬연한 색을 무기삼아 그 어떤 대상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 내공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생생하게 핀 꽃에 견줄만한 젊음을 가진 나는, 내 자신의 꿈과 열정을 발산하는 매개체로 자연 속의 꽃잎을 선택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싶은 '세속적 욕구'와 은은함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내재적 아름다움'의 특성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는 것이 꽃잎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공존하기 힘들어 보이는 두 존재 속에 우리는 늘 살아간다. ●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일상의 소소한 것에서부터 정치적 이슈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에 관심을 갖고 시야에 들어오는 개체의 한 부분을 담아, 꽃잎의 연쇄 드로잉을 통해 의식적인 선에서부터 무의식적인 선에 이르기까지 꽃잎들을 그려간다. 이 순간 나는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들며 꽃잎을 잇는다. 세필로 그려지는 꽃잎은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자라나고 증식해 나간다. 이렇듯 타자들의 생각덩이들은 모이고 모여 하나의 꿈덩이가 되고, 그 꿈덩이들은 또 다른 형상으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다양한 소재로 등장하는 타자는 숨을 쉴 수도, 쉬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에 놓여진다. 여기서 개체도 하나의 꿈을 가지고 이야기한다. 이처럼 우리는 의식적으로 세상을 살아가기도 하지만,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세상에 몸을 던지기도 한다.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존재가 공존하는 것처럼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들며 꽃잎은 이어진다. 작업 전반에 극대화되는 색면의 이미지는 색의 단순화를 통해서 현실세계 속에 속하지 않고 꿈을 꾸는 주체가 되며, 깨알같이 반복되는 점, 선, 도형들은 하나의 꿈덩이가 되어 숨쉬고 꿈틀대며 화면을 구성한다. ● 활짝 피어날 때가 있으면, 시들어버릴 때도 있는 것이 꽃이자 인생이다. 인생은 예술이 되고, 예술은 꽃이 된다. 고로 인생은 꽃이다. 나는 꽃잎을 통해 인생의 이런 모습을 담고 싶었다. 내가 관찰하고 만들어가는 작업 속의 세상은 우리와 동떨어진 세계가 아닌 것이다. 더불어 꽃잎으로 대변되는 사회의 존재 하나 하나가 무척이나 소중한 존재임을 나타내고 싶었다. 동시에, 이러한 꽃잎의 연쇄 드로잉이 작업에서와 같이 서로 이어질 때, 비로소 나의 작업도 '세상'이라는 '조물주의 작품'처럼 '하나의 완성품'이 되어간다는 점을 은유적으로 드러내고도 싶었다. 이는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꿈을 은유화하여 색면의 이미지와 초현실적인 표현의 복합된 뉘앙스로 형상화된다. 이렇듯 내면적 꿈의 형상인 꿈덩이를 드러내고 현실 속에서의 꿈을 억압된 것으로부터 자유롭게하고 싶은 욕망을 반영하고 싶었다. 본인은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적 진술을 통해 타자와의 이야기를 시도한다. 타자가 가지는 억압된 꿈에 대한 고민을 풀어나가며 관객의 내면의식을 일깨우고자 한다. 결국 본인의 작품은 우리 모두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있을 다양한 꿈을 바라보고 상상하는 자기 고백적 치유의식과 상호작용을 위한 내적 심리세계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 홍수정
Vol.20120803d | 홍수정展 / HONGSUJUNG / 洪受廷 / painting